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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Quat Jun 11. 2023

35살이 돼서야, 눈치를 덜 보며 삽니다


사람들은 삶의 모든 부분에서 스스로 '적당한 수준'을 유지하고 싶어 한다. 남들만큼은 일을 잘 해내야 하고, 사람들과도 적당하게 잘 지내길 바라며, 건강 또한 나와 비슷한 나이대인 사람들 정도만큼은 유지하길 원한다. 그러나 매번 느끼는 건, 바로 그 '적당히'라는 게 가장 어렵고 해내기 힘들다는 것이다.



이 모든 부분들 중에서도 유독 어려운 것을 하나 고르라면 "적당한 눈치"가 아닐까 싶다. 지나치게 눈치를 보게 되면 스스로 주눅이 들게 되지만, 그렇다고 아예 눈치를 보지 않고 행동하면 타인에게 상처를 주기 쉬워진다. 상대의 반응이 애매할 때 당신은 어떻게 행동하는 편인가. 오늘은 "상대의 마음을 알 수 없을 때, 우리가 해야 하는 행동"에 대한 내 생각을 말해보려 한다.






타고난 성향과 더불어 인간의 성격에 가장 영향을 많이 끼치는 요소가 있다면, '가정환경'이라고 생각한다. 과거 어느 책에서 '인간의 성격은 6~8세 사이에 이미 형성된다'라는 글을 본 적이 있다. 물론 후천적인 요소로 인해 바뀌는 사람들도 많겠지만, 그만큼 어린 시절 경험들이 사람에게 얼마나 큰 영향을 끼치는지를 알려주는 대목이다.



나 또한 성인이 된 후 다양한 사건들을 통해 조금씩 바뀌며 현재를 살아가고 있지만, 전체적인 성격 형성은 어린 시절에 겪었던 크고 작은 일들로 이루어졌다. 그중에서 '물어보지 않은 채 눈치껏 행동하기'라거나 '아는 척하고 넘어가기' 또한 어렸을 적 경험으로 생긴 격 중 하나이다. 엄격한 동시에 감성적인 부분이 많았던 아버지는, 자신의 기분에 따라 다르게 행동하시는 편이 잦았다. 기준이 많은 건 아니지만, 감성적이다 보니 기준이 매번 달라지기 일쑤였으며 자신의 기준을 따르지 않으면 화부터 버럭 내시곤 했다.



반대로 어머니는 이성적이고 차분했지만, 그러한 기준들이 매우 확고한 동시에 아주 많았다. 기준이 있는 부분이 적지만 모호했던 아버지와, 확고하지만 너무 많은 기준을 가지고 계셨던 어머니는 갈등이 잦은 편이셨고 그 사이에 끼인 나는 '무엇이 옳은지'에 대한 고민을 매번 하는 동시에, 두 분의 갈등을 받아내는 경우가 많았다.



예를 들어 집안 청소를 한다고 했을 때, 아버지는 그날 자신의 몸상태와 기분에 따라 청소에 대한 중요도를 다르게 여기시는 편이었다. 지난번엔 청소기만 밀고 마무리를 지었다면, 어떤 날은 갑작스럽게 대청소를 하는 것이었다. 어느 정도 융통성이 있다는 점에서 꽤나 편했던 건 사실이었다. 그러나 내가 아버지의 행동 중에서 가장 이해할 수 없는 건 무엇을 하든 머릿속으로 혼자 계획을 세워놓고, 그러한 생각을 같이 하는 사람에게는 제대로 전달해주지 않는다는 점이었다. 그러면서 상대방이 자신의 계획을 잘 따라오지 않으면 '왜 그런 식으로 하냐'며 화부터 내기 일쑤였다.



반대로 어머니의 경우엔 기준이 확실했다. 일의 순서가 정확했으며, 그것을 하기 전 또는 부탁을 하실 때도 아버지에 비해서 명확하게 자신의 생각을 전달하시는 편이었다. 하지만 문제는 그러한 기준들이 '너무나 명확하고 세세했다'는 것이었다. 청소를 할 때도 마찬가지였다. 청소하는 순서, 청소기를 돌리는 방법, 밀대를 빠는 방법 등 자신만의 기준이 매우 뚜렷한 동시에 그대로 청소를 해야 직성이 풀리시곤 했다. 이 같은 점 때문에 어머니와 대화를 할 때면 마치 내가 '아무것도 모르는 사람'이 된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전혀 다른 성향을 가진 부모님도 서로가 답답하셨겠지만, 무엇 하나 확실하게 정립되지 않은 채로 두 분이 가진 정반대의 성향을 받아내야만 하는 내 입장도 쉽지 않은 건 마찬가지였다.






이런 상황에 놓이다 보니 어린 내 입장에선, 무엇을 하든 이해가 잘 되지 않는 경우가 많았다. 지난번에 어머니에겐 '청소는 이렇게 해야만 한다'라고 전해 들었는데, 아버지에겐 '굳이 그렇게 하지 않아도 된다'라는 얘기를 듣고 있으면, 다음번에 청소를 할 땐 내가 어떻게 해야 할지 막막한 기분이 들었다. 청소뿐만이 아니라 무엇을 하든 두 분의 의견이 상충될 때마다 그 사이에 낀 나는 누구의 말을 따라야 할지 판단이 서질 않았다. 그렇다고 두 분에게 그런 생각을 말하면, 두 분은 다음과 같이 내게 말씀하셨다. "저번에 말해줬잖아. 왜 자꾸 물어보니?"



그런 상황에서 내가 할 수 있는 건 단 하나였다. '적당히, 알아서 눈치껏 행동하는 것'. 아버지가 부재중이실 땐 어머니의 성향대로, 반대일 땐 아버지가 선호하시는 방식으로 적당히 맞추며 살았다. 그렇게 행동하다 보니 장점과 단점은 명확했다. 장점이라면 전보다 꾸지람을 듣는 일이 적었다는 것이고, 단점은 내 의견을 피력하는 일이 점점 줄어들었다는 것이다. 무언가에 대해 내 방식대로 생각하고 결론을 내리는 것보다는 그저 순간의 스트레스를 모면하기 위해 적당히 아는 척하며 넘어가는 것이 훨씬 편하게 느껴졌다.



점점 이러한 방식은 내 삶의 한 부분이 되었고, 다른 사람을 대할 때도 비슷하게 행동했다. 눈치껏 상대방이 현재 어떤 기분인지를 그 사람과 나눈 대화나 지금까지의 언행들을 근거로 나름의 판단을 내렸다. 그리고 그 사람이 '좋아할 만한 것'들을 챙겨주고, '싫어할 만한 것'들을 하지 않았다. 그랬더니 사람들이 나를 편하게 생각하기 시작했다. 분명 그들에게 있어 나라는 사람은 편했을 것이다. 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그러한 관계들이 점점 더 버거워지기 시작했다. 왜였을까. 그들과의 관계에서 '진정한 나'는 존재하지 않았다. 그것이 문제였다.






'그 사람의 본모습을 알고 싶다면 잘 대해주면 된다'는 말이 있다. 나는 이 말만큼 인간관계의 본질을 꿰뚫고 있는 것이 없다고 생각한다. 정도의 차이야 있겠지만 믿음에 대해 믿음으로 보답하는 사람들이 의외로 흔치 않다는 건, 한 번이라도 사람으로 인해 상처를 받아본 사람은 알 것이다. 물론 자기 자신을 돌이켜봤을 때 떳떳하다는 전제 하에서 말이다.



현재 나는 예전에 비해서 남들의 눈치를 많이 보지 않으려 행동한다. 의식적으로 꾸준히 노력을 한 끝에, 지금은 의식하지 않더라도 그런 부분이 많이 줄어들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갈등상황이 발생하면 눈치를 보는 게 더욱 편하다. 그것은 어쩔 수 없는 것이라 생각한다. 왜냐하면 그동안 살면서 눈치를 보며 살았던 시간이, 눈치를 보지 않고 살아온 시간보다 훨씬 길었으니까. 그래도 내가 현재의 삶에 만족하는 건 예전에 비해 그런 부분들이 많이 줄어들었고, 그로 인해 관계에서 '나'라는 사람이 차지하는 비중이 훨씬 늘어났기 때문이다.



눈치껏 상대가 원하는 것을 들어주고 맞춰주며 살아오다가, 변해야겠다는 생각으로 조금씩 나의 주장을 상대에게 드러내기 시작했다. 그러자 당연하게도 돌아오는 반응이 달랐는데, 신기하게도 변화에 긍정적인 반응을 보이는 사람들 중엔 '시간과 에너지를 그리 많이 쏟지 않는 사람'들이 의외로 많았다는 것이다. 오히려 내가 잘해주고 많이 맞춰준 사람들일수록, 나의 변화를 못마땅하게 여기는 사람들이 꽤 있었다.



내 변화를 가장 탐탁지 않고 못마땅하게 대했던 분이 바로 부모님이었다. 입장을 바꿔보면 그럴만했다. 몇십 년 동안 자신의 말에 별다른 대꾸를 하지 않고 '착한 아들'로 살아오던 녀석이, 어느 순간부터 말대꾸를 하기 시작했다고 느끼셨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내가 정말로 서운했던 건 단순히 부모님의 부정적인 반응 때문은 아니었다. '현재 내가 왜 이런 생각을 하고 이렇게 행동하는지'에 대한 이유를 아주 상세히 설명했음에도, 그것에 대한 이해보다 자신에게 돌아오는 피해 아닌 피해를 먼저 생각하시는 모습 때문이었다. 심지어 평소에도 '가족이 우선이다', '자식이 잘 되는 게 우리의 기쁨이다'라고 입버릇처럼 말씀하셨기에, 자식의 변화를 지지해 주실 거라 믿고 있던 내 기대가 무너지는 듯한 기분이 들어서인지 더욱 서운한 기분이 들었다.






그러나 부모님과의 마찰로 그러한 변화를 막을 순 없었다. 오히려 그런 일이 생길 때마다 이제야 나의 삶을 온전히 살고 있다는 기분마저 들었다. 우리가 우리 자신의 삶을 살기 위해 가장 넘기 힘든 순간이, '부모와의 마찰'이라는 걸 느낀 순간이었다. 또한 그러한 대화를 통해 아무리 가족이라고 해도 서로가 몰랐던 '진정한 자신'의 모습을 돌아볼 수 있는 계기가 되었다는 것도 말이다. 이 대화를 통해 나는 살면서 처음으로 아버지의 눈물을 보았으며, 어머니가 자신의 잘못을 순순히 인정하시는 모습도 볼 수 있었다.



가장 큰 고비를 넘기고 나니, 다른 사람과의 관계에서 내 의견을 말하는 건 한결 수월했다. 몇 번 그런 과정을 거치자 인간관계가 차츰 정리되기 시작했다. 더 이상 자신에게 입바른 말, 공감하는 말, 자신의 입장을 이해해주지 않자 나를 떠나는 사람들도 꽤 있었다. 객관적으로 따져도 내가 준 것에 비해 돌려받을 것이 한참 남았지만, 그들을 잡을 생각은 전혀 없었다. 오히려 그들에게 많은 것을 주었더니, 관계를 정리할 때도 쓸데없는 언쟁을 벌일 필요가 없어서 편안했다. 그야말로 '나만 놓으면 끝날 관계'였던 것이다.





 

사람의 마음이란 참 알다가도 모를 것이다. 말을 하지 않으면 알 수 없고, 말을 하더라도 그것이 정말로 상대의 진심인지는 시간이 지나고 직접 겪어봐야 비로소 알 수 있기 때문이다. "사랑해"라는 말을 하지 않더라도 상대가 나를 진심으로 사랑할 수도 있고, 반대로 "사랑해"란 말을 수없이 하더라도 그 사람이 나를 사랑하지 않을 수도 있다.



여기까지만 읽으면 당신은 혼란스러울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우리는 말하는 모든 것을 의심해야 하는 것일까? 말하지 않아도 그 사람의 행동을 보고 상대를 믿어야만 하는 걸까? 사실 그 무엇도 정확히 '그렇다'라고 할 수는 없다. 조금은 철학적으로 들릴 수도 있지만, 우리가 무언가를 '옳다'라고 생각하고 행동할지라도 그것이 '참'이라는 명백한 증거는 어디에도 없기 때문이다. 이 말을 좀 더 자세히 풀어보면 자신이 무언가를 '옳다고 믿는다'는 생각 그 자체가 그것이 '진실'이라는 것을 뒷받침하는 근거가 되는데, '진실'이라는 명백한 사실의 근거가 '생각'이라는 주관성이기 때문에 결국 자신이 믿는 진실이 정말로 옳은지는 그것을 적용할 수 있는 상황이 닥쳐야만 알 수 있기 때문이다.



복잡하게 들리겠지만 단순한 건 딱 하나다. 결국 자기 자신 또는 상대방의 생각이 참이든 거짓이든, 말하지 않으면 모른다는 것이다. 넘겨짚거나 눈치껏 행동하는 것도 한계가 존재하기 마련이다. 그러니 상대방의 생각이 이해가 되지 않는다면 솔직하게 물어봐야 한다. 그 질문을 던지는 순간부터 상대의 반응을 보면, 그가 당신을 어떻게 생각하는지 알 수 있을 것이다. 바쁘지도 않은데 그것을 귀찮아하거나, 적당히 넘기는 식으로 대답한다면 상대는 딱 그 정도로만 당신을 생각하는 것이다. 물론 조금만 생각해 보면 알 수 있는 것들까지 모조리 상대에게 물어보는 건 당신의 잘못이지만 말이다.



그러니 당신이 할 것은 단순하고 명확하다. 이해가 안 되면 물어보고 일단 그것을 믿는 것이다. 당신의 질문에 상대가 성심성의껏 대답했음에도 당신이 그것을 믿을 마음이 없다면, 결국 물어보지 않는 것과 다름없다. 그리고 상대가 자신이 했던 말대로 행동하는지 지켜보면 될 뿐이다. 상대의 답을 두려워하지 말고 물어보라. 거기서부터 모든 것이 변할 테니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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