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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Quat Aug 21. 2023

할 말은 합시다. 아니, 그렇게는 말고요


최근 들어 당신은 그런 생각을 한 적 있는가. "진짜 이 말은 내가 꼭 했어야 하는데!"라는 생각 말이다. 타인과의 관계에서 항상 고민되는 것 중 하나는, '표현'이 아닐까 싶다. 수없이 머릿속을 맴돌고, 턱 끝까지 차오르는 그 말을 어떤 식으로 해야 하는 것인가. 이 말을 해도 될까. 만약 한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이 말을 했을 때 상대방과 관계가 틀어지진 않을까. 확실한 건 아쉬울 것이 적은 사람일수록, 거침없이 말을 내뱉는다는 것이다. 오늘은 "표현을 하기 전과 후, 해보면 좋은 생각들"에 대해 말해보려 한다.






이 글을 읽는 당신을 포함해, 당신의 주변에도 그런 사람이 한 명쯤은 있을 것이다. 순간적으로 느끼는 자신의 감정과 생각들을 거침없이 표현하는 사람들. "좋아", "싫어", "그건 별로", "굳이?" 특정한 상황 속에서 자신을 숨기기보단 드러내는 걸 편하게 느끼는 사람들이 있다.



한 가지 흥미로운 건, 똑같이 자신을 드러내는데도 그걸 듣는 상대방의 반응이 제각기 다를 때가 있다는 것이다. 그들 모두 자신의 생각을 솔직하게 표현한다는 점은 똑같은데 한쪽은 사람들이 좋아하는 반면, 다른 쪽의 사람과는 서서히 거리를 두기도 한다. 이것은 반대도 마찬가지다. 흔히 배려심이 많으면 좋다고 생각한다. 그렇지만 누구보다 상대방의 말을 열심히 듣고 맞장구를 쳐주는 사람인데 왠지 그 사람과 같이 있으면 불편하다고 느껴지는 순간을, 당신도 살면서 한 번쯤은 느껴본 적이 있을지도 모르겠다.



똑같이 표현을 하는데도 누구는 사랑받는 반면, 또 다른 누군가는 사랑받지 못한다. 그보다 한술 더 떠 '차라리 그냥 가만히 있으면 절반이라도 갈 텐데'라는 생각을 하게 만드는 이도 존재한다. 도대체 어떤 점들이 그들을 전혀 다른 사람처럼 보이게 만드는 것일까.


 




표현의 근거가 충분히 납득 가능한 것인가


요즘처럼 개인의 특성이 존중받아야 마땅한 것으로 여겨지는 시대도 없는 듯하다. 아마 앞으로 더하면 더했지, 덜하진 않을 듯하다. 하지만 우리는 이미 알고 있다. 모두의 생각을 존중하려고 노력은 하지만, 사실 속으로는 '왜 저렇게 생각하지'라며 쉽게 납득하지 못하는 자기 자신을 말이다.



사실 이것은 어찌 보면 당연한 것이다. '집단 지성'이라는 말처럼, 특정한 사회에 속한 대다수의 구성원들은 자라면서 보고 듣는 것들이 비슷한 편이다. 그렇기에 우리는 우리가 알고 있는 상식 밖에 근거를 두고 펼치는 의견들에 대해 결코 쉽게 공감할 수 없다. 물론 대부분의 사람들이 하는 말이 꼭 맞으리란 법은 없다. 중세 유럽의 마녀사냥이 가장 대표적인 예시라 할 수 있겠다. 지금이야 그 당시에 마녀를 판가름하는 방법을 보면 어처구니가 없지만, 그땐 모두가 그것을 '올바르다'라고 믿었기에 그것이 마치 법처럼 여겨졌던 것이다.



만약 요즘 같은 시대에 이와 비슷한 말을 하는 사람을 본다면 어떤 생각이 들까. 누군가는 그를 향해 날 선 비판을 쏟아낼 것이고, 누군가는 매우 안타까운 표정으로 그 사람을 쳐다볼 것이다. 표현하는 방식은 전혀 다르지만, 담긴 의미는 동일하다. 바로 '공감할 수 없다'라는 의미이다.



표현을 잘하고 못하는 것보다 더욱 중요한 건, 그러한 표현의 근거를 얼마나 상대방이 쉽게 납득할 수 있냐는 데에 달려 있다. '눈썹 같은 초승달'이나 '보름달처럼 둥근 얼굴'이라고 말했을 때 우리가 바로 이해할 수 있는 이유는, 왜 그런 표현을 하는지에 대한 근거가 알기 쉽기 때문이다. 초승달은 눈썹과, 보름달과 둥근 얼굴은 유사한 형태를 지니고 있기에, 우리는 그러한 비유를 굳이 설명하지 않아도 바로 알아들을 수 있다.


 




하지만 만약 누군가가 초승달을 보고 "시계"가 떠오른다고 답했다고 해보자. 아마 이 문장을 본 당신의 머릿속엔 바로 물음표가 떠오를 것이다. '초승달과 시계가 무슨 상관이 있는데?' 당신은 그 사람에게 왜 초승달을 보고 시계가 떠올렸냐고 묻는다. 그러자 상대는 다음과 같이 대답한다. "어제저녁에 퇴근하고 눈썹 정리를 했거든. 초승달이 눈썹이랑 닮았잖아. 그런데 내가 눈썹 다듬는 칼을 항상 놔두는 곳이 바로 탁상시계 옆이라서 문득 시계가 떠오르더라고." 당신이 평소 착하다는 소리를 종종 듣는 편이라면 "아, 그렇구나"라고 반응할 것이고, '할 말은 하네'란 말을 듣는다면 '뭔 소리야'란 표정을 지으며 상대를 쳐다볼 확률이 훨씬 높을 것이다.



당신은 왜 상대의 말에 공감하지 못했을까. 바로 상대가 표현하는 말의 근거가 '지극히 개인적인 사유'에 있었기 때문이다. 이런 이유로 인해 우리는 타인과 대화를 할 때, 상대가 하는 표현의 뿌리에 쉽게 공감하기 힘들수록 그와 함께 있는 시간이 힘들어질 수밖에 없는 것이다. 상대가 하는 말에 대해 한 번 더 머리를 굴려야 하고, 이해가 되지 않으면 물어봐야 하며, 물어보더라도 왜 그렇게 생각하는지 좀처럼 알 수 없다. 즉, 굳이 쓰지 않아도 되는 에너지를 훨씬 더 많이 써야 평범한 대화가 가능해지는 것이다.






독특한 것도 어느 정도의 선이 있다. 그것을 넘어서면 점점 상대를 이해할 수 없게 되고, 그러한 시간이 지속되면 왠지 모를 불편한 감정들이 자꾸 느껴지는 것이다. 하지만 사람은 누구나 자기만의 감성을 가지고 태어나며, 자신만의 표현 방식으로 그것을 표출한다. 그렇기에 모두와 잘 소통하는 것이 아주 힘들 수밖에 없는 것이 사실이다.



표현을 잘하는데도 사람들과 쉽게 친해지지 못하는 사람들의 특징 또한 여기에 있다. 자신만의 감정을 가지고 자신이 편한 방식으로만 여러 사람과 소통하려 하는 것이다. 스스로가 독특하다는 것, 자신의 생각이 일반적이지 않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은 채, 마치 '네가 이상하네'라는 식으로만 밀어붙이는 사람들. 아무리 말을 많이 하더라도 그 사람이 하는 말이 재미없는 이유가 바로 이것이다.






생각의 근거를 설명해 주어라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대화를 해야 할까. 방법은 간단하다. 왜 자신이 그렇게 생각하는지, 그것을 타인이 납득할 수 있게 풀어서 설명해 주면 될 뿐이다. 매우 간단하지 않은가? 그런데 의외로 많은 이들이 이것을 하려고 하지 않는다. 어떠한 말을 할 때 대부분의 사람들이 가지는 공통적인 특징 중 하나는 '당연히 이렇게 되어야지'라는 전제를 갖고 대화를 시작한다는 것이다.



가장 대표적인 것이 '사랑'이다. 사랑에 대해 사람들은 저마다의 정의를 갖고 연애를 시작한다. 사랑하니까 함께 있는 시간이 많아야 한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는 반면, 사랑하기에 서로 믿어주고 혼자 있는 시간 또한 존중해주어야 한다고 믿는 사람도 있다. 이처럼 각자가 믿는 가치의 정의가 다르고, 그것이 자신에겐 옳은 것이기에 많은 이들이 잘못된 대화를 하고 서로에게 상처를 주는 경우가 많아지게 된다.



개인적으로 생각하는 좋은 대화란, 자신의 생각을 말하는 동시에 생각의 근거 또한 설명해 주는 것이 오고 가는 과정이라고 생각한다. 무작정 왜 그렇게 했냐고 따지는 게 아니라, 자신이 왜 화났는지에 대한 이유를 상대에게 설명해 준 다음 상대가 그렇게 행동한 이유를 묻는 것 말이다. 많은 사람들이 상대가 자신에게 친절하길 바라면서도, 정작 자신이 상대에게 바라는 모습을 자신이 하는지에 대허서는 깊게 생각하지 않는다.






할 말은 하고 살아야 한다. 제멋대로 하진 않고서 말이다. 상대에게 바라는 게 있다면, 정확하게 말해줄수록 상대 또한 의도를 파악하기가 쉬워진다. '알아서 좀 해봐', '좀 센스 있게', '그냥 이렇게 하면 되잖아'라는 말은 오로지 자기 자신에게만 중심을 둔 채 하는 말에 지나지 않는다. 그렇게 두루뭉술하고 애매모호한 말을 찰떡같이 알아듣는 사람이 과연 세상에 얼마나 있을까.



'개떡같이' 말해도 '찰떡같이' 알아듣는 사람을 바라기보다, 그냥 본인이 알아듣기 쉽게 말해주면 서로가 편해진다. 사람은 본능적으로 자신이 가장 편한 방식으로 편하게 생각하는 사람을 대한다는 것을 기억해야 한다. 즉, 자신이 가깝다고 생각하는 사람과 만나면 만날수록 되려 그 사람과 관계가 틀어지고 멀어진다면 자신의 방식에 문제가 있다는 것이다. 충분히 납득가능한 근거에 뿌리를 두고, 상대방이 이해할 수 있도록 설명해 주는 것.



마땅히 그래야 한다고 믿고 있는 것들이 사실은 그렇지 않다고 느껴지는 순간, 사람은 크게 두 갈래로 나뉜다. 자신은 그대로인 채 상대를 바꾸려고 하거나, 그게 아니라면 스스로를 바꾸려고 한다. 어느 쪽을 선택하든 그것은 당신의 선택이지만, 확실한 한 가지는 존재한다. 인생을 살다 보면 때로 자신의 믿음과 전혀 상반되는 상황에 처하게 되고, 그럴 때마다 자신이 아닌 상대와 상황을 자신에게 맞춰 선택할 수는 없다는 것 말이다. 무엇을 하든 쓸 수 있는 패가 많다는 건 큰 장점이다. 하나밖에 못하는 것과, 둘 중 하나를 골라 선택할 수 있다는 건 아주 큰 차이이다. 힘든 상황에서 당신의 선택지가 한 가지보다는 많길 바라며, 이만 글을 마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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