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득 할머니가 보고 싶은 날

신원사에서

by 명건

적어도 달에 한 번은 절에 간다. 관음전에서 부처님께 절하며 평안을 기원하고, 산신각에서 산왕대신에게 은밀히 소원을 빈다. 마지막으로 지장전에 모신 할머니·할아버지 위패 앞에서 문안 인사를 올린다. 두 번 절을 하고 가부좌를 틀고 앉아 잠시 명상한다. 눈을 감으면 시간 감각이 둔해진다. 눈을 뜨면 할머니 집 거실이 펼쳐질 것 같다. 뒤를 돌아보면 할머니가 부채질하며 해맑게 웃고 계실 것만 같다.


할머니 집에는 에어컨이 없었다. 선풍기도 딱 한 대 있었는데, 오래된 선풍기에서 삐걱거리는 소리가 났다. 더위에 지쳐 대자로 거실에 널브러져 있던 나는 갑자기 일어나 아빠에게 전화를 걸며 짜증을 냈다. 덥다고. 에어컨도 없는 곳에 왜 나를 두고 갔냐고. 할머니가 보고 싶다고 칭얼거린 건 나였지만, 불볕더위는 예상치 못한 불청객이었다.


그러자 할머니가 얼음을 띄운 콩국수 국물을 사발에 부어 내밀었다. 한 모금 마시고 처음 맛보는 쎄한 맛에 당황해 퉤 뱉어 버렸다. 맛이 없다고 화를 내자, 할머니는 “아이고, 내 새끼 더워서 우짜냐. 그래도 시원하니 조금 참고 마셔보지” 하며 걸레로 바닥을 훔치고, 선풍기를 내 앞으로 가져와 머리맡에 부채질을 해 주셨다. 나는 선풍기 앞에서 입을 벌려 아아 소리를 내며 장난을 쳤다. 소리가 울리는 게 재미있었다. 흘깃 바라본 할머니의 삼베 저고리는 땀으로 흠뻑 젖어 있었지만, 철 없던 나는 금세 외면해 버렸다.


소파에 앉아 그 장면을 지켜보던 할아버지가 벌떡 일어나 빽 소리를 지르셨다. “아주 상전 납셨다. 니 할머니 더운 거는 안 보이냐!” 쿵쾅쿵쾅 발소리를 내며 회초리를 가지러 창고로 들어가셨다. 할머니는 당황해서 “아이고, 이 양반이 또 왜 이러냐”며 말리셨다. 나는 부리나케 2층으로 도망쳤다. 소싯적에 하숙집을 운영한 그들이었다. 그 방이 모두 공실로 남아 숨을 곳은 많았다.


할아버지는 화가 나면 오래된 매를 찾아 창고로 들어가셨지만, 실제로 쓰인 적은 한번도 없다. 어린 나는 도망가 숨었다가 잠잠해지면 문 밖으로 나갔다. 한 번은 도망갈 타이밍을 놓쳐 멀뚱히 앉아 있었다. 그렇게 마주하니 위풍당당하게 창고에서 회초리를 꺼내 온 할아버지가 오히려 당황했다. 헛기침을 하더니 머리를 긁적이며 돌아갔다. 사실 알고 있었다. 심성이 착한 할아버지가 내게 폭력을 휘두를 일은 없을 거라는 사실을.


구석 자리 하숙방에 숨어 잠잠해지길 기다리던 나는 얼마 있다가 문 밖으로 나갔다. 아빠는 왜 안 오는지 신경질이 났다. 난간에 기대 아빠를 기다리며, 담장 너머 동네를 바라보았다. 허름한 상가들, 그 뒤에는 이름 없는 야산들이 있었다. 촌스러운 촌동네. 내가 사는 동네 건물들은 길쭉길쭉한데 여기는 앉은뱅이 건물뿐이다. 어쩐지 우쭐한 마음이 들었다. 그때 슈퍼마켓에서 검은 봉지를 든 할머니가 보였다. 내용물을 확인하지 않아도 그 속에 무엇이 들어 있는지 알 수 있었다. 할머니 편으로 달려가려다 멈칫했다.


할머니는 한 손으로 검은 봉지를 들고, 다른 손으로 지팡이를 짚고 짧은 보폭으로 아이처럼 아장아장 걸으셨다. 그런 할머니를 보니 어린 나이에도 마음이 시큰했다. 오랜 하숙살이로 등 한 번 시원하게 펴지 못한 채 산 세월이 사십 년이 넘었다. 휴일 없이 하숙생들의 밥을 짓고 빨래를 하며 매일을 견뎠다. 세월의 무게에 눌린 할머니의 등은 조금씩 굽어갔다. 멀리서 그 굽은 등을 바라보던 나는 방금 전에 짜증을 냈던 사실에 죄책감을 느꼈다. 뻔뻔하게도, 죄책감을 불러일으키는 할머니의 가난이 짜증났다. 다시는 할머니 집에 오지 않겠다는 어리석은 다짐도 했다.


“그래도 또 와야 한다잉.” 스크류바를 양손으로 돌리며 장난치는 내 머리를 쓰다듬으며 할머니가 말씀하셨다. 냉동실에서 얼음을 꺼내 비닐봉지에 담아 내 얼굴에 가져다 대셨다. “앗, 차가워!” 내가 해맑게 웃자, 할머니가 씨익 웃으셨다.


명절에 온 가족이 모이면 할머니는 신이 나서 덩실덩실 춤을 추셨다. 우리가 집을 떠날 때쯤이면 할머니의 눈시울이 붉어졌다. 어느 순간부터였을까. 그 일방적인 사랑이 부담스럽게 느껴지기 시작했을 때가. 그 마음이 갚아야 할 숙제처럼 느껴졌을 때가.


그랬으면서 돌아가신 후에야 뒤늦게 염치 없이 찾아뵌다. 생전에 찾아뵌 것보다 자주 찾아뵌다. 소원도 빈다. 할머니는 인지하신 분이니까, 내가 한 잘못들을 다 잊고 하늘에서 보이지 않는 힘으로 우리 가족을 도와 달라고 빈다. 힘든 날이면 절을 하며 눈시울이 붉어지기도 한다. 그러면 어렴풋이 할머니 내음이 느껴진다.


법당을 나서 주차장으로 향하는 오르막길 끝에 할머니가 서 있을 것만 같다. 불룩한 검정 비닐 봉지를 들고 양팔을 벌린 채 나를 맞이하실 것만 같다. 그러면 미주알고주알 할머니에게 재잘대고 싶다. 취업했다고. 이제 운전도 한다고. 이제 번듯한 직장이 있는 어른이니까, 거기서는 할머니 인생을 살라고. 그래도 가끔 신경 쓰이면, 자꾸 늙어가는 우리 엄마 아빠를 좀 지켜 달라고. 아빠가 할머니처럼 허리가 계속 휘어 가니까 그것 좀 펴주고, 우리 엄마 얼굴에 주름 좀 지워달라고. 얼마나 이기적인 손자인가. 끝까지 바라기만 하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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