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이현 산문
결혼 전이었을까. 아마도 그럴 것이다. 그녀의 책을 구매했었다.
<달콤한 나의 도시>
책장에 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는데.
아이들 책이 늘면서 아껴 보관하던 책을 버리던 때가 있었다.
물론 속상했지만 울지는 않았다. (하지만, 동화책을 새로 구매하기 위해 오래되고 글밥이 맞지 않는 책을 버릴 때는 울었다. 동화책을 읽어주면서 내가 울고 내가 성장했던 경험 때문에. 지금도 버려진 동화책을 생각하면 마음이 아프다)
얼마 전 책방에 갔을 때다. 새로 나온 책 주변을 어슬렁거렸다. 걷는 나를 보고있나 싶은 제목<오늘도 우리는 사선으로 걷는다> 한수희 에세이 책을 집어 들고는 어, 사고 싶은데. 하다 다른 책도 볼까 싶어 고개를 들었다. <어린 개가 왔다> 표지가 보였다.
간결한 표지에 묘한 반어적 표현의 제목까지.
어린데, 강아지가 아니라 개라. 실은 죽음을 목전에 둔 만수무강한 개마저 강아지라고 부르는 사람들의 단어 선택에 나름대로 예민한 짜증을 내던 나였다. 어린 개라. 어떤 개에게든 한때이며 시절을 건너갈 그 찰나, 그 기간을 강아지로 사는데.
그 찰나를 평생의 시간으로 붙여놓고 사는 사람에게 묘한 감정을 느꼈다. 나도 좀 사랑해 주지. 이런 감정이지 않을까. 나도 관심 좀 주지, 와 비슷할. 그런데, '어리지만 개'라는 제목에 끌린 모양이다. 자기 강아지에게 서투름과 연약함과 찰나로 지나가 버릴 시간을 허락하지 않겠다는 의지처럼 느껴졌다. 나에게는 개로 남아 줘. 내가 너의 보호자가 되기에는 모자란 인간인지 모르니. 그런 마음으로 읽혔다.
문법도 무시할 만큼 평생을 강아지로 부르며 과잉보호하거나 귀엽지 않으면 쓸모없다고 생각하는 위험함도 감지되는 불안이었다. 매사에 예민하고 불평을 좋아하니 무언가 마음에 들지 않았겠지. 아무리 봐도 갠데 강아지라니. 누구에게도 말하지 못하는 생각이었다.
아버지를 아버지라 부르지 못하고 개를 개라고 부르지 못하는 세상- 내가 느끼는 반려견을 둘러싼 환경, 쯤?
누가 뭐라고 부르든 무슨 상관일까. 그저 배배 꼬인 심성일 뿐이지. 중요한 건 묘하게 쾌감을 선사하는 제목에 책을 집어 들고는 작가 이름을 확인한다. 뒤도 돌아보지 않고 버렸던 소설가에게 미안한 마음이 겹쳐 끼쳤다. 약간의 빚이랄까. 후회하지도 않고 버려놓고 생각 속에서도 지워버렸던 내 소유물의 생산자가 새 책을 냈구나.
약간의 채무감과 또 그녀라면 최소한 실망하게 하지 않으리라는 믿음으로 채 한 장도 읽지 않고 샀었다. 역시 오랫동안 글을 쓴 사람의 내공은 이렇게 흘려버릴(은 아닌데..) 수도 있는 일들을 글로 녹이고 생각을 빚는구나. 천생 작가다. 작가.
그렇게 사 온 날 홀랑 읽었었다. 뜯은 과자 한 봉지를 싹 비우고 나면 느끼하게 끼쳐오는 감정, 입은 즐겁고 배는 더부룩해지는 느낌처럼 사자마자 읽어버렸을 때 피부로 느껴지는 약간의 돈 아까움과 잘 읽어서 배부른 느낌이 들었다.
오랜만에 가볍게 읽어지면서 감각도 예민하게 깨워준 산문, 정이현 작가의 <어린 개가 왔다>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