억지로 붙잡지 않아도, 곁에 머무는 사람들이 있다

by Quat


언젠가부터 커피는 내게 있어 '잠을 깨는 수단'이라기보단 '음료'에 가까운 의미를 지니고 있다. 늦은 저녁에 커피를 마시더라도 잘 시간이 되면 졸음이 밀려온다. 이런 생활이 언제부터 익숙해졌는지는 잘 기억나지 않는다. 일을 할 때도, 쉬는 날에도 커피를 마시지 않은 상태에서 무언가에 집중하기란 쉽지 않아졌다.



커피를 즐기기 시작한 건 카페를 자주 가고 나서부터였다. 혼자 살기 전, 내게 카페라는 곳은 '자유를 만끽할 수 있는 장소'였다. 책을 읽든, 유튜브를 보든, 글을 쓰든, 그 어떤 것을 하더라도 무어라 간섭하는 사람이 없는 곳. 그것이 내가 카페를 좋아하는 가장 큰 이유였다. 카페를 자주 가다보니 자연스레 이것저것 주문을 하게 되었고, 그러다 커피맛을 조금씩 알게 되어갔다.






무언가를 오랫동안 즐기다보면, 문득 자신이 왜 그것을 좋아하게 되었는지 고민할 때가 있다. 우리는 보통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다양한 수단을 사용한다. 하지만 시간이 한참 흐르고 나면 수단과 목적의 의미가 불분명해질 때도 있다. 드라이브를 좋아해서 차를 살 수도 있지만, 차를 사서 드라이브가 좋아졌을 수도 있지 않은가. 그 사람을 좋아해서 오랫동안 같이 있고 싶을 수도 있지만, 오랫동안 같이 있다보니 그 사람이 좋아져버린 걸수도 있다. 나도 처음엔 카페를 좋아해서 커피를 접하게 되었지만, 이젠 커피를 마시러 카페에 가는 편이다.



드라이브가 좋아서 차를 산 사람과, 차를 산 김에 드라이브를 하는 사람. 다른 사람이 보기엔 별다를 게 없을 것 같지만 자세히 보면 둘의 행동이 다름을 알 수 있다. 전자의 경우엔 날씨나 차의 상태를 크게 고려하지 않은 채 자주 드라이브를 즐길 것이다. 왜냐하면 '드라이브'라는 행위를 위해 차를 샀을테니까 말이다.



후자의 경우엔 드라이브가 목적이 아니다. 자신이 원하는 '차'가 더욱 소중하게 크게 느껴질 것이다. 그렇기에 화창한 날씨라고 하더라도 굳이 차를 몰고 나가지 않을 수도 있다. 미세먼지가 심하거나, 꽃가루가 많이 날릴 땐 자칫 차가 더러워질 수도 있기 때문이다. 구름 한 점 없이 깨끗한 하늘과 눈부신 햇살이 내리쬐는 똑같은 날에도 누군가는 음악을 들으며 도로 위를 달리고 있는 반면, 또다른 이는 주차된 차의 멋진 외관을 보며 감탄한 뒤 그대로 다시 집 안으로 들어가기도 한다.






무엇이 수단이 되고 목적이 되는지는, 그 사람이 어떤 성향을 타고났는지에 따라 다르다. 카페에 가는 이유가 맛있는 커피와 디저트를 즐기기 위해서인 사람도 있지만, 카페라는 공간을 즐기기 위한 사람도 있다. 또는 SNS를 통해 많은 사람들에게 자신의 일상을 알리고 싶어 사진을 찍으러 가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똑같은 카페를 가더라도, 그 곳에 가는 사람들의 목적은 저마다 다르다.



다른 기준은 있겠지만, 틀린 기준은 없다. 그러나 이러한 기준이 마치 틀린 것처럼 느껴질 때가 있다. 그것은 바로 자신과는 전혀 다른 기준을 가진 사람과 무언가를 함께 할 때이다. 커피맛이 어떤지 전혀 알지 못하는 사람과, 커피를 좋아하는 사람이 함께 카페에 갔다고 해보자. 두 사람에게 카페라는 공간은 전혀 다르게 느껴질 것이다. '이 돈 주고 이 쓴 걸 왜 먹어'라고 생각하는 사람과, '역시 여기 커피는 다르네. 오길 잘했어'라고 생각하는 사람. 한 사람에겐 마냥 행복하기만 한 곳이, 다른 이에겐 가시 방석에 앉은 듯한 기분일 것이다.






서로 다른 기준을 갖고 있는 사람이 무언가를 같이 한다고 해서 꼭 불편한 상황만 생기진 않는다. 각자가 가진 기준의 가치를 어느 정도 받아들일 수 있고 절제할 수 있다면, 문제 될 일은 크게 없다. 그러나 카페를 좋아하는 사람이 상대가 자신만큼 카페를 좋아하지 않는다는 알면서도, 만날 때마다 카페를 간다면 어떨까. 나는 자신이 좋아하는 것만을 상대에게 당연한 듯 요구하는 사람들 중에서, 정작 반대 상황에서 자신 또한 기꺼이 그렇게 행동할 줄 아는 사람을 거의 보지 못했다.



자신이 무언가를 좋아한다고 해서 상대방 또한 그것을 좋아하고 이해해야 할 이유는 없다. 그것은 자신이 선택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상대의 선택에 달린 것이다. 만약 상대방이 별로 선호하지 않는 것임에도 그것을 좋아하기 위해 노력한다면, 그것은 당신에 대한 존중이자 배려이다. 카페에 가는 걸 좋아하지 않는 사람이 당신과 카페에 가는 이유는, 당신이 카페에 가는 걸 좋아하기 때문이란 걸 모르는 사람은 없다. 그러나 그러한 행동에 진심으로 고마워하는 사람은 생각보다 드문 편이다.



나는 그런 배려를 좋아한다. 화려한 장미꽃 사이에 드문드문 섞여있는 안개꽃 같은 배려들. 처음엔 눈에 잘 띄지 않지만, 알고 보면 장미를 더욱 예쁘게 만들어주는 건 안개꽃 덕분이라는 것. 순간의 감정에 충실해 열정적으로 120%의 마음을 표현하다가 다투고 나면 0%가 되는 것이 아닌, 한결같이 70%의 마음으로 상대의 곁에 머무르는 것. 처음 차를 샀을 땐 애지중지하다가 얼마 지나지 않아 험해진 차를 보며 '새로 한 대 뽑을까'라고 생각하는 것보다, 몇 년이 지나도 처음과 크게 다르지 않은 차 상태를 유지하는 것.






최근 들어 인간관계 중 가장 많이 느끼는 부분 중 하나는, 아무리 관계에 노력을 기울인다고 해도 상대가 '그것을 제대로 알아봐주는 사람'이 아니라면 스스로를 자책할 가능성이 높아진다는 것이다. 자신과 상대의 기준의 다른 부분이 많을수록, 이런 생각을 하는 횟수는 더욱 잦아지게 된다.



내가 커피를 자주 마신다는 얘기를 하면, 듣는 사람의 반응은 제각각이다. "그것도 중독"이라며 카페인을 지나치게 섭취했을 때의 문제점에 대해 일장연설을 하는 사람, '그렇게 마시고도 밤에 잠이 오냐며' 신기해하는 사람, '그럴 수도 있지'라며 자신도 커피를 좋아한다고 말하는 사람.



무언가에 대해 어떤 생각을 갖고 있고 어떻게 말하는지는 사람마다 살아온 삶의 경험에 따라 차이가 생긴다. 그것은 내가 통제할 수 없는 부분이다. 왜냐하면 나 또한 특정한 영역에 대해 나만의 기준이 있고 타인이 그것에 대해 뭐라고 한들, 타당한 이유가 없으면 굳이 고칠 생각은 하지 않으니까 말이다. 하지만 '어떤 사람을 곁에 둘 지'는 오로지 나의 선택이다. 삶에서 나와 똑같은 기준을 가진 사람을 만나기란 힘들다. 그러나 그러한 다름을 어떤 방식으로 표현하는지를 보면, '상대가 나를 어떻게 생각하는지'를 짐작할 수 있다.






가식을 예쁘게 포장하는 것보다, 대충 포장한 진심이 좋다. 단지 말만 예쁘게 하는 것이 아니라, 차라리 행동을 하는 사람. 그렇다고 표현 방식이 중요하지 않다는 건 아니다. 인생의 모든 것엔 '최소한'이라는 게 존재하니까 말이다. 아무리 진심이라 해도 전달하는 방식이 지나치게 자기중심적이면, 상대방은 그것을 진심으로 느끼지 못할테니까 말이다.



무언가를 잘하기 위해 노력하는 태도는 중요하다. 그러나 혼자만의 절실함으로 주변의 모든 문제가 해결될 것이라는 믿음은 내려놓아야 한다. 결국 우리가 하는 대부분의 행동들은 누군가와 연관되어 있고, 옳고 그름과는 상관없이 상대방을 향한 작은 배려가 자신에게 훨씬 더 좋은 영향을 미친다는 걸 경험해 본 사람은 알 것이다.



똑같은 농담을 던져도 "뭐야 그게"라고 하는 사람도 있지만, 박수를 치며 웃는 사람이 있다. 힘든 일을 털어놓았을 때 "그 정도는 힘든 것도 아니야. 나 같은 경우엔"이라며 자신의 말만 하는 사람이 있는 반면, 함부로 조언하지 않고 가만히 들어주는 사람도 있다. 당신은 어떤 사람들로 곁을 채우고 있는가. 자신과 너무 다른 사람들을, 단지 좋을 때 좋다는 이유로 억지로 붙잡아두면 제풀에 지칠지도 모른다. 잡지 않아도 멀리 떠나지 않고 선을 지키며 자연스레 내 곁을 맴도는 사람들. 그런 사람들이 좋고, 나도 그런 사람이 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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