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솔직히 노약자석도 아닌데, 굳이 양보해야 되나

나만 이런 생각해요?

by 명건


명절 즈음에 회사에서 스팸 세트와 김 세트를 선물로 받았다. 자취생인 나에게 실용적인 선물이라 좋았지만, 퇴근 후 그걸 들고 가야 할 걸 생각하니 마음 한 켠이 무거웠다. 차가 없는 나로서는 이 큰 박스 두 개를 들고 만원 버스를 탈 생각에 벌써부터 머리가 지끈거렸다. 게다가 가방에는 퇴근 후에 카페에 가서 글을 쓰겠다는 다짐으로 챙긴 맥북과 책 한 권도 들어 있었다. 양 손에 박스 하나씩 들고, 등에 맥북 하나를 메고 퇴근할 생각에 마냥 선물이 반갑지는 않았다.


멀리서 버스가 천천히 정류장으로 들어오는데, 창 밖으로 세어 나는 형광등의 불빛이 희미해서 어쩐지 불길한 직감이 들었다. 아니나 다를까, 버스 안에는 내 몸 하나 비집고 들어갈 공간도 부족했다. 사실 새삼스러운 일은 아니지만, ‘혹시나'하는 기대가 ‘역시나' 무너질때 느껴지는 실망감은 어쩔 수 없다. 사람들 틈을 비집고 천천히 안으로 들어서는데 갑자기 운전석 바로 뒷자리에서 졸던 여성이 화들짝 놀라 쏜살같이 밖으로 나가 버렸다. 아마도 목적지에 도착했지만 잠에 들어 내릴 타이밍을 놓친 듯했다.


퇴근길마다 반복되는 고행에 속으로 온갖 욕을 하며 대출이라도 받아 차를 한 대 사야할지 고민하던 나는 갑자기 찾아온 행운에 깊은 환희를 느끼며 자리에 앉았다. 신에게 잠깐 감사의 말씀을 전하고 박스 두 개 그리고 백팩 하나를 무릎에 얹고, 무선 이어폰을 양쪽 귀에 꼽던 찰나에 버스가 다음 정류장에 도착했다.


입구와 출구 문이 활짝 열리고, 승객들이 조금 내리고 그보다 훨씬 많은 인원이 탑승했다. 승객들이 하나, 둘 느릿느릿 붐빈 사람들 틈 사이를 비집고 버스 안으로 들어와 자리를 선점하는 중에, 하필 내 옆에 할머니 한 분이 봉을 잡고 섰다.


고령이라고 부르기는 애매하지만 이제 막 노인 나이(만 65세)가 지난 것으로 추정되는 여성은 허리를 몇 번 두드리기는 했지만 거동 자체에 어려움은 없어 보였다. 변명을 하자면 평소라면 보자마자 일어나 자리를 양보했을 것이다. 만원 버스에 서서 다른 사람의 체취를 맡는 일과 몸을 부대끼는 일은 불쾌하지만, 그보다 불편한 마음으로 앉아 있는 일이 더 찜찜하다. 그러나 지금 내 무릎에는 짐이 세 개나 있다. 발 디딜 곳도 없는데, 짐을 내려놓을 마땅한 자리가 있을리 없다. 꼼짝 없이 양 손에 들고, 등에 지고 가야 한다. 승객이 움직일 때마다 짐이 치일 테고, 그럼 서로가 불쾌할 건 자명했다.


또한 그분이 거동이 가능해 보였고, 내가 앉은 자리가 노약자석이 아니라는 점에서 스스로에게 핑계를 댈 수 있었다. 뒤를 돌아보니 젊은 승객들이 노약자석에 앉아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그렇다면 나보다 그들이 먼저 자리를 양보해야 하는 게 아닌가 하는 합리화도 가능했다.




누군가의 간절함과 내 일상이 교차되는 순간이 있다. 내게 상응하는 능력이 있지만, 얼마간의 불편을 감수해야 할 때 우리는 도덕적 딜레마를 경험한다. 버스에서 서 있는 노약자를 발견할 때, 구걸하는 노숙인을 발견할 때, 비가 오는 날 우산이 없어 지하철 출구에서 서성이는 아이를 발견할 때처럼 내 작은 불편함이 타인에게 도움을 줄 수 있는 순간은 생각보다 많다.


이런 상황에서는 내가 감수하는 불편보다 이웃이 얻게될 편익이 훨씬 크다. 젊은 사람이 버스에서 서 갈 때 느끼는 불편감과 같은 상황에서 노인이 느끼는 불편함을 비교하면 후자가 훨씬 불편할 것이다. 구걸하는 사람에게 천 원을 기부하면, 기부자는 출근 길에 커피 한 잔을 참으면 그만이지만, 노숙자은 그 돈으로 점심을 해결할 수 있다.


편익의 총량만 생각했을 때는 응당 여유가 있는 사람이 호의를 베푸는 것이 옳다. 하지만 사람은 다른 이의 불편함을 온전히 느낄 수 없다. 노인이 버스에서 서서 가거나, 노숙인이 천 원이 없어 점심을 굶는 상황은 그들의 사정이지, 내 문제는 아니다. 그것들은 내게 악영향을 주지 않는다.


그래서 인류는 ‘권선징악', ‘카르마' 같은 개념을 만들어 보통 사람들이 착한 선택을 하도록 독려한다. 자발적 선행에 따른 행운이 언젠가는 본인에게 돌아갈 것이라는 통념을 만들어 악한 행동을 경계하고 착한 행동을 유도했다. 어려서는 나도 그랬던 것 같다. 내가 도움을 줄 수 있는 상황을 발견하면 기쁜 마음으로 선행을 베풀었다. 그런 기회 자체가 반가웠다. 지금의 선행이 마일리지처럼 차곡차곡 모여 언젠가 내게 더 큰 보상으로 돌아올 것이라는 것을 믿어 의심치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정 반대의 상황을 하나 둘 목격하며 회의감이 생겼다. 관료, CEO 연예인 등 이미 충분한 부와 명예를 축적한 사람이 사회적 물의를 일으키고 얼마 후 뻔뻔하게 복귀해 활동을 이어나가는 경우를 많이 목격했다. 오히려 착하고 여린 사람들이 마음의 상처를 이기지 못하고 스스로 생을 마감하는 소식 혹은 사고를 당해 이른 나이에 세상을 떠났다는 소식을 종종 접하면서 이제는 생각이 바뀌었다. 복의 필수 조건은 착함이 아니다. 그건 그저 타고난 재능의 일부일 뿐이다. 선행은 마일리지가 아니다. 많이 한다고 누가 알아주지도, 축적돼서 더 큰 행운으로 돌아오지도 않는다. 믿음이 변해서 더 이상 도움의 순간이 달갑지 않았다. 그저 내가 감수해야 하는 불편함이 번거로울 뿐이다.


그러나 내게 별다른 이득이 없을 걸 알면서도 나는 그런 상황에서 매번 얼마간의 불편함을 감수한다. 결국 나는 몇 번 눈치를 보다가 자리에서 일어나 노인에게 자리를 양보했다. 연거푸 거절하는 노인에게 이제 곧 내린다고 거짓말을 하고 짐을 한아름 안고 서 불편하게 집으로 향했다. 손잡이를 잡지 못해 버스가 턴을 하거나 급정지를 할때마다 옆에 승객과 부딪쳐 공연히 사과를 해야 했다. 집으로 가는 길은 몹시 불편했다. 솔직히 괜히 양보한 걸 후회하기도 했다. 그러나 그런 불편함은 버스에서 내리자 이내 사라졌다. 오히려 그런 불편함을 감수하고 자리를 양보한 내가 자랑스러웠다. 마음 한 켠이 따뜻해졌다.


인정한다. 나는 도덕적 우월감 혹은 불편한 마음으로부터 회피를 위해 노인에게 자리를 양보했다. 그건 노인을 진정으로 생각하는 순수한 마음에서 우러나온 배려가 아니다. 그저 나 자신을 위한 행동일 뿐이다. 아마 도덕적 의무론을 주장한 칸트의 추종자가 봤으면 극대노할 상황이다. 순수한 마음의 선행이 아니니까. 그러나 이런 나의 이기적인 마음으로 인해 모두가 이익을 얻었다. 나는 도덕적 우월감을 느꼈고, 노인은 편하게 목적지에 갈 수 있었다. 결과적으로 해피 엔딩(happy ending) 이다. 버스 안에서 내가 감수해야 했던 불편함은 그 둘에 비하면 미미한 수준이다.


우리는 경쟁 과열 사회에 살고 있다. 입시든, 취업이든, 승진이든, 사업이든, 게임이든 승리하기 위해 상대를 짓밟는 일에 익숙해진 요즘이다. 제로섬 게임이 당연시되는 현대 사회에서 선행은 정 반대인 ‘윈-윈 게임이다'. 선행을 받는 자는 직접적인 이익이 생기고, 선행을 하는 자는 도덕적 충만함과 내적 만족감을 얻을 수 있다. 선행하는 자가 감수하는 약간의 불편함은 두 편익에 비하면 상대적으로 사소하다.


마음 한 켠에서 따뜻하게 퍼지는 훈기는 그날 집에 도착해서 잠을 자기 전까지 유지됐다. ‘카르마’가 실제로 존재하는지 그저 인류가 만들어낸 자기 위안인지 우리는 끝내 알 수 없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좋은 쪽으로 생각하기로 했다. 한번 더 선조들의 지혜를 믿어 보기로 했다. 먼 훗날 부모님이 버스에 탔을 때 오늘 나의 선행이 행운이 돼 돌아와 어느 청년이 기꺼이 자리를 양보해 주기를 기대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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