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거릿 애트우드
문장도둑 매거진을 구성하면서 가장 중요했던 점은 일단 밑줄 그은 책들을 정리하는 의미였습니다. 그런데도 처음 매거진에 소개할 책이라면 단연코 도둑 신부여야지 하는 마음으로 훔친 문장을 자랑해 보겠습니다.(쓰신 책이 많아 기쁘다는 건 덤입니다) 그래놓고 먼저 발행을 누른 책이 있네요..(사진가의 기억법이라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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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지니아는 수수께끼이자 엉킨 매듭이기도 하다. 토니가 실마리를 찾아 잡아당길 수만 있다면 그녀는 물론이고 관련된 모든 사람 입장에서 많은 부분이 해결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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웨스트는 살짝 끙끙거리는 소리를 내며 계속 자고 있다. 아마 꿈속에서는 고함을 지르는 중일 것이다. 꿈속에서는 소리가 항상 증폭되기 마련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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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행히 쓰레기 봉지를 깔고 넘어져 봉지가 터졌다. 하지만 웨스트에게는 말하지 않았다. 그녀는 항상 그를 조심스럽게 대한다. 그가 얼마나 약하고 깨지기 쉬운 존재인지 알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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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지니아의 이름을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해묵은 분노와 굴욕감과 혼란스러운 고통이, 또는 그 흔적들이 되살아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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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맛있는 달걀처럼 사소한 데 기뻐하고, 맛없는 달걀처럼 사소한 데 우울해한다. 비위를 맞추기는 쉽지만 지켜 주기는 어려운 사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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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튼 예전에 로즈가 그녀에게 딱 어울리는 스타일이라고 강력히 추천했던 검은색 가죽 정장은 입는 순간 그녀를 아방가르드한 이탈리아제 우산 꽂이로 변신시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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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는 세인트조지역에서 내려 베드퍼드가로 나간다. 전단지를 나누어 주는 사람들과 꽃을 파는 노점상과 길모퉁이에서 플루트를 연주하는 남자아이를 지나 차에 치이지 않게 조심하며 파란불에 길을 건너고, 주 경기장을 기나 잔디가 깔린 메인 캠퍼스의 둥그런 운동장을 가로지른다. 거무칙칙하고 오래된 골목길을 따라가다 모퉁이를 돌면 매클렁 홀이라는 건물이 나오고, 그 건물에 그녀의 연구실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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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얘, 이거 하나만 기억해. 여자가 PMS(생리 전 증후군)에 걸리면 분비되는 호르몬 알지? 남자는 그게 1년 내내 분비된다고 보면 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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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쪽 벽에는 벤저민 웨스트의 <울프 장군의 죽음>을 본뜬 저질 복제화가 걸려 있다. 토니가 해석하기로는 얼굴이 대구배처럼 새하얀 울프가 경건하게 눈을 치켜뜬 가운데 시체를 사랑해 마지않는 관음증 환자들이 근사한 옷을 차려입고 그 주변에 모여 있는 음울한 그림이다. 토니가 그 그림을 연구실에 걸어 놓은 이유는 학생들과 자신을 위해서, 그 직업에 종사하는 사람들 특유의 허영심과 순교자 행세를 경계하기 위해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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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년의 땅을 떠나 젊은이들의 나라에 표류한 난민이 된 기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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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들은 환경을 보호하자고 난리법석을 떨고, 독한 청소용품을 쓴다고 엄마를 나무라고, 문구류도 재활용품을 사게 하면서 이 망할 전등 하나 끄고 다니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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깨워야 할까? 깨워 주길 바랐으면 메모를 남겼을 텐데. 100퍼센트 그런 건 아니지만. 래리는 가끔 그녀가 자기 마음을 읽어 주길 바란다. 그럴 만도 하다. 예전에 그녀는 래리의 마음을 읽을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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캐리스는 롤스로이스를 못마땅하게 생각했다. 몸을 웅크리고 불안하게 앉아 있는 것만 보아도 알 수 있었다. 하지만 토니는 알아차리지 못했다. 이게 그 큰 차야? 그러고는 그만이었다. 토니는 차에 관한 한 얼마나 귀여운지 모른다. 역사적인 사실이나 총기류 같은 것에 대해서는 모르는 게 없지만 차종은 절대 구분하지 못한다. 그녀에게 자동차는 큰 차와 다른 차, 두 종류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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젊고 풋풋했고 발정난 개처럼 뛰어다니던 그 시절에 거기 살았다니 생각만 해도 우습다. 큼직한 앞발을 가구에 얹고 희망에 부풀어 커다란 혓바닥으로 아무 얼굴이라도 핥던 시절. 나를 좋아해 줘! 나를 좋아해 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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착한 사마리아인이 나중에 어떻게 됐는지 생각해 보라. 도적 떼에게 습격당해 쓰러진 사람을 길가로 끌고 나와 수레에 싣고 집으로 데려가서 수프를 먹이고 손님방에서 하룻밤 재워 주었을 때 어떻게 됐는가 말이다. 그 얼빠진 사마리아인이 아침에 일어나 보니 금고는 부서졌고, 기르던 개는 목이 졸렸고, 아내는 겁탈당했고, 금촛대는 사라졌고, 카펫 한가운데에는 큼지막한 똥 덩어리가 있었다. 애당초 변장용 흉터에 가짜 피였다. 야바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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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건 마치 컨버터블을 타고 질주하면서 앞차 뒤꽁무니를 바짝 쫓아가고, 깜빡이도 켜지 않은 채 차선을 들락날락하고, 카스테레오를 최고로 틀어 온 동네를 괴롭히고, 리본, 포장지, 먹다 만 필로 페이스트리 샴페인 트러플 초콜릿 등 한 번 쳐다본 것만으로 쓰레기가 되어 버린 물건들을 차창 밖으로 던지는 것과 다름없는 행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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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르스름하면서 희끗희끗한 머리는 뒤로 빗어 넘겼다. 아버지는 이런 코와 머리 때문에 강한 맞바람을 맞으며 서류라는 목표물을 향해 열심히 날아가고 있는 사람처럼 보인다.
...
하지만 남자들에게 행복은 꼭 있어야 하는 것이 아니다. 아버지는 행복하지 않다고 불평한 적이 없다. 어머니하고는 다르다.
275
아버지는 참전 용사다. 어머니는 아버지가 참전은 했을지 몰라도 어머니처럼 전쟁을 생생하게 겪지는 않았을 거라고 한다.
281
이가 서로 부딪치며 음식을 잘게 부수는 소리를 듣는 것은 당황스러운 일이다. 내가 여기 있는 줄 모르고 옷을 벗는 사람을 욕실 유리창 너머로 보고 있는 듯한 심정이다.
291
토니는 길길이 날뛰는 게 어떤 건지 잘 모른다. 너무 위험하지 않을까? 속은 후련할 수도 있겠지만.
299
"여자로서 감당해야 할 별것 아닌 형벌인걸, 뭐."
토니는 그 말이 마음에 들었다. 형벌이기는 하지만 별것 아닌 형벌.
318
토니의 과거가 하찮아진다. 지니아와 비교하면 사소하고 평범하고 지엽적인 사건밖에 안 된다. 점잖고 국지적인 일화이자 각주밖에 안 된다.
334
그녀는 애초에 존재하지도 않았던 사람을 잃었다고 생각한다. 지니아에게 들은 과거 이야기까지 의심하는 건 아니다. 오히려 그 이야기를 바탕으로 지니아를 이해하려 한다. 그렇게 비참한 어린 시절을 보낸 사람에게 무엇을 기대할 수 있을까. 그녀가 의심하는 건 지니아의 의도다.
340
가까이서 본 웨스트의 엄청난 체구도 실망스럽다. 턱에 삐죽삐죽 난 수염까지 보일 지경이니! 보통은 까마득히 높이 있어서 보이지 않았는데 위에서 떨어지는 커다란 바위에 개미들이 들러붙은 모양을 보는 듯한 심정이다.
341
책에서 읽은 것처럼 정말 아프지만 지니아가 하도 신음 소리를 내서 맹수에게 갈가리 찢기는 듯한 기분일 줄 알았더니 그게 아니라 강물 속으로 풍덩 잠기는 듯한 느낌이다. 흔히들 말하는 것처럼 웨스트야말로 한 모금의 물과 같기 때문이다. 토니는 그 오랜 세월 동안 사막을 헤매다 드디어 그녀를 필요로 하는 사람을 만났고 전부터 궁금해하던 것을 드디어 알게 되었으니 그만큼 목이 마르고 갈증이 심할 수밖에 없다.
341
옆에 없는 사람보다 더 막강한 라이벌은 없다.
357
사실 그녀는 수영을 하지 못한다. 온몸이 축축하게 젖는 느낌을 좋아해 본 역사가 없다. 기껏해야 욕조에 몸을 담그는 수준이고. 대체로 샤워를 더 좋아하는 편이다.
358
어항 유리에 코를 부딪치는 금붕어처럼 그 자리에 붙잡혀 있다. 하원영. 이런 소리가 들린다. 거꾸로 말하는 꿈의 언어다.
363
가끔 한밤중에 살금살금 돌아다니면 기분이 상쾌해진다. 그녀는 남들이 잘 때 깨어 있는 것을 좋아한다. 컴컴한 공간을 혼자 독차지하는 것을 좋아한다. 잘하면 남들이 보지 못하는 것을 보고, 밤에 벌어지는 사건들을 목격하고, 귀한 깨달음을 얻을 수 있을지 모르기 때문이다.
373
"저 택시를 따라가 주세요"
캐리스가 말한다.
"어느 택시요?"
기사가 묻는다.
추격전은 이렇게 끝이 난다.
390
그녀는 섹스를 할 때마다 누군가 위에서 펄쩍펄쩍 뛰고 있는 트램펄린이 된 듯한 느낌이었다. 이런 기분이 점점 가셨더라면 그녀도 언젠가는 섹스를 좀 더 즐기게 되었을지 모른다.
454
하늘은 화창하다. 주먹으로 눈을 꾹 누르면 나타나는 그 강렬한 파란색이다.
474
"여기 학교에 다닐 거 뭐 있니? 들어가자마자 나올 텐데."
상관없었다. 캐런은 어차피 학교를 좋아하지도 않았다. 한 공간에 사람이 너무 많아 지중이 안 됐다. 가까이서 천둥이 치는데 라디오를 듣는 것처럼 거의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