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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Quat Aug 17. 2023

그들 또한 그들이 욕하는 '악마'와 다를 바 없었다


세상이 점점 더 무서워지고 있다. 아무 이유 없이 지나가는 사람을 폭행하거나, 자식을 지나치게 감싸고돌며 교권을 침범하는 부모들도 많다. 누군가가 저지른 실수를 '자신을 향한 맹렬한 비난'이라고 여기며 과도한 자기 방어적인 태도를 보이는 사람들. 타인에게 엄격한 잣대를 내세우는 동시에, 정작 스스로에겐 과분한 동정과 연민을 보이는 사람들이 많아지는 이 세상에서 우리는 어떤 기준을 갖고 살아가야 하는 것일까. 오늘은 "악마를 욕하는 또 다른 악마들"에 대해 말해보려 한다.






사람은 자기가 보고 싶은 대로 이 세상을 바라본다. 아무리 공감을 잘하고, 타인을 잘 수용하는 사람이라고 해도 이 사실에서 벗어날 순 없다. 왜냐하면 우리는 우리가 지금까지 쌓은 지식을 토대로 이해할 수 있는 범위 내에서 모든 것에 대해 생각하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커피'를 한 번도 본 적도, 마셔본 적도 없는 사람에게 커피에 대해 설명한들 그 사람이 과연 커피에 대해 얼마나 이해할 수 있겠는가? 물론 전보다는 커피라는 것에 대해 아는 지식이 늘어났겠지만, '조금 더 알게 되었다는 것'과 한 대상을 '온전히 알게 된다는 것'엔 엄청난 차이가 있다.



이처럼 우리가 자신이 알고 있는 지식의 범주에서 무언가를 이해하고 자신 나름의 결론을 내린다는 건 불변의 진실이다. 그러나 중요한 건 이다음이다. 자신만의 기준을 갖고 무언가에 대해 '나는 이렇게 생각해'라고 판단을 하는 것까진 충분히 그럴 수 있다. 하지만 요즘 들어서 부쩍 많은 사람들이, "자신이 내린 판단만이 정답"이라고 생각하고 행동하는 것처럼 보인다. 가족, 친구, 연인 사이에서도 이러한 문제들로 인해 정상적인 대화가 이뤄지지 못하는 경우를 꽤 많이 봐왔기 때문이다.






나는 성인이라면 자신만의 기준을 갖고 그것에 대한 소신을 지키며 살아가야 한다고 믿는다. 부모의 품에서 벗어난 후 다양한 사람들과 관계를 맺고, 수많은 사건을 겪다 보면 자연스레 '이건 이렇게', '저건 저렇게'라는 이른바 "가치의 대원칙"이 생겨나게 된다. 더 나아가 그러한 대원칙을 세우고 살다 보면, 다양한 상황과 변수들 속에서 수많은 예외의 잔가지들이 뻗어나가기도 한다.



만약 당신이 20살이 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연애를 하게 되었다고 해보자. 당신은 사랑하는 연인과 데이트를 하며 즐거운 시간을 보낸다. 그러다 실수로 학창 시절 가장 절친한 친구와 연인, 두 사람과 각각 같은 날에 약속을 잡게 된다. 양쪽 모두 소중한 사람들이기에 어느 한쪽도 쉽게 포기할 수 없었지만, 당신은 알고 지낸 지 더 오랜 친구를 만나기로 결정한다. 연인에게 미안하다는 말과 함께 약속을 미뤄야겠다고 설명하지만, 당신의 연인은 서운함을 감추지 못한다. 상황을 설명했음에도 계속해서 화를 내는 연인에게 서운함을 느낀 당신은, 이 사건을 계기로 연인과 다툼이 잦아지게 되었고 결국 얼마 지나지 않아 헤어지게 된다. 이 사건을 통해 당신은 약속을 잡을 때 좀 더 꼼꼼하게 확인해야 한다는 걸 느꼈고, 이성을 만날 때도 다툴 때 얼마나 대화로 잘 풀어나갈 수 있는지를 주의 깊게 보기 시작했다.


 




앞선 사례에서 등장한 당신을 A라고 말해보자. A는 자신이 겪은 사건을 통해 2가지 대원칙을 배우게 된다. 하나는 "약속을 잡기 전 꼼꼼한 확인"이고, 다른 하나는 "연인과 나누는 대화의 중요성"이다. 하지만 이러한 하나의 대원칙만으로는, 우리가 살아가는 현실의 모든 상황에 효과적으로 대응하기란 불가능하다. 아무리 약속을 잡기 전 꼼꼼하게 확인하더라도 어쩔 수 없이 같은 날 약속을 잡을 수밖에 없는 상황도 존재한다. 연인과의 대화가 중요하다는 걸 잘 알지만, 그 또한 사람이기에 '알면서도 서운한 감정'으로 인해 자기 자신조차 이성적인 대화가 불가능한 상황에 처하게 될 것이다.



우리들 또한 이렇다 보니, 시간이 흐를수록 대원칙에서 뻗어나간 잔가지들이 하나둘씩 생겨나게 된다. "불변의 대원칙"에 이은 "대원칙의 예외"가 생겨나고, 또다시 "대원칙의 예외의 예외"가 생겨난다. 이런 식으로 점점 예외적인 경우들과 자주 맞닥뜨리게 되면 우리는 한 가지 의문을 갖게 된다. '정말로 내가 믿는 이 생각이 옳은 것일까'라고. 그렇게 수많은 예외들 속에서 생각이 많아지는 순간, 아주 가끔씩은 자신이 오랜 시간 동안 믿어왔던 대원칙 그 자체를 바꿔버리는 것이다.






이 과정 속에서 우리가 뉴스나 유튜브에서 쉽게 볼 수 있는, '인간의 탈을 뒤집어쓴 악마'같은 사람들이 생겨나게 된다. 자신이 믿고 있는 대원칙과는 방향을 달리 하는 수많은 예외를 직접 경험하고 마주하면서도, "그래도 내가 믿는 게 맞아"라며 끝까지 자신의 생각을 고수하는 사람이 있다. 그게 아니라면 너무나 혹독하고 힘든 현실 속에서 결국 자신이 지금까지 고수하던 신념을 포기하고, 아예 정반대의 대원칙을 믿게 되는 사람도 있다.



전자에 비해 후자의 경우는 안타깝다고도 볼 수 있다. 하지만 그 사람이 그 결정을 내리기까지의 과정이 너무나 힘들었다고 한들, 결국 전과는 다른 삶을 살기로 한 것 또한 본인의 결정이다. 그리고 성인이라면 자신이 내린 결정에 대해 어떤 식으로든 책임을 져야 한다는 것 또한 마땅한 사실이다.



이들이 저지른 잘못과 악행은 분명 처벌받아야 마땅하다. 그러나 이들보다도 더욱 못된 악마들이 있다. 바로 보이지 않은 곳에서 이들의 잘못을 비난하는 것에만 초점을 맞춘 사람들. 그들의 악행을 근거로 자신이 얼마나 올바르고 착한 사람인지를 타인에게 말하는 사람들. 악행을 저지른 그들뿐만 아니라, 그들과 조금이라도 관련된 자들까지 모두 묶어 비난하고 조롱하는 사람들. 나는 그런 사람들이야말로 악행을 저지른 사람들보다 훨씬 더 사회에 악영향을 미치는 사람들이라 생각한다. 악마를 조롱하는 무수히 많은 악마들이 늘어나고 있다.






다시 한번 말하지만 나는 범죄나 잘못된 행동에 대한 비판 그 자체를 부정하는 게 아니다. 근거 없는 추측, 아무런 연관 없는 사람을 향한 이유 없는 분노를 부정하는 것이다. 책임지지 않는 한 마디의 말로 스스로 정의로운 사람이라는 걸 내세우기에 급급한 이들이 점점 더 많아지는 듯하다. 그 사람에 대해 알려고 하기보다 그 사람이 저지른 결과만을 보고, 그 사람과 그 사람의 삶 자체를 결론짓는 것이다. 그 사람의 말을 듣고, 충분한 대화를 한 이후에 그 사람에 대한 판단을 내려도 늦지 않을 수도 있는데 말이다.



많은 사람들이 대화가 잘 통하는 사람을 원하지만, 정작 그들 중에서 대화를 할 준비가 되어 있는 사람들은 그리 많지 않은 듯하다. 사랑하고 싶다고 말하는 사람은 정말 많지만, 그들이 말하는 '사랑'이란 자신이 무언가를 주기보단 자신이 받는 것에만 치중되어 있는 경우가 많았다. 혼자만의 시간이 중요하다고 말하는 사람들 중 정말로 혼자 있는 시간이 필요한 사람보다는, 사람과의 관계에서 상처받고 싶지 않아서 차라리 혼자 있는 걸 선택하는 사람들이 대다수였다.



비난을 위한 비난은 사회 구성원 모두에게 악영향을 미친다. 분노를 터뜨리고 싶지만 어디에 그 분노를 배출해야 할지 갈피를 잡지 못한 사람들에게, 그러한 행동은 아주 좋은 먹잇감이다. 많은 이들이 비난을 퍼붓는 이유에 대해 입을 모아 말한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그 사람은 자기가 잘못한 걸 몰라!" 하지만 그 말을 하는 사람들 또한 비난을 받게 되면, 그들이 욕하는 사람들과 똑같은 반응을 보일 건 뻔하다. 비난은 결코 사람을 깨우치지 못한다. 정말로 상대를 원한 것이라면 비난이 아닌, 조언을 해주어야 할 것이다. 당신은 어떤가. 실수한 상대에게 비난을 해왔는가, 조언을 해왔는가. 안 그래도 각박하고 살기 힘든 요즘, 타인을 향한 이유 없는 비난을 내뱉기 전 스스로는 어떻게 살고 있는지 객관적인 판단을 내려보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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