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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Quat Jan 14. 2024

"목숨은 하나지만, 인생은 길다"라고 누군가 말했다


지금 이 순간에도 목표했던 무언가를 이루기 위해 간절하게 살아가는 사람들이 있을 것이다. 좋은 학교, 누구나 들어가고 싶어 하는 회사, 멋진 차와 넓은 집, 사랑하는 사람. 목표가 있든 없든 삶은 그 자체로 의미가 있지만, 뚜렷한 목표를 가지고 살아가는 사람은 힘든 상황에서도 바로 포기하기보다 좀 더 오랫동안 견딜 수 있다. 자신이 원하던 것을 얻었을 때의 행복과 쾌감을 상상하며, 지금의 힘듦을 기꺼이 받아들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현재 자신이 걷는 길이, 원하던 목표와 조금 다른 길이라면 어떨까. 오늘은 "목숨은 하나지만 인생은 길다는 것"에 대해 말해보려 한다.


 




최근 유튜브에서 한 영상을 보았다. 굵직한 목소리를 가진 중년의 남성이 기타를 치며 노래를 부르는 영상이었다. 평소 즐겨 듣는 장르의 노래가 아니었음에도 몇 번이나 다시 영상을 돌려보았다. 그분의 노래는 취향과 스타일로는 감히 설명할 수 없는 것이었다. 그야말로 자신의 인생을 그 한 곡에 담아낸 듯했다. 노래를 잘 모르는 나조차도 느껴질 정도로 대단한 한 곡이었다. 경연 프로그램에 출연했음에도 그분의 목표는 '우승'이 아니었다. '온전한 한 곡을 들려드리는 것'.






노래보다 더 인상적이었던 건, 노래를 하기 전 간단하게 자신의 소개를 하는 과정이었다. 자신이 어떤 가수인지 짤막하게 설명하는 문장에서 그는 스스로를 '오히려 좋은 가수'라고 말했다. 진행자가 그렇게 생각하는 이유에 대해 묻자, 그는 자신이 사고를 당해 성대결절이 왔고 3개월 후에야 목소리가 나왔지만 원래 목소리와는 달랐다고 말했다. 가수라는 직업의 특성상 엄청난 좌절감이 밀려왔을법한 상황에서도, 되려 추구하는 음악과 오히려 잘 맞아서 좋았다고. 그런 의미로 그는 자신을 '오히려 좋은 가수'라 표현한 것이었다.



소개가 끝나고 연주를 준비하는 모습과 함께, 그의 굵직한 목소리가 내레이션으로 흘러나왔다. 목소리가 변했지만 자신은 별로 힘들지 않았다고. 노래를 못하면 기타를 치거나 곡을 써도 되지 않냐고. 또한 그는 다음과 같은 말을 덧붙였다. "다들 요즘 목숨을 걸고 음악을 하는 것 같아요. 우리는 목숨을 걸지 않습니다. 인생을 거는 거죠. 목숨은 하나지만, 인생은 기니까요." 그렇게 인생을 걸고, 전과는 전혀 다른 목소리로 한 곡을 부른 그는 모든 심사위원으로부터 극찬을 받으며 다음 라운드로 진출했다.






아마 여기까지 글을 읽는 사람들은 다음 이야기가 궁금할 것이다. "그래서 그 사람은 우승했어?" "적어도 최종 라운드까진 진출했겠지?" 드라마나 영화였다면 그는 모든 고난과 시련을 견디며 결국 오디션에서 우승을 거머쥐었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 모두가 알다시피 여긴 현실이다. 현실은 어떤 드라마나 영화보다도 잔혹하다. 스크린에서 우리가 '잔인하다'며 고개를 돌리거나 귀를 막는 장면보다, 현실은 훨씬 더 잔인하고 냉정하다. 그는 최종 라운드는커녕, 다른 지원자와의 '1대 1 배틀'에서 패배했다.



여기까지만 들으면 어떤가. 많은 이들이 살면서 한 번쯤 겪었거나 들어봤을 법한 그저 그런 에피소드들 중 하나라고 생각한 채, 다시 발걸음을 돌려 제 갈 길을 갈 것이다. 누군가는 '그럴 줄 알았다'라고 말할 것이고, 또 다른 누군가는 저런 사람이 우승하지 못한 오디션 프로그램의 구조 자체를 비난할 것이다. 어떤 사람은 그가 너무나 빨리 떨어져서, 더 이상 노래를 하지 않을까에 대해 걱정할 것이다. 하지만 결코 그런 일은 없을 것이다. 그는 목표로 했던 '온전한 한 곡'을 많은 사람들에게 들려주었다. 비록 오디션엔 탈락했지만, 그는 계속해서 노래를 부를 것이다. 목소리가 나오지 않더라도 음악을 할 것이다. 왜냐고? 그는 인생을 걸고 음악을 하는 사람이니까.






많은 사람들이 목표를 이루지 못하면, 좌절에 빠진다. 좌절하고 슬퍼하는 건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다. 나 또한 원했던 걸 얻지 못했을 땐 괴롭고 화나고 슬픈 감정을 느끼니까. 하지만 내가 걱정하는 건 사람들이 그러한 상실감을 "너무나 크게 받아들인다는 것"이다.



원하던 대학에 가지 못한 10대, 바라던 회사에 입사하지 못한 20대, 직장에서의 갑질 및 폭언을 견디지 못한 30대 이후의 사람들. 많은 이들이 이런 이유들로 안타까운 선택을 하는 횟수가 점점 더 잦아지는 듯하다. 매우 슬픈 일이다. 그들의 고통이 별 것 아니라는 말을 하고 싶은 게 결코 아니다. 우리의 인생에서 그러한 시간들이 과연 몇 퍼센트의 비중을 차지하고 있을까를 생각해 보면, 그들의 선택이 더욱 슬프고 안타깝게 느껴지는 것이다. 그들은 왜 그 선택에 목숨을 걸었던 것일까.



"아무리 노래를 잘한다고 한들 우승하지 못하면 무슨 의미가 있어?" 이렇게 말하는 이들조차도, 자신이 무언가를 실수하면 '살다 보면 그럴 수도 있지'라고 말한다. 스스로에겐 '과정의 의미와 중요성'을 강조하면서도 가까운 사람이나 타인에겐 '모든 건 결과가 말한다'라고 딱 잘라 말한다. 그러다 자신이 정말로 원했던 걸 얻지 못하면 슬퍼하며 타인에게서 위로와 공감을 바란다. 하지만 돌아오는 답변은 그보다 차가울 수 없다. "네가 좀 더 노력했어야지." "그 정도는 누구나 다 견디면서 살아." 그렇게 우리는 위로받고픈 누군가에게 '현실'이라는 이유로 상처를 더하고, 반대로 위로가 필요할 때 자신이 했던 것과 똑같은 이유로 상처를 받으며 살아간다.






당신은 어떤가. 지금 하고 있는 무언가에 목숨을 걸고 있는가. 아니면 인생을 걸고 있는가. 어쩌면 지금 당신이 몰두하고 있는 것이 목숨을 걸만큼 자신에게 있어 정말로 중요한 것일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그것을 해내지 못하면 당신은 쓸모없는 사람인가? 그것 말고는 아무것도 하지 못하는 사람인가? 만약 그렇게 생각한다면 왜 그렇게 생각하는지에 대해 생각해 본 적 있는가.



아마 이렇게 물어본다면, 대부분은 다음과 같이 말할 것이다. "그것 말곤 다른 걸 해본 적이 없으니까!" 그럼 해보면 되지 않은가. '해보지 않았다'는 막연한 두려움을 들어 자신이 가진 미지의 가능성을 아예 차단한다면, 당신은 오로지 그것만을 하기 위해 태어난 사람이라는 것과 다름없다. 그렇다면 그걸 정한 사람은 누구인가? 그 누구도 아닌, 당신이다. 누군가의 강요로 그것을 했다고 하더라도, 그것이 당신의 인생 전부이자 목표라고 정한 건 당신의 선택일 뿐이다. 그렇다면 그 선택을 바꾸는 것도 당신에게 달려 있지 않겠는가.



자신이 경험한 한 가지로 자신의 모든 가치를 판단하지 않았으면 한다. 설령 당신이 사랑하는 무언가를 잃더라도 말이다. 정말로 힘든 순간이 올 때면, 나는 다음과 같이 생각한다. "그럼에도 살아야 하지 않겠냐고." 너무 힘들면 견딜 기운조차 없을 때도 있다. 그럴 땐 아무 생각 없이 푹 쉬는 게 오히려 나을 수도 있다. 억지로 괜찮은 척 무리하다 보면, 정말로 앞으로 나아가야 하는 순간 고꾸라질지도 모른다. 그러니 내가 당신에게 말해주고픈 건 간단하다. 무언가에 목숨을 걸기보단, 인생을 걸어라. 무언가를 너무나 간절히 원할수록, 그것에 목매는 것보다 조금은 길게 보는 연습이 필요하다. 한 마디로 여유를 가져야 한다. 그렇게 한 걸음씩 계속 가다 보면 '온전한 당신만의 무언가'를 발견하게 될 것이다. 억지로 보여주기 위해 만들어진 것이 아닌, 당신을 잘 모르는 사람조차 느낄 수 있는 '당신만의 매력'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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