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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Quat Sep 12. 2022

처음 들었던 아버지의 비밀


가족. 당신은 가족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가. 누군가는 자신의 목숨을 바쳐서라도 지키고 싶은 것인 반면, 또 다른 사람에겐 길거리에서 스쳐 지나가는 사람보다 못한 경우도 있다. 사랑하는 가족과 사랑해야만 하는 가족. 당신에게 가족이란 둘 중 어느 쪽에 가까운가. 오늘은 '서로 다른 가족의 의미'에 대해 말해보려 한다.






추석 연휴 당일. 나는 본가에 가지 않았다. 정확히 말하면 가고 싶지 않았다. 그동안 부모님과 함께 한 시간이 꽤나 긴 편이었고, 그 과정에서 남몰래 속앓이를 많이 했었기 때문이다. 어차피 이번 달 어머니의 생신을 일요일로 앞당겨 축하하기로 해서 굳이 하루 더 빨리 가지 않은 것도 있었다. 물론 이것도 변명이지만.



일요일 오전, 아침에 일어나 씻고 준비를 한 뒤에 집으로 향하는 버스를 탔다. 1시간을 달려 오랜만에 본가에 도착했다. 설렌다던가 뭉클한 기분은 들지 않았다. 엘리베이터에 타서 현관 비밀번호를 누르고 문을 열었다. 인기척이 없었다. 아무도 없다는 것을 알게 되자, 오히려 마음이 편해졌다.



예전 내가 쓰던 방에 가져온 짐을 내려놓고, 점심을 먹을 겸 다시 집 밖으로 나섰다. 식사를 하고 나서 근처 카페에 들러 커피를 산 뒤 다시 집으로 향했다. 현관 비밀번호를 누른 뒤 안으로 들어서자, 익숙한 아버지의 헛기침 소리가 들렸다. 나도 모르게 어깨에 힘이 들어가는 것이 느껴졌다.






아니나 다를까, 보이지 않는 아버지의 목소리가 날카롭게 귀를 파고들었다. 어제는 왜 안 왔냐. 거두절미하고 자신이 하고 싶은 말만 하는 어투는 여전하셨다. 나 또한 대수롭지 않게 대꾸했다. 그래서 오늘 왔지 않냐고. 대답을 하고 나서 머릿속으론 잠시 후 어떤 대화가 이어질지 자연스레 그려지고 있었다. 작은 한숨을 토해낸 뒤 사온 커피를 들고 목소리가 들리는 주방으로 천천히 걸어갔다.



아버지는 식탁 의자에 앉아계신 채, 말없이 식탁을 바라보고 계셨다. 나 또한 맞은편 의자를 당겨 자리에 앉아 최대한 아무렇지 않은 척 아버지에게 '식사는 하셨냐며' 말을 건넸다. 찰나의 평화가 지나간 후, 본격적인 아버지의 꾸지람이 시작되었다. '평소에 연락은 왜 안했냐' '추석 당일엔 당연히 와야 하는 것 아니냐' '부모 자식 사이에 이렇게 정 없이 굴면 안 된다'는 등의 말들이었다. 충분히 예상했던 말들이라, 그다지 느껴지는 감흥도 없었다.



아마 예전이었다면 이런 얘기들을 들어도 싸우기 싫은 마음에 그냥저냥 넘어갔으리라. 하지만 이제는 예전처럼 참기가 힘들었다. 아니, 참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아버지의 모든 말 하나하나에 대답했다. '보고 싶었다면 아버지가 먼저 연락하실 수도 있지 않느냐' '어차피 오늘 어머니 생신 때문에 보기도 하고, 어제는 나도 약속이 있었다' '아버지는 어떨지 모르시겠지만 나는 집이 불편하다'라며 누가 들으면 "저런 식으로 얘기하냐" 싶을 정도로 직설적인 말들을 쏟아냈다.






그렇게 민족 대명절인 추석 다음날, 몇 달만에 만난 아버지와 나는 마주 본 채로 언쟁을 벌였다. 내가 아버지께 속마음을 털어놓으며 선전포고를 하자, 아버지 또한 그에 맞는 대응사격을 벌이셨다. 자신도 서운했던 일들을 내게 말하셨고 나도 그것을 들으며 생긴 또 다른 서운함을 토로했다.



한 가지 확실한 건, 각자 속에 쌓인 서운함을 말하면서도 예전과는 분명 다른 대화를 하고 있다는 것이 느껴졌다. 과거라면 내가 한 말의 의도와는 상관없이 '부모에게 대든다'는 식으로 화를 내시는 듯한 느낌이었다면, 이제는 내가 하는 말을 듣고 '그래도 아닌 건 아니다'라고 말씀하신다는 게 느껴졌다. 그러니 나 또한 아버지의 말을 완전히 반박할 순 없었다. 수긍할 것은 수긍하되, 내 기준에도 아닌 것은 아니라고 말을 하며 대화가 이어졌다.



그렇게 대화를 하다 보니 한 번도 아버지께 말하지 못한, 가슴속 깊숙이 맺힌 응어리들이 하나둘씩 터져 나오기 시작했다. 어렸을 적 억지로 친척들의 모임에 끌려다녔던 것, 장손이라는 이유로 큰집에 가서 몇 시간 동안 말없이 멍하니 앉아있었던 기억들, 심한 아토피로 인한 대인기피증, 누나와 나를 대할 때 달랐던 아버지의 행동들. 나 자신도 이런 말들을 하고 있다는 것에 적잖이 놀라고 있었지만, 내 말을 듣는 아버지 또한 얘기를 들으며 여러 감정을 느끼고 계신 것처럼 보였다.






얘기를 모두 듣고 난 아버지는 잠시 머뭇거리시다, 그동안 누구에게도 말한 적 없다던 자신의 얘기를 하나 들려주셨다. 자신이 초등학교 4학년이던 때 자신의 아버지, 그러니까 내겐 할아버지가 돌아가셨다고 말씀하셨다. 자신의 형은 돈을 벌기 위해 서울로 상경했고, 하나뿐인 여동생은 그러한 변화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고 있었다. 자신 또한 어렸지만, 홀로 남은 어머니를 지켜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고 말씀하셨다.



아버지가 돌아가신 후 같은 반에 있는 친구들 중 누군가가 자신에게 '후레자식'이라며 놀릴 때마다, 분을 참지 못했다고 하셨다. 매일 아침 일찍 일어나 어머니를 돕기 위해 밭을 갈고, 소에게 먹일 풀을 베었다고 하셨다. 집에 놀러 온 동네 남자들 중, 어머니에게 말을 걸며 자꾸만 집에 있으려고 하는 놈들이 있었다고 하셨다.



"나는 어렸을 적 공부를 할 수 없는 환경이었다. 너의 엄마와 나는 연애를 한 것도 아니었다. 그래도 결혼을 했고, 너희를 낳았다. 자식을 키우며 너희들만큼은 나처럼 살지 않길 바랬다. 좀 더 많이 배우고 무시당하지 않았으면 했다. 그래서..." 아버지는 거기까지 말을 하시고는 더 이상 말을 잇지 못하셨다.






그제야 아버지가 왜 그렇게 평소 화를 참지 못하셨는지 조금은 이해할 수 있었다. 예전부터 내게 '책임감'을 그토록 강조하셨는지도 어느 정도 이해가 되었다. 아마 아버지도 전보다 나에 대해 이해하시는 부분이 있으셨으리라 생각한다.



이런 얘기들을 했다고 해서 당장 아버지와 내가 친해질 수는 없다. 다만 확실한 건, 떨어져 있는 시간이 생기면서 서로에 대해 좀 더 많은 생각을 할 수 있게 되었다는 것이다. 또한 매일 함께 있을 땐 하기 어려운 얘기들을 조금씩 할 수 있게 되었다는 것. 나는 이것이 정말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나뿐만 아니라 많은 사람들이 가족들 간의 관계에서 다양한 스트레스를 받고 있을 것이라 생각한다. 이러한 갈등이 생기는 이유에 대해 나는 "가족들 간에 적당한 거리를 두지 않아서"라고 말하고 싶다. 지나친 사랑과 기대는 오히려 상대를 부담스럽게 만든다. 사랑할수록 오히려 멀어지게 되는, 아이러니한 결과가 나타나게 되는 것이다. 반대로 서로에 대한 관심이 너무 없어도, 좋은 관계를 맺긴 힘들어진다. 결국 너무 가깝지도, 멀지도 않은 적당한 거리가 어떤 관계에서든, 좋은 관계를 유지할 수 있도록 해준다. '적당한 거리'에는 정신적인 거리뿐만 아니라, 육체적인 거리도 포함된다.


 




어머니의 생일 축하를 하고 나서 집으로 돌아가기 전, 나는 인사를 하러 아버지의 방으로 들어갔다. 아버지는 침대에 누워 TV를 보다 주무시고 계셨다. 내가 방으로 들어가자 인기척을 느끼셨는지 아버지는 누운 채로 눈을 살짝 뜬 채, 나를 바라보셨다. 나는 손을 내밀어 아버지의 투박한 손을 잡고 말했다. "아버지, 저 이제 갈게요." 그러자 아버지도 살짝 내 손을 잡으시며 말씀하셨다. "종종 놀러 와. 맛있는 거 먹자." 최근 아버지가 내게 건네신 말씀 중 가장 기분 좋게 들린 말이었다. 나는 고개를 끄덕이고 방에서 나왔다. 방에 들어갔다 나올 때까지는 찰나였지만, 처음 대화를 할 때와 달리 불편한 마음은 들지 않았다.



때로 너무 늦었다는 이유로 무언가를 하지 않은 채 포기하는 사람들이 있다. 나는 그들에게 묻고 싶다. 늦었다는 기준은 누가 정한 거냐고 말이다. 이 세상엔 우리가 늦었다고 생각한 것들을, 훨씬 더 많은 나이에 아무렇지 않게 시작하는 사람들이 너무나도 많다. 시작하기에 늦은 것은 없다. 시작을 하기까지 두려움만이 있을 뿐이다. 언젠가 나도 다른 친구들처럼 아버지와 시원한 맥주 한 잔을 기울이며 "그땐 그랬지"라고 말할 수 있는 날을 기대하며, 이만 글을 마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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