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을 닮은 뒷모습

첫사랑의 잔재

by 명건

가끔 마주치는 상상을 하고는 했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불쑥 예고도 없이 그 순간이 찾아올 줄은 몰랐습니다. 불행처럼 행운도 별다른 전조 없이 찾아오나 봅니다. 그 만남을 행운이라고 해야 할지, 불행이라고 해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분명 반가웠지만, 평온했던 마음에 큰 파동을 남겼으니까요.


연차를 내고 오랜만에 친구를 만나러 서울로 놀러 왔습니다. 친구의 퇴근을 기다리며 홀로 추억의 동네들을 누볐습니다. 졸업한 대학교, 살던 동네, 자주 데이트를 했던 장소. 충무로, 명동, 홍대, 신촌. 동네는 그대로 였습니다. 식당이나 카페가 조금 변하기는 했지만 싱그러운 젊음의 생기는 여전했습니다. 변한 건 저밖에 없었습니다. 그토록 익숙했던 동네들이 어색하게 느껴져 마음이 조금 울적했습니다.


그렇게 혼자만의 추억 여행 끝에서 당신의 뒷모습을 보게 된 것입니다. 사람들로 붐비는 어느 승강장에서. 대각선 방향의 긴 줄 중간쯤에서 핸드폰을 하고 있던 당신. 내 가슴까지 가는 키, 긴 생머리, 실루엣처럼 살짝 보이는 웨이브진 앞머리, 마른 체형, 직각 어깨. 세상에 이런 스타일의 여자는 많고 많습니다. 그런데 쿵쿵거리는 심장과 예민해지는 감각이 그 사람이 당신일 거라고 말해줍니다.


잠시 후 지하철이 도착한다는 안내 음성이 흘렀고, 당신이 전광판을 보려고 이 쪽을 바라봤습니다. 반사적으로 몸을 돌려 버렸습니다. 지하철이 도착했는지 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립니다. 몸이 움직이지 않습니다. 발이, 마음이 그 자리에서 멈췄습니다. 사람들이 하나 둘 올라타는 소리가 들렸지만 차마 그 편으로 시선을 둘 수가 없습니다. 스크린 도어가 닫히고 열차는 떠나버렸습니다. 뒤늦게 그 편을 바라봤지만 당신의 모습은 보이지 않습니다. 그건 당신이었을까요? 아마 그랬을 겁니다. 아니요. 당신이 아니었어야 합니다. 아니요. 그래도 그건 당신이었으면 합니다.


제가 왜 반대 방향으로 가는 이 열차를 타고 있는지 모르겠습니다. 핸드폰이 울립니다. 친구가 저를 찾는 전화일 겁니다. 받고 싶지 않습니다. 지금은 어떤 말도 하고 싶지 않습니다. 터널을 지나며 전력 유지를 위해 객실의 불이 꺼졌습니다. 그 순간이 좋았습니다. 당황한 내 표정을 아무도 보지 못할 테니까요.


열차가 긴 터널을 빠져나와 동호대교를 건너며 강렬한 태양에 눈을 찌푸렸습니다. 그리고 눈 앞에 한강이 펼쳐졌습니다. 햇살은 물결 위에서 반짝이고, 강물은 파랗고, 하늘은 시퍼렇고, 구름은 하얘서 마치 한 폭의 예술 작품 같습니다. 대학 시절에 셀 수 없이 많이 봤음에도, 저 잔잔한 강이 선사하는 경이로운 풍경은 볼 때마다 새로운 경외감을 느끼게 합니다.


우리는, 아니 당신과 나는 함께 이 풍경을 수 십, 수 백 번 쯤 봤습니다. 스물, 타지에서 올라와 도통 정 붙이지 못하고 겉도는 이 커다란 도시에서 당신의 손을 잡고 바라본 풍경에서 참 많은 위안을 얻었습니다.


잘 지내시나요.


잘 지내셨으면 좋겠습니다. 몸은 괜찮은지. 직장은 다니는지. 결혼은 했는지. 강아지는 잘 있는지. 여전히 그 모든 것들이 여전한지. 묻고 싶은 말은 많지만 삼키겠습니다. 그저 속으로 조용히 당신의 행복을 빌겠습니다. 저는 가끔, 아주 가끔 신께 당신의 행복을 기원하고는 합니다. 감기 한 번 걸리지 않기를, 어디서든 누구에게든 넘치는 사랑 받기를, 절대로 외롭지 않기를. 혹시 필요하다면 박복한 내 행복의 일부라도 떼다 주기를.


영화 “이터널 선샤인"처럼 당신과의 기억을 지울 수 있다면 당장 지워 버리고 싶다는 나쁜 생각도 했습니다만, 그게 얼마나 어리석은 생각이었는지 이제 깨닫습니다. 인터넷에서 떠도는 흔한 구절처럼 당신과의 추억마저 없었다면 내 삶은 그저 느리게 자살하는 삶이었을 겁니다.


이제 그대의 얼굴을 떠올려 보려고 해도 잘 떠오르지 않습니다. 목소리는 그보다 더 생경합니다. 그런데 가끔은 그대가 꿈에 생생하게 나타날 때도 있습니다. 꿈 속에서 그대를 보면 지금 내가 꿈을 꾸고 있구나 깨닫습니다. 알면서도 또 아이처럼 당신에게 미주알고주알 무어라 떠들어 댑니다. 왜 당신 옆에만 가면 항상 아이처럼 굴까요? 깨고 나면 피식 웃음이 새어 나옵니다. 당신이 나오는 꿈은 제가 꿀 수 있는 가장 단 꿈입니다.


내 마음의 창고에는 여전히 당신과의 추억이 남아 있습니다. 몹시 힘든 날이면 조용히 그 창고를 열어 그대와의 추억을 떠올리곤 합니다. 제 인생의 어느 순간을 함께 해 주셔서, 여생을 견딜 찬란한 추억을 많이 만들어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끝내 잘 가라고 손 흔들어주지 못해 미안합니다. 많이 사랑했습니다. 다음에도 이렇게 멀리 스쳐 가겠습니다.그저 사는 동안 평안하십시오.


출처 : pinteres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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