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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가애도기간 끝에서 떠올린 죽음에 대한 단상

죽음에 관하여

by 명건
죽음과 함께하는 삶


1월 4일자로 제주항공 여객기 사고에 대한 국가애도기간이 끝이 났다. 사망자 중에 아는 사람은 없었지만, 며칠 동안 마치 소중한 사람을 사고로 잃은 듯 마음 한 켠이 아팠다. 평범한 일상 생활을 하면서도 문득 멈칫하거나 창 밖을 바라보며 시간을 보내곤 했다. 오늘 아침에도 희생자들의 명복을 빌며 기도했다. 부디 이승에서의 한은 털어버리고 각자가 믿는 신의 축복 아래 영원한 평화를 누리기를 간절하게 바랐다.


지난 몇 년 동안 우리 사회에서 발생한 여러 참혹한 사고로 많은 소중한 인재들이 우리의 곁을 떠났다. 2014년에는 배가 침몰해 134명의 탑승객이 목숨을 잃었다. 2022년에는 핼러윈 축제 분위기를 즐기러 많은 인파가 이태원에 몰려 159명이 세상을 떠났고, 2024년에는 태국에서 출발한 제주항공 여객기가 무안국제공항으로 착륙 도중 조류 충돌로 인한 엔진 고장과 랜딩기어 미작동으로 동체 착륙을 시도하다가 활주로를 이탈하여 외벽과 충돌, 폭발하여 탑승자 179명이 사망하는 참사가 발생했다. 이 밖에도 아리셀 화재 공장 사고 등 업무 관련 재난까지 포함하면 열거하기 조차 힘들 정도다.


이런 순간을 마주하면 멀게만 느껴졌던 죽임이 가깝게 느껴져 죽음에 대해 다시 한번 생각하게 된다. 평소에는 죽음이 막연히 먼 미래의 일처럼 느껴진다. 먼 미래에 언젠가 내게도 닥칠 일임을 물론 모르지는 않지만, 상기하면 무섭고 두려워서 무의식 저 끝에 가두고 애써 외면하며 산다. 마치 죽음이 나와는 무관한 일이고, 영원히 살 것처럼 착각하며 살아가는 것이다.


그러나 이런 사고를 접하면 나의 오만을 철저하게 깨닫는다. 한 치 앞도 모르며 살아가는 우리가 하물며 끝이 언제인지 어떻게 알겠는가. 반드시 죽음이 먼 미래일 것이라는 믿음은 우리의 착각에 불과하다. 우리는 항상 동전의 양면처럼 죽음과 공존하며 살고 있다. 차를 타고 어딘가로 향할 때, 길을 건널 때, 심지어 집에서 타자를 치고 있는 지금 이 순간에도 불의에 사고가 닥쳐 동전이 뒤집히듯 무의 세계 혹은 또 다른 세계로 향할 수도 있다.


이번 참사를 언급하는 것조차 조심스럽다. 어쩌면 사고를 이용한다는 비난을 받을 수도 있다. 그러나 언젠가 현대사의 아픔으로 기록될 이 참사의 갈무리 짓는 마음으로 제주항공 사고로 떠올린 죽음에 대한 단상을 몇 자 적어보고자 한다.


삶의 끝에서 깨닫는 의미

우리가 죽음을 두려워하는 이유는 이후에 어떤 일이 벌어질지 모르기 때문이다. 죽음이 존재의 끝인지, 아니면 새로운 세계로의 통로일지 아무도 알 수 없다. 과학자들은 죽음을 그저 영혼의 소멸이라고 주장하고, 종교인들은 존재 양식의 변화라고 반론하지만 그저 가설일 뿐이다. 아마도 인류가 멸망하기 전까지도 이 질문의 답은 밝혀내지 못할 것이다. 그건 인간의 지성으로 풀 수 있는 영역이 아니다. 결국에는 모두가 알게 되겠지만, 죽은 자는 말이 없다.


어쩌면 죽음 이후에 더 찬란한 세계가 있을 지도 모른다. 그러나 확신할 수 없다. 그렇기에 여전히 삶은 소중하다. 그래서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그저 지금에 감사하는 일 뿐이다. 공기처럼 보이지는 않지만 만연한 죽음의 위협 속에서 여전히 존재하고 있다는 사실은 감사한 일이다. 평소에 더 커다란 욕망, 이를테면 부나 명예에 눈이 멀어 존재 자체의 소중함은 잊고 산다. 그러나 이 글을 쓰는 나, 그리고 읽는 당신 모두 어느 면에서 생존자들이다. 보고 듣고 느끼는 모든 것들이 감사하고 소중하다.


그러나 생존의 끝에는 결국 죽음이 있다. 지구촌을 호령하던 역사적 인물들도 영원히 살 것 처럼 굴었지만 예정된 운명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지금 지구촌을 호령하고 있는 지도자, CEO, 연예인들도 결코 이 운명에서 벗어나지는 못한다. 부자에서 거지까지, 성인부터 살인자까지 죽음은 누구도 비껴가지 않는다. 그건 우리가 사랑하는 이들에게도 마찬가지다. 엄마, 아빠, 애인, 아내, 남편, 이웃 모두 언젠가는 죽는다. 내가 그들의 마지막을 지켜줄 수 있을지조차 알 수 없다.


결국 우리는 모두 시한부 인생을 살고 있다. 죽음이라는 필연적인 결말은 아무리 많이 가져도 결국 모든 것을 내려놓아야 한다는 결말로 이어진다. 이는 삶의 허무감을 불러 일으키기도 하지만, 동시에 위안이 되기도 한다. 죽으면 모든게 끝이다. 상실감도, 고통도 영원하지 않다. 어린시절, 특히 사춘기에는 죽음에 대한 막연한 두려움으로 잠 못 이루는 날이 많았다. 그런데 요즘은 결국 끝이 있다는 사실이 오히려 위안으로 다가오기도 한다. 끝이 있기에 모든 시도가 의미 있다. 꿈이든, 사랑이든. 뻔한 말이지만 주저하고 머뭇거리기에 인생은 너무 짧다. 시한부 선고를 받았다고 생각해 보자. 무엇을 가장 후회하겠는가? 그 대답이 당신이 느끼는 불행의 씨앗이다.


가끔 죽음에 대한 두려움이 엄습할 때면 정 반대의 상황을 떠올려 본다. 모두가 태어날 때부터 자신의 운명을 알고 태어난다면? 내가 죽는 날이 언제인지 정확히 알고 있다면? 모두 지독한 허무주의자가 됐을 것이다. 차라리 모르는 편이 낫지 않겠는가. 무지는 신의 축복이다. 알던 모르던 존재의 끝은 모두 정해져 있다. 그러니 쫄지 말자. 살아봐야 겨우 백 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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