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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Quat Jun 27. 2023

첫 번째 기억 - 5살, 아버지에게 뺨을 맞다


이 글을 쓰기 전 나는 당신에게 한 가지 질문을 던지려고 한다. 누군가 당신에게 "가장 선명히 떠올릴 수 있는, 인생에서의 첫 번째 기억은 무엇입니까?"라고 했을 때, 머릿속에서 자연스럽게 그려지는 기억은 어떤 것인가. 그리고 그다음 기억은 무엇인가. 다음, 그리고 다음. 당신의 삶에 그 기억들이 어떤 영향을 미치고 있는지에 대해 깊게 생각해 본 적 있는가.



현재 '당신'이라는 사람의 머릿속엔 다양한 주관들이 빼곡히 들어차 있을 것이다. 일, 사랑, 우정, 연애, 결혼, 꿈, 취미 등등 셀 수 없을 정도로 다양한 분야에 대해, 나름의 경험을 토대로 만들어진 당신만의 기준이 있을 것이다. 그런데 그러한 '기준들의 기준'이 어디서부터 온 건지 떠올려 본 적 있는가. '상대와 한시도 떨어져 있고 싶지 않다'라는 사랑의 기준이 있다면 왜, 그리고 언제부터 당신이 그러한 행위를 '사랑'이라고 생각하는지. '좋아하는 일을 해야지'라는 일에 대한 기준이 있다면, 그 생각을 가장 처음 떠올리게 했고 그것이 답이라고 믿게 만든 첫 경험이 무엇인지.



지금부터 당신은 나와 함께 짧다면 짧고, 길다면 긴 여행을 떠나게 될 것이다. 현재 당신이 옳다고 믿는 기준의 한 조각을 지닌 채 그것이 어디서부터 시작되었는지를 차근차근 찾아가 보는, 이른바 '기억의 여행' 말이다. 먼저 이 여행을 떠나본 사람의 입장에서 당신에게 한 가지 말해주고픈 게 있다. 그것은 바로 지금 당신이 그토록 강하게 믿고 있는 생각의 뿌리가 의외로 깊지 않을 수 있다는 것이다. 절대 변하지 않으리라 믿었던 '그 생각들'의 근본을 파헤쳐가다 끝에 도달하게 되면, 사실 그러한 믿음이 별 것 아니었다는 걸 깨닫게 될지도 모른다는 것. 그 결과를 어떻게 받아들일지는 오로지 당신의 몫이지만 말이다. 서두가 길었다. 이제 그럼 첫 번째 여행을 시작해 보자.






무서웠던 아버지


내가 기억하는 어린 시절 가장 생생했던 기억은 아버지에게 뺨을 맞았던 기억이다. 어린 시절 뭘 했길래 뺨을 맞았냐고? 어렴풋이 기억하기론 퇴근하고 집에 돌아온 아버지의 등에 올라타 애교를 부리다가, 갑자기 시야가 흐릿해지더니 방바닥에 쓰러져 있었다. 아마 그때가 처음으로 어머니가 아버지에게 화를 내셨던 모습으로 기억한다. 아버지가 내 뺨을 때린 이유는 단순했다. '피곤한데 귀찮게 했다고'. 거기서부터 '아버지'와 '가족'에 대한 이야기가 시작되었다.



지금이야 예전에 비해 부드러워지셨지만, 아버지는 그야말로 '무서운 존재'였다. 대여섯 살 되었을 무렵, 방 안에서 거실 소파에 앉아 담배를 피우는 아버지를 바라본 적이 있다. 조그만 아이의 시선에서 희끄무레한 연기 뒤쪽 그 커다란 실루엣. 조금이라도 마음에 들지 않는 게 생기면 아버지의 표정은 바로 일그러졌고, 뒤이어 호통이 터지곤 했다. 하이톤임에도 마치 칠판을 손톱으로 긁을 때 나는 쇳소리가 섞여났던 건, 일을 할 때 고래고래 소리를 치셨기 때문임을 나중에서야 알게 되었다. 그리고 아버지가 하시는 일이 속칭 '노가다'라고 불리는, 고된 막노동이라는 것 또한 그보다 좀 더 시간이 흐른 뒤에 알게 된 사실이었다.






'내로남불'과 '그럴 수 있지'


아버지와 내가 지금까지도 서먹서먹한 이유는 여러 가지가 있지만, 그중 가장 커다란 비중을 차지하는 건 "내로남불의 태도", 이것이 가장 결정적인 이유이다. 현재까지도 내가 가장 싫어하는 사람의 유형인 동시에, 스스로 가장 경계하는 모습이기도 하다.



그는 자신이 화를 내는 데엔 충분히 그럴만한 이유가 있다고 말했다. 물론 사람마다 화를 내는 포인트가 다르며, 특히 예민한 부분엔 더욱 화를 낼 수 있다는 것엔 동의한다. 하지만 내가 아버지를 이해하기 힘들었던 건 '매번 다른 포인트'에서 화를 낸다는 것과, 화를 내는 정도가 '지나칠 때가 있었다는 것'에 있다.



어떤 날엔 전혀 화를 내지 않고 넘어갔던 부분에서 또 다른 날엔 화를 벌컥 내는 것. 아주 사소하게 넘어갈 수 있는 것임에도 자신이 마음에 들지 않으면 불같이 화를 냈다는 것. 사람은 머릿속으로 이해하기 힘든 상황을 매일같이 마주하게 되면, 이해하지 못해도 그것을 넘겨버리는 능력이 생기게 된다. '그럴 수 있지'라는 마음.이때부터 배운 '그럴 수 있지'라는 마음가짐은 의외로 유용하게 쓰이곤 했다. 상식적으로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사람과 상황을 마주할 때, 그러한 것들을 덤덤히 넘겨버릴 수 있었다. 그래서 굳이 받지 않아도 될 스트레스를 남들보다 적게 받았던 건 내 장점 중의 하나이기도 했다. 물론 반드시 장점만 있진 않았지만.






가장 행복했던 기억이, 가장 '쪽팔렸던' 순간으로


한 번은 아버지와 단둘이 대화를 했던 적이 있었다. 주방 식탁에서 아버지는 혼자 술을 드시고 계셨고, 나는 바로 앞에 앉아 있었다. 어쩌다 보니 정말 오랜만에 부자 단둘이 이야기를 하게 되었다. 그때도 솔직히 정말 말도 안 되는 이야기들을 하시곤 했었다. 내가 돈 한 푼 받지 않는 사회복지사가 되길 바랐다나 뭐라나. 쓸데없는 얘기들은 '그럴 수 있지'라는 능숙한 방어로 한 귀로 듣고 흘리며 '대화라 부르기 힘든 대화'를 꾸역꾸역 이어나가고 있었다.



이런저런 얘기를 하던 도중, 예전에 내가 상담사로 일했던 상담카페 이야기가 나왔다. 심적으로 가장 힘들고 스스로 초라했을 당시, 나는 그곳에서 약 2년간 일을 하며 떨어진 자존감을 회복했고 좋은 추억들을 많이 쌓을 수 있었다. 내 인생을 통틀어 가장 행복했던 시간 중 하나라고 말할 수 있을 정도인 그때의 시간들에 대해, 아버지는 술에 취해 동공이 풀린 눈으로 나를 바라보며 담담히 말씀하셨다. "나는 네가 그 일을 한다는 게 쪽팔렸어."



순간 매번 해오던 '그럴 수 있지'가 쉬이 되지 않았다. 속에서 오랜만에 느껴보는 감정이 솟구쳤다. '분노'였다. 가족 외에 다른 사람들을 만나기만 하면 '가족들이 행복하길 바란다'느니, '자식이 뭘 하든 행복하게 살기만 하면 됐다'고 입버릇처럼 말하던 사람이 어떻게 저런 말을 할 수 있을까. 그 누구보다 가족이면서 부모이기에 그 당시 내가 얼마나 힘들었는지, 거기서 내가 얼마나 행복한 시간을 보냈는지 모를 수가 없던 사람이기에 서운함과 분노는 더욱 컸다.



그러나 잠시 후 그러한 분노는 곧 사그라들었다. 아니, 크기는 더욱 커졌지만 형태가 달라졌다. 다시는 이 사람에게 나의 행복이나 분노 등 어떠한 감정도 드러내지 않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윽고 나는 아버지에게 말했다. "솔직히 난 어렸을 때 아버지가 하는 일이 부끄럽다는 생각을 잠시 한 적이 있어. 그래도 종종 아버지를 따라가서 그 일을 했었을 때 그게 얼마나 힘든지 느껴보니까, 그렇게 생각하면 안 되겠더라고. 그래서 그 이후부턴 누구를 만나더라도 아버지가 무슨 일을 하시는지 물었을 때 숨긴 적은 없었어. 그런데 아버지는 다른 사람들 앞에선 가족이면 어떻다느니, 자식이 행복하기만 하면 됐다느니 그런 얘기를 하지만, 정작 아버지 본인은 그렇게 생각하시진 않은 거네." 이 대화 이후 내 안엔 새로운 가치관이 하나 더 생겨났다. 그것은 바로 '상대의 말보단, 행동을 믿자'라는 것이었다.






그들이 무엇을 원하는지 나는 모르겠다


그 이후로 몇 년이 지났다. 나는 독립을 했고, 한 회사에 운 좋게 입사했다. 혼자만의 시간과 공간을 만끽하며 진정한 내 삶을 즐기기 시작했다. 집을 나간다고 말을 했을 때 부모님이 내게 보인 반응은 비슷했다. '혼자 사는 게 그렇게 쉬울 것 같아?' 그로부터 시간이 지나도 내게 연락이 먼저 오지 않자, 그때 부모님이 보이신 반응 또한 비슷했다. '자식이 먼저 연락을 해야지', '가족끼리 이러면 안 된다' 등등. 나는 부모님을 이해할 수 없었다. 그토록 오랜 시간을 함께 있으면서 좋은 말을 해주긴커녕 '내가 답답해서 못살겠다', '이래서 혼자서 살겠냐'는 등 매번 쓴소리만 하시던 분들이었는데, 막상 멀어지니 이젠 또 다른 이유로 내 탓을 하시는 것이었다.



가족을 사랑하고, 가족이 최우선이라고 그렇게 자주 말씀하시던 부모님. 도대체 부모님이 그토록 강조하시는 '가족'이 무엇인지 이제는 모르겠다. 그 어느 때보다 바쁘고 행복한 삶을 보내고 있음에도, 부모님은 내게 그래서는 안된다고 말씀하신다. 내게 있어 가장 행복했던 순간이었음에도, 아버지는 그 순간이 가장 쪽팔렸다는 말을 내게 직접 하셨다. 가족이 무엇보다 소중하다고 말씀하시는 부모님이지만, 정작 내가 집에 가면 소파에 앉아 TV를 보고 계신다. 1시간이 넘는 시간을 달려 집에 가지만, 30분도 채 되지 않아 집을 나선다. 도대체 부모님이 원하는 가족의 모습, 자식의 모습이란 무엇일까. 나는 정말 모르겠다.






'가족'의 의미와 '첫 번째 기억'의 마무리


종종 누군가는 그렇게 말하곤 한다. "그래도 가족이니까" 나는 이 말이 모든 가족에게 통용되진 않는다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가족의 형태라는 건 제각각이며, 가족이라는 이유로 너무나 다른 가족구성원이 억지로 뭉치는 게 오히려 독이 된다는 걸 그 누구보다 느끼며 살아왔기 때문이다.



이 글을 읽는 누군가는 슬프다고 생각할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정작 나는 그렇게 슬프다는 느낌이 들진 않는다. 그저 나와 같은 형태의 가족도 있다는 걸 말해주고 싶었을 뿐이다. 남들 앞에선 '행복한 가족' 코스프레를 하며 실제론 속이 썩어 문드러진 것보다는, 차라리 적당한 거리감을 유지하며 살아가는 게 훨씬 행복한 가족도 있다는 걸 말이다.



내 삶의 첫 번째 선명한 기억을 더듬어가는 과정을 통해, 지금 내가 갖고 있는 여러 가치관들이 어떤 이유로 생겼는지 그 뿌리에 대해 찾을 수 있었다. 그것은 결코 유쾌한 경험은 아니었다. 그러나 확실한 건 이런 경험을 통해 내가 어떤 사람이며, 어떤 사람과 맞지 않는지, 왜 내가 그러한 생각을 강하게 믿게 되었는지를 다시 한번 확인할 수 있었다는 것이다. 자신이 믿고 있는 생각의 뿌리가 무엇인지를 찾아간다는 건 이런 것이다. 비록 그 과정이 슬프고 기쁘지 않을 순 있지만 하나의 탐색을 마치고 나면 속이 한결 후련해진 기분이 든다.



이렇게 나의 첫 번째 기억 여행은 끝이 났다. 물론 세세하게 들여다보면 훨씬 더 많은 이야깃거리들이 있지만, 그것을 전부 풀어서 얘기할 수 없음을 양해 바란다. 첫 번째 기억 여행은 썩 유쾌하진 않았기에 다음 두 번째 기억 여행은 이것보다는 좀 더 즐겁고 행복한 이야기들이 많을 거란 약간의 스포일러를 남기며, 이만 글을 마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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