타인에게 맞춰주면서 살다 보니 미처 자신을 챙기지 못했다며 후회하는 사람들이 많아지는 듯하다. 모두가 자신이 희생하고 있다지만, 정작 그 누구도 배려받고 있지 못하다는 것. 참으로 이상한 일이 아닐 수 없다. 물론 그렇게 말하는 사람들 중에서 정말 배려심 깊은 사람들도 있다. 하지만 그들 중 대다수는 예전에도 그다지 타인을 배려하지 않은 경우가 훨씬 더 많았다. 예나 지금이나 여전히 자신을 가장 소중하게 생각하는데도, '부족하다'며 더욱 자신의 몫을 챙기려 든다는 것이다.
자기주장을 곧잘 하고 스스로를 위해 시간과 에너지를 많이 쏟고 있는 이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자신이 남들에게 많이 양보하며 살고 있다'라고 생각하는 이들이 있다. 그들은 결코 타인에게 양보하는 게 아니다. 오히려 그들은 그 누구보다 자신이 하고 싶은 대로 하며 살고 있다. 그런데도 자신의 몫이 적다고 아우성치고 있다. 자신이 남들보다 더 많은 희생을 하고 있다며 떼쓴다. 도대체 왜 그런 것일까.
하루를 쉼 없이 움직인다고 해서, 꼭 그 하루가 알차다고 볼 순 없다. 책상 앞에 책을 펼쳐 놓고 10시간을 앉아있다고 한들, 책의 내용이 알아서 머릿속에 들어오진 않는다. 타인을 위해 자신이 소중하게 생각하는 것을 내어준다고 해서, 상대가 반드시 그것을 기뻐하리란 보장이 어디 있는가. 본질은 뒤로 한 채 스스로 무언가를 한다는 것에 심취하면 할수록, 목표는 점점 더 멀어지는데 자신이 거기에 가까워졌다고 착각하게 된다.
자신이 무언가를 정말로 잘한다면, 그러한 사실을 주변에서 먼저 알아주고 말해줄 것이다. 배려 또한 다르지 않다. 자신이 먼저 "나는 이렇게 잘해주는데 사람들이 몰라줘"라고 말하지 않아도, 주변 사람들이 알아서 "넌 남들 좀 그만 챙기고 네 것부터 챙겨"라고 입을 모아 말할 것이다. 당신이 스스로를 바라보는 것처럼 다정하고 배려심이 많은 사람이라면, 굳이 입 아프게 남들 앞에서 자신이 '다정한 사람'이라 칭하기 전 남들이 먼저 당신을 '다정한 사람'이라 부를 것이다.
자기 객관화란 어렵다. 곁에 있는 한 두 사람의 말만으로 자신을 이렇다, 저렇다 정의할 수 있다고 믿는가? 만약 당신이 듣고 싶은 말만 해주는 사람들로 곁을 가득 채운다면, 당신은 스스로 어떤 사람인지 영원히 알 수 없을 것이다. 물론 집단지성이 늘 옳지만은 않다. 그러나 대다수의 사람들이 같은 얘기를 한다면, 그것은 나름대로 그럴만한 이유가 있다는 것과 같다. 곁에 머무는 다수의 말을 경청은 하되 휘둘리지 않는 것. 한두 사람의 의견으로 많은 이들이 자신에게 건네는 목소리를 외면하지 않는 것. 내가 나를 알기 위해 가장 힘써야 하는 2가지가 아닐까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