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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노사임당 Sep 19. 2023

이 낮의 끝을 잡고 사랑했지만

가야할 시간입니다.

 퇴근하고 집에 들어옵니다. 밥 짓는 냄새가 퍼진 집은 배꼽 속에 사는 요정이 제 나라 음으로 노래를 부르는 시간입니다.




출근하기 전 예약을 눌러놓은 밥은 취사가 완료되었으니 서둘러 식탁을 차립니다. 오면서 산 양념된 고기를 볶고 미리 만들어놓은 반찬을 덜어 하나씩 놓습니다. 7시간 가까이 공복이었기에 식욕이 크지 않은 저도 무척이나 배가 고픕니다. 차리는 동안 퇴근한 남편도 도착하면 모두 저녁밥을 시작합니다. 허겁지겁 먹어 치웁니다.  먹는데 관심이 없다가 배가 고파지면 허겁지겁 먹어치우는 게 제 식사 습관입니다. 좀 나쁜 버릇이지요.


1등으로 먹고 나면 식구들이 다 먹을 때까지 멍하니 앉아있기가 싫어 안방에 있는 컴퓨터로 갑니다. 컴퓨터를 켜지요. 오늘 쓰려고 슈퍼에서 생각한 주제를 가지고 글을 시작합니다. 하루 종일 이 시간을 가장 기다렸으니까요. 예, 요즘은 글 쓰는 재미에, 글감 얻을 목적으로 슈퍼에 출근하고 모욕적인 갑질 손님도 참아내고 돌려 까기 좋아하는 비난식 대화술의 달인 사장님에게도 "그만둘게요" 안 하고 참을 수 있습니다.


예전 가슴속 응어리를 글로 뱉어내었으면서도 솔직하지 못한 글쓰기로 울화가 풀리지 않았었다면. 이제 제 성격에서 변한 건, 자신에게 아주 조금은 관대해졌달까 인정을 한다고 해야 할지 '그래, 이게 나야, 어쩔 거야. 모자라고 못생기고 야무지지 못하고 똑 부러지게 잘하는 거 없는 이게 난데." 하며 자신을 내어 보이면서도 조금은 거리를 유지할 여유가 생겼습니다. 참으로 모자란 저를 그냥 저로 인정하는 마음. 그 마음의 준비는 완료된 것 같습니다.

불혹의 끝을 잡고, 나는 누구여야 하는지 갈팡질팡 하지 않는 불혹이 되어가는 것 같습니다. 맘에 1%도 안 들든 99% 들든 아무 상관없이 이 몸뚱아리 뇌뚱아리가 '나'라는 전부라는 걸요.


오늘은 슈퍼에 출근하지 않습니다. 아이들의 학교 선생님과 상담이 있는데. 그 핑계를 대고 쉰다고 말했지요. 기회만 있으면 쉽니다. 월급은 제가 일 하려는 마음을 먹는 것에 영향이 없었습니다. 돈이 꼭 필요한 곳이 있어 하려고 한 것도 아닙니다. 물론 아이들 학원비가 부담이 되기 시작은 했습니다만, 윗집 층간소음으로 집에서 주식으로 돈을 버는 것도 그림을 그리는 것도 옷을 짓는 것도 차분하게 하는 게 불가능해서 이니까요. 물론 돈이 필요 없다거나 가진돈이 많다거나 하 말도 아닙니다. 시골에 2억짜리 집 한 채 있는 게 재산의 전부입니다. 그러니 부자라거나 중산층이라고 부를 층에 발도 걸치지 않았을걸요?


그렇지만 저는 진심 부자입니다. 남편이 100만 원 벌어줄 때도 아무 불평 없이 살림 살았고요. 200을 벌어줘도 그랬습니다. 저에게 돈은 '많아본 적이 없어서' 지금 없으니 불편하다는 생각 같은 건 해보지 않은 물건이거든요. 오히려 없어보았기에 지금 가진 돈이 너무 감사하고 정말 행복합니다. 이렇게 돈 걱정 없이 살게 되어서요. 소도시 면에 사는 덕으로 집값도 싸서 40평 같은 30평대 브랜드 아파트에 살고 있으니 <몇 십억 19평 서울 집에 사는 저보다는 부자>들보다 '의, 식, 주'중에 '주'만 볼때 제가 더 좋은 집에 비싸 보이는 집에 사는 건 맞으니까요. 가난한 부자입니다.


웃자고 하는 말로 제 지인들은 의사도 있고 재산이 벌써 10억이 넘어가는 사람도 있지만 매일 돈이 없어서 남편을 닦달합니다. 돈 좀 많이 벌어오라고요. 그 친구에게 말해요. "돈 많은 거지라고요." 말이 좀 심하죠? 근데, 본인이 가진 돈이 얼마나 많은지 얼마나 행복할 수 있는지 만족이 없으니 욕 좀 들어야 해요.ㅎㅎ



오늘 제가 글을 시작한 건. 오늘 쉬기 때문에 이 하루의 끝을 잡고. 글을 사랑하기 위해서입니다. 수채화 배우러 10시부터 수업 듣고 선생님과 상담을 위해 두 군데 학교 갔다 오고 나면 하루가 훌렁 가버리고 그럼 퇴근할 시간즈음에 보통의 하루처럼 저녁밥으로 마무리될 공산이 크니까요. 그렇게 되면 끝나버린 하루가 너무 허무할 듯해서입니다. 금쪽같은 하루를 아껴 쓰기 위해 글로 시작하려는 마음을 먹었습니다.

배란다 수영장 개장에도 행복했던 몇 년전.

퇴근 얘기를 처음에 한 것도 글을 시작하는것까지는 행복하게 하는데. 그 이후로 식구들이 밥을 다 먹으면 손가락도 까딱하지 않는 남편님은 안방 컴퓨터가 있는 침대로 퇴근시켜놓고. 밥그릇 싱크대 넣고 반찬 넣고 둘째 씻기고 잠깐 글 쓰다 머리 말려달라하면 말려주다가 또 잠깐 쓰다가 불려진 그릇 씻으러 부엌갔다가 방이 왜 그렇게 엉망진창인지 잔소리 하러 아이들 방에 잠시 가야하고 그러다 잠시 스치듯 글 몇자 찍고..하면서 쓰는 글이다보니 '요술처럼 자동모드로 완성이 안되어서' 입니다. 남편이 잠이 들랑 말랑 하면 방에서 불켜놓고 컴퓨터도 더 하기 미안하구요.


가능하면 아무 방해도 없이 메트로놈처럼 들리는 윗집 할머니의 뒤꿈치 망치소리를 음악삼아 쓰는 아침글이 더 감사하고 행복하고 소중하기 때문입니다. 지금 9시 40분인데. 어여 챙겨서 그림 그리러 가야하는데 이렇게.


"이 자판의 끝을 잡고 우린 사랑했지만..우리의 사랑에 어쩔수 없는 이별이 찾아 올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어~~" 이 낮의 끝을 잡아 보았으나, 이별의 시간입니다.



되도록 일찍 볼 일이 끝나면 아침부터 느낌 살린다고 살 생각인 돌체 라떼를 들고 집에 오겠습니다. 또 못다한 글을 토해내러요. 아무도 관심없을 제 이야기를 몰래 뱉어놓고 도망치러요.




(아침부터, 저녁에도, 새벽에도 글을 어쩌다가 읽게 되신 분께 감사드립니다. 특히나 일부러 글을 읽으러 와 주시는 작가님들은 엄청난 크기로 감사합니다. 저는 얼굴책이니 안에별무게같은 sns를 안해서 '좋아요. 구독' 이런 재미를 몰랐는데 이게 엄청 힘이되고 재미가 있고 의욕을 고취시키는 동기부여더군요. 항상 좋아요 댓글 감사합니다. 이제 글 안쓸거처럼 감사합니다, 그동안. 모드네요.ㅎㅎㅎ 저 그만 다녀오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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