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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Quat Sep 19. 2023

파도에 배가 흔들리는 것이, 배의 잘못은 아니지 않은가


살다 보면 예기치 않은 시련과 맞닥뜨릴 때가 있다. 그럴 때면 별의별 생각들이 머릿속에 떠오르기 마련이다. 누군가를 원망하기도 하지만, 스스로를 원망하기도 한다. 생각이 많아질 때 당신은 어떤 생각을 하며 살아가는가. 오늘은 "힘든 순간이 닥쳤을 때 가지면 좋은 마음가짐"에 대해 말해보려 한다.






요즘 들어 생각이 부쩍 많아짐을 느낀다. 앞으로 어떻게 살아야 할지, 누구와 어떤 관계를 맺으며 살아갈지에 대한 고민을 하다 보면 어느새 시간이 훌쩍 지나가 있다. 좋은 사람들을 곁에 두고, 하고 싶은 것이 명확하게 정해져 있음에도 이런 고민을 하는 걸 보면, 살아간다는 건 무엇 하나 쉬운 게 없다는 당연한 사실을 다시 한번 되뇌게 된다.



30대 중반이 될 때까지 삶을 돌이켜보면 내 삶은 그다지 좋지도, 나쁘지도 않았다. 좀 더 정확히 말하면 좋을 때도 있었고 나쁠 때도 있었기에, 평균을 따져보면 무난한 인생이라는 생각이 든다. 하지만 '평균'이라는 건 항상 치명적인 단점 하나를 감추고 있다. 바로 '매우 좋지 않음'을 '매우 좋음'으로 얼추 눈가림할 수 있다는 것이다.



수학점수가 0점이어도, 국어를 100점 맞으면 평균은 50점이 된다. 평균이 '50점'이라는 것에만 초점을 맞추면 다른 사람들은 "저 사람은 국어나 수학 둘 다 50점 정도인가 보네"란 생각을 할 것이다. 그게 아니라면 "수학은 잘하는데 국어를 잘 못하는 건가"라는 오해를 살 수도 있다. 이처럼 평균이란 건 어느 한쪽을 올려치거나, 반대로 내려치게 생각하게끔 만든다.






삶의 평균이 무난하다고 해서, 언제나 평탄한 삶을 살았다곤 볼 수 없다. 수학을 '0점' 맞은 사람이 순식간에 '50점인 사람'처럼 둔갑하듯이, 현재 누군가의 일상이 부럽고 멋지다고 해서 그 사람이 지금껏 그러한 삶을 살았다고 볼 수는 없는 것이다. 반대로도 마찬가지다. 수십 억의 자산가가 한순간의 사기와 투자 실패로 거지와 다름없는 삶을 살고 있다는 기사를 심심찮게 볼 수 있다.



어느 정도 굴곡 있는 인생을 살면서 배운 것 중 하나는 "현재 누군가의 모습으로 그 사람의 전부를 판단하지 말아야 한다"는 사실이다. 과거가 쌓여 현재를 이룬다는 것도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지만, 그렇다고 해서 현재의 모습으로 타인의 과거를 넘겨짚는 것도 관계에 있어서 위험할 수 있다.



그렇기에 나는 누군가의 말보단, 그 사람이 하는 행동을 믿는 편이다. 비록 현재는 볼품없고 다소 낮은 위치에 있어도 성실하게 매일을 살아가는 사람이 좋다. 반면 나보다 훨씬 부유하고 멋진 차를 모는 사람이라 해도 사람을 무시하는 투로 말하거나, 무례한 행동을 자주 일삼는 사람과는 거리를 두는 편이다. 생각해 보면 내 곁엔 종종 그런 이들이 있었다. 내가 무얼 해주지 않아도 자신이 가진 것들을 자랑하거나 으스대는 동시에, 그것들로 하여금 나를 곁에 붙잡아두려 했던 사람들이.


 




몇 번 그들과 교류하면서 나 또한 그들이 부러웠던 적이 있었다. 그들이 소유한 것, 이룬 것, 앞으로 더욱 빛날 미래의 어느 순간에 나의 일상을 끼워둘 수 있을까란 생각을 하기도 했다. 하지만 우리가 누군가에게 아무 이유 없이 끌리듯이, 나의 의지와는 무관하게 내 정신과 몸은 그들과 점점 멀어지고 있었다. 찰나라 하기에도 아주 짧은 순간 그들이 하던 말과 행동들은, 그보다 훨씬 나의 뇌리에 깊게 각인되었다. 그것이 그들과 멀어졌던 이유의 전부였다.



시간이 조금 더 흘러, 그들과 나의 처지를 비교하며 비관에 빠진 적도 있었다. 내가 별로라 생각했던 이들은 여전히 잘 살고 있는 반면에, 내 처지는 스스로 보기에도 한심했던 나날들이 이어졌다. 그러자 온갖 생각들이 머릿속에 엉켜 쉬이 풀리지 않았다. '어쩌면 나의 눈이 틀렸던 건 아닐까' '그들이 옳고, 내가 지금까지 잘못 살아왔던 건 아닐까' 날씨가 화창한 날에도 내 주변은 온통 먹구름만이 가득했던 날들이 있었다. 하지만 이제는 안다. 그런 순간은 누구에게나 갑작스레 찾아온다는 걸. 그 시기가 힘든 건 '언제 그 시기가 지나갈지 모르기 때문'이라는 걸. 그리고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조금씩 구름들이 걷히면, 그 어느 때보다 밝은 빛이 찬란하게 나아갈 길을 비춰주고 있다는 것을 말이다.






나의 주관을 굳게 믿고 그것을 관철시키며 산다고 해서, 꼭 성공한 삶을 살 수 있는 순간이 오진 않는다. 최악의 상황을 상정하고 그것에 철저히 대비한다고 한들, 그런 상황이 항상 우리를 비껴나간다는 보장이 어디에 있는가. 그런데도 우리는 결과가 좋지 않으면, 그러한 결과를 예측하지 못한 자신을 자책하고 비난한다. 마치 우리 자신이 이 세상 모든 것을 알고 대비할 수 있는 전지전능한 존재라도 된 것처럼 말이다.



장마철임에도 미리 일기예보를 확인하지 않은 채, 밖에 나갔다가 쫄딱 비를 맞은 건 그 사람의 잘못이다. 하지만 비가 내리지 않았으며, 일기예보에도 비소식이 없어서 우산을 챙기지 않았다가 갑자기 내린 소나기로 인해 옷이 젖은 걸, 그 사람의 잘못이라 말할 수 있을까? 인생이 계획대로 흘러간다면 가장 좋겠지만, 모두가 알고 있듯이 그렇지 않기 때문에 우리는 어떤 선택 이후에 스트레스를 받기도 한다. 그럴 때면 나는 스스로를 '출항한 배'라고 생각하곤 한다.



바다와 인생의 공통점은 '예측할 수 없다는 것'이다. 잔잔하기만 하던 바다의 하늘이 어느 순간 흐려지고 폭풍우가 불어닥칠 때, 이를 두려워하는 사람들의 머릿속엔 '내가 오늘 왜 이곳에 왔을까'란 생각이 맴돌 것이다. 예상할 수 있는 대부분의 것들을 대비했음에도 문제가 터진다면, 그것은 애초부터 자신이 감당할 수 있었던 게 아니라는 것과 같다.



그렇기에 그런 상황 속에서 우리가 해야 할 것은 '후회'가 아니라, 그 상황을 벗어나기 위한 '방법'을 고민하고 행동으로 옮기는 것이다. 배에 구멍이 나 안으로 물이 들이치는 순간, 우리가 살기 위해 해야 하는 행동은

'오지 말걸'이라며 후회와 자책이 섞인 부정적인 사고가 아님. 생각을 멈추고 물을 퍼내든, 구명조끼를 찾아서 입든, 근처 배에 구조신호를 보내야 조금이라도 살 수 있는 확률이 높아지는 것이다.






모든 걸 대비한다는 건 불가능한 것이다. 어느 정도 대비를 했음에도 대처를 할 수 없다는 것에 지나치게 휘둘리지 않는 마음가짐이 필요하다. 그 정도의 대비를 하지 않았다면 더욱 힘들 수도 있었겠다는 감사의 마음을

가지는 동시에, 그 상황을 가장 빠르게 벗어나는데 집중해야 한다.



파도에 배가 흔들리는 게 배의 잘못은 아니다. 배가 흔들리고 좌초될 것 같은 상황에서 몰아치는 파도를 원망한들 무엇이 달라지겠는가. 파도를 원망하지도, 그 배를 탄 자신의 선택을 자책하지도 말라. 그 순간 당신이 할 수 있는 것에만 집중한 채 하나씩 행동한다면, 그날 또한 언젠가 당신의 무용담 중 하나가 될 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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