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빠를 이해하면 어른이 된다는 말

혼술중독

by 명건

일을 하다가 실수를 저질렀다. 때문에 고객이 피해를 입었고, 그녀는 강한 컴플레인을 제기했다. 고개 숙여 사과하고 피해를 최소화하기 위해 최선을 다하겠다고 읍소했지만 소용없었다. 그녀는 동료와 다른 고객들이 보는 앞에서 고성을 지르며 욕설을 퍼부었고, 나는 얼굴이 벌게져 아무 말도 못하고 연신 고개만 숙였다.


그때 팀장님이 다가와 상황을 수습했다. 그녀는 자신의 직책을 밝히고, 직원 관리에 소홀한 자신의 잘못도 일부 있음을 시인한 후 함께 고개를 숙였다. 관리자의 사과를 들은 고객은 금세 누그러져 “부하 직원 관리를 똑바로 하라.”는 마지막 말을 남기고 사라졌다.


고객이 나가자 아무일도 없었던 것처럼 시간이 흘렀다. 고객들은 오고 가고, 직원들은 민원 응대를 하고, 나도 자리에 앉아 아무렇지 않은 척 밀린 업무를 처리했다. 그러나 심장이 쿵쿵대고 목소리도 미세하게 떨렸다.


“아까 저 때문에 죄송했습니다.”


조금 한가해지고 마음도 진정된 후 팀장님께 사과했다. 응당 들어 마땅한 질책도 각오하고 있었다. 그런데 그녀는 대수롭지 않게 “아, 그거? 괜찮아. 너무 신경 쓰지마.” 이 한 마디를 하고 다시 일에 열중했다. 생각했던 반응과 달라 잠시 당황했지만 자리로 돌아가 업무를 처리했다. 동료들이 메신저로 위로의 말을 건넸다. 저 사람 왜 저래. 고생했어요. 너무 마음에 담아두지 말아요. 상투적인 말이었지만 퍽 위로가 되었다.


창 밖이 어둑해졌다. 마음은 여전히 가라앉아 있었다. 퇴근 시간이 다가올수록 마음 속에 커다란 돌덩이가 팽창하는 기분이었다. 오늘은 혼자 있고 싶지 않았다. 누구라도 붙잡고 아무 얘기나 하고 싶었다. 그런데 생각나는 사람이 없었다. 원체 먼저 만나자고 제안하는 사람이 아니고, 누군가 만남을 제안해도 온갖 변명으로 만남을 미뤄왔던 나다. 그랬기에 선뜻 저녁에 시간 되냐고 물어보기에는 염치가 없었다. 그렇게 갈피를 잡지 못한 채 퇴근 시간이 다가왔고, 나는 집으로 향했다.


그동안 사람 좀 만날걸. 인간관계도 마일리지와 비슷하다. 평소에 성실히 축적해 두지 않으면 이렇게 필요한 순간에 부를 사람이 없다. 밀린 빨래와 청소를 하며 다른 일에 집중해 보려 해도 낮의 일이 머릿속에 맴돌았다. 고성을 지르는 민원인의 일그러진 얼굴과 내게 실망한 기색을 애써 숨기는 팀장님의 표정이 잔상처럼 스쳐 지나갔다. 누군가에게는 이 기분을 말하고 싶은 몹시 강렬한 욕망이 느껴졌다. 염치없게도 가장 먼저 떠오른 건 엄마였다.


엄마. 어. 너 무슨 일 있구나? 없어. 없기는. 뭔 일 있구만. 어디 아파? 무슨 일 있어? 아무 일 없다니까. 아니야 말 해봐 응? 없다는 데 왜 혼자 그래. 전화 온다. 나 진짜 별 일 없으니까 걱정 말고 쉬어.


다른 전화가 온 척 전화를 끊었다. 엄마의 사랑은 언제나 분에 넘쳤고, 그걸 다 받기엔 내 그릇이 작았다. 아주 잠깐의 목소리만 들어도 내 상태를 파악할 수 있는 분이라는걸 잊고 있었다.


내가 조금 흔들리면 엄마는 더 크게 흔들렸다. 내 마음에 작은 생채기가 나면 엄마의 마음에는 커다란 흉터가 생겼다. 그래서 엄마 앞에서는 아무렇지 않은 척 해야지 다짐하며 살아왔다. 그런데 또 이렇게 티를 냈다. 어쩌면 엄마는 오늘 밤도 나에 대한 걱정으로 잠 못 이룰 지도 모른다. 병신. 나는 또 이렇게 엄마 가슴에 작은 못 하나를 박았다. 죄책감의 늪에 빠지기 전에 친구에게 전화를 걸었지만 받지 않았다.


곧이어 친구가 유원지에서 여자친구와 찍은 셀카 사진을 보냈다. “무슨 일 있음?”이라는 카톡이 왔다. 사진 속 친구와 애인은 참 다정해 보였다. 신경질적으로 핸드폰을 끄고 소파 구석으로 던져 버렸다. 그렇게 가만히 앉아 있으니 공기가 점점 무겁게 내려 앉았다. 입안이 바싹 마르는 듯 싶었다. 그래서 편의점에서 소주를 샀다.


술에 취해 까무룩 잠이 쏟아지는데 어떤 장면이 떠오른다. 매리야스를 입은 추레한 중년 남자가 밤 늦게 식탁에 홀로 앉아 유튜브 영상을 보면서 술잔을 연거푸 들이켠다. 메리야스 곳곳에 구멍이 송송 뚫려 있다. 그 뒷모습이 미래의 나인지 아빠의 어느 날인지 분간이 안 된다. 누군가 그랬다. 남자가 아버지를 이해하는 순간 어른이 되는 거라고. 아버지, 드디어 저도 어른이 됐나 봅니다.


커버 : pexel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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