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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Quat Dec 29. 2023

"자기 팔자 자기가 꼬는 사람들"의 전형적인 특징


'지팔지꼰'이란 말을 들어본 적 있는가? "자기 팔자는 자기가 꼰다"라는 문장의 줄임말이다. 30대 중반이 되어서야, 나는 비로소 이 말의 진정한 의미를 느끼고 있는 중이다. 불과 몇 년 전만 해도 서로 비슷한 처지였던 사람들이 어느새 나보다 훨씬 앞으로 나아가고 있거나, 아니면 무얼 하는지 연락조차 잘 되지 않는 걸 보면 말이다. 오늘은 "30대 중반이 되고서 느낀 '지팔지꼰'에 담긴 의미"에 대해 말해보려 한다.






모두가 행복한 삶을 살길 원한다. 그러나 시간이 갈수록 전보다 더 못한 삶을 사는 사람들이 부지기수다. 세상을 원망하고, 부모를 탓하며, 곁에 있는 연인 또는 친구에게 입에 담지 못할 험한 말을 너무도 쉽게 뱉는 이들이 있다.



찬란했던 시절이 있었던 사람일수록, 한번 무너지기 시작하면 걷잡을 수 없이 추락하곤 한다. 시간이 지날수록 빛났던 자신의 과거와, 빛바랜 현재를 비교하는데 많은 시간을 쏟기 때문이다. 어떤 실수를 하든 빠르게 수습할수록, 원상태로 돌아가는 시간 또한 빨라진다. 하지만 실수를 수습해야 할 시간에 누구의 잘잘못을 따지려 들거나, 과거에 사로잡혀 시간만 축낸다면 어떨까? 부정적인 결과는 부정적인 감정을 낳는다. 부정적인 감정은 또다시 부정적인 결과로 이어진다. 결국 이러한 악숙환의 굴레에서 자기 자신의 강한 의지나 조력자의 도움 없인 벗어나기 힘들어지는 것이다.


 




몇 년 전만 해도 힘든 시기를 보내는 사람과 대화를 할 때, 그들이 하는 얘기들 전부가 '그럴듯한 근거가 있다고 믿은' 시절이 있었다. 어려운 가정환경, 없으니만 못한 부모님의 존재, 불우했던 학창 시절, 누군가로부터 받은 심한 상처들. 앞서 언급한 것들은 분명 한 사람에게 씻을 수 없는 트라우마를 남길 수 있다. 그것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하지만 그러한 사유만으로 누군가의 삶이 끝까지 좋지 못한 상태로 유지되는 건 아니었다. 변변한 집 한 채 없이 컨테이너에서 유년시절을 보낸 아이가, 어른이 된 후 수백 평의 집에 살기도 한다. 학교폭력으로 인해 불우한 사춘기를 보냈던 아이가 커서, 수백만 명이 보는 프로그램에 출연해 자신과 비슷한 처지에 있는 어린아이들에게 용기를 불어넣는 일도 있다. 똑같이 힘든 상황에서 누군가는 그것을 극복하고, 누군가는 여전히 거기에 머물러 있다. 무엇이 다른 것일까.






나는 자신의 삶을 완전히 다르게 바꿔놓을 수 있는 건, 오로지 '자기 자신의 선택과 마음가짐'에 달려 있다고 믿는다. 여기서 '지팔지꼰', 즉 자신의 팔자를 꼬는 건 다름 아닌 자기 자신이라는 말과 연결되는 것이다.



'지팔지꼰에 속하는 사람들'은 제각각 다른 힘든 상황에 처해있지만, 그들 모두 한 가지 공통점을 가지고 있었다. 그건 바로 "말을 험하게 한다는 것"이었다. 말을 험하게 한다는 건, 단지 욕설을 하는 게 아니다. 자신이 기분이 나쁘면, 상대와 상황에 대한 고려 없이 '남 탓'을 하거나 '원색적인 비난'을 한다는 걸 의미한다.



누구나 기분이 좋지 않거나, 처한 상황이 부정적일 땐 평소와 달리 날카로워진다. 하지만 나는 이런 상태에서 자신의 감정을 얼마나 컨트롤할 수 있는지가, 성숙한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을 나눈다고 생각한다. 자기 머릿속에 있는 원초적이고 날 것 그대로인 감정과 생각을, 기분이 좋지 않을 때도 정제해서 표현할 수 있는 사람. 그런 사람이야말로 정말로 성숙하고 타인을 배려하는 사람인 것이다.


 




여기까지만 들으면 '그렇게 할 수 있는 사람이 얼마나 있겠는가'란 생각이 들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나를 포함해, 이 글을 읽는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미 그것을 하고 있다. 아니라고 생각하는가? 만약 당신이 유독 기분이 좋지 않은 날, 길을 걷다 돌부리에 걸려 넘어질 뻔했다고 해보자. 대부분은 아마 그러한 상황에 화를 낼 것이다. 죽일 듯이 튀어나온 돌을 노려보거나, 혼잣말로 욕을 하며 다시 가던 길을 갈 것이다. 하지만 일부 사람들은 다른 사람들이 다 들릴 정도로 고래고래 욕설을 하거나, 자신의 분노를 모두가 느낄 수 있게 표출하는 행동을 하기도 한다. 자신의 본능을 제대로 억제하지 못하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지팔지꼰'의 전형적인 특징이다. 자신의 부정적인 감정을 어떻게 해서든 그것을 유발한 상대에게 전이시키려 들거나, 주변 사람들이 알아주길 바라는 마음에 말 또는 행동으로 드러내는 것이다. 자신이 느낀 불쾌한 감정을 삭일 수 있는 그릇의 크기가 너무 작다 보니, 조금만 화가 나거나 예민해져도 주변 사람들 모두가 그 감정을 느낄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러한 이들 곁에 머무는 사람들은 어쩔 수 없이 그들의 심기를 건드리지 않기 위해 행동한다. 하지만 그들이 몸을 사리는 이유는 '지팔지꼰 유형에 속한 사람들'이 두려워서가 아니라, 건드려봤자 좋을 게 없다는 생각 때문이다. 기회만 된다면 멀리하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지만, 그러한 상황이 아니라면 '굳이' 그들을 성가시게 해서 나까지 불쾌해질 필요가 없다는 마음이라는 것이다. '지팔지꼰'은 이것을 전혀 다르게 받아들인다. 남들이 자신 앞에서 조심하는 걸 보며, 다른 사람들에게 자신이 지대한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다고 믿는 것이다. 얼마나 유치하고 어린애 같은 생각이란 말인가!


  




그렇기에 시간이 지날수록, 그들의 곁에 머무는 사람들은 하나둘씩 줄어든다. 자신의 감정에 따라 똑같은 상황에서도 전혀 다른 행동을 보이는 사람들을 누가 좋아하겠는가? 30대가 된 이후부터는 문제는 더 심각해진다. 20대 땐 그나마 연인이나 친한 친구들이 조언을 해주지만, 30대부터는 그러한 말조차 해주지 않는다. '어차피 쟤는 말해봤자 안돼' '나 살기도 바쁜데 누굴 챙겨' '이 정도 됐으면 제 앞가림은 자기가 해야지' 주변에 '지팔지꼰' 유형인 친구가 있거나 그런 사람과 자주 부딪힌 경험이 있는 30대라면, 분명 이 생각을 한 번 이상 해봤으리라.



자신의 생각을 말하는 건 중요하다. 하지만 듣는 사람에 대한 배려 없이 무작정 자신이 내킬 때, 내키는 방식으로만 말하는 건 결코 옳지 못하다. 자신이 알고 있는 내용에 대해 한 번 더 누군가 알려준다면 감사의 인사를 표하면 될 뿐이지, '이미 나도 알고 있어'라는 식으로 받아치면 누가 그런 사람과 대화하고 싶어 하겠는가? 정말로 성숙한 사람이라면 자신의 말에 담긴 의미뿐만 아니라, 자신의 말이 상대에게 어떻게 들릴 수 있을지까지 한 번 더 생각하고 말한다는 걸 잊지 않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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