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끔 바다를 보고 싶을 때가 있다. 바쁜 일상에 지쳐서 쉬고 싶은 순간들 말이다. 시원한 바닷바람을 맞으며 넘실대는 파도를 보고 있으면 마음이 한결 편해짐을 느낀다.
가까이 서서 바다를 보고 있다 보면 사소한 해프닝이 벌어지기도 한다. 먼발치에서 밀려들어왔던 파도가 갑자기 훅 밀려들어와 애꿎은 신발을 덮치는 것이다. 발목에서 느껴지는 서늘함에 화들짝 놀라 재빨리 뒷걸음질 쳐도 이미 신발엔 파도의 손길이 휩쓸고 지나가 있다.
당혹스러움과 비난이 담긴 눈길로 다시 바다를 바라보지만, 이미 비웃듯이 저만치 사라져 버린 지 오래다. 그렇게 한번 깊숙이 밀려들어온 후엔, 다시 선을 지킨다. 몇 발자국이나 떨어진 곳까지만 밀려들어왔다 스르륵 다시 발을 뺀다. 아마 발을 젖게 만든 게 고의는 아닌 모양이다. 실수였다고 해도 자신의 잘못에 스스로 책임을 진다. 그런 파도를 어떻게 사랑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때때로 파도는 아주 성이 난다. 물론 그게 파도의 잘못만이라고 보긴 힘들다. 파도가 그토록 화가 난 이유는 대부분 여기저기서 불어닥치는 바람 때문이다. 바람은 언제, 어디서 불어닥칠지 모른다. 왼쪽에서, 오른쪽에서, 뒤에서, 앞에서 부는 바람에 파도는 이리저리 휘둘린다. 파도도 자신이 움직이고 싶은 곳으로 가고 싶을 것이다. 그러나 파도는 언제나 바람에 의해 움직인다.
바람은 대단한 변덕쟁이다. 어떨 땐 파도가 가고 싶은 곳으로 밀어주지만, 심술이 나서 아예 파도의 앞을 가로막기도 한다. 어떤 파도는 바람이 어디로 부는지 미리 예측해서 그곳으로 가려한다. 하지만 그건 불가능한 일이다. 왜냐하면 바람도 자신이 어디로 이동하는지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
성이 난 파도는 평소와는 아주 다르다. 평소엔 한껏 성난 듯 밀려들어와도 모래 한 움큼이나 바스러진 조개껍질들 몇 개만 가져가거나, 기껏해야 신발 정도만 젖게 할 뿐이다. 하지만 화가 나면 수천, 수만 움큼의 모래를 단 한 번으로 쓸어 담는다. 조개껍질보다 수십 배는 단단한 것들을 부수고, 가까이에 있는 모든 것들을 젖게 만든다. 그 누구도 화가 난 파도를 말릴 수 없다. 심지어 파도의 화를 돋운 바람조차도.
파도는 화가 난 동시에 울음을 터뜨린다. 자신의 분노와 서러움을 바람에 실어 사방으로 퍼뜨린다. 그럴 땐 잠자코 기다리는 게 상책이다. 잠잠해지면 부수고 젖게 만든 것들을 보며 미안해할 것이다. 지금까지 자신을 찾아온 수많은 이들의 고민을 담고 지낸다는 게 보통 쉬운 일인가. 그 나름대로 고통스러웠을 것이다. 괜히 다가갔다가 자기 때문에 상처를 받는다면, 잠잠해진 후 슬퍼할 게 뻔하다. 분노의 크기는 쌓아온 슬픔과 비례한다. 슬프지 않으면 분노하지도 않는다. 성난 파도를 보며 들리지도 않을 정도로 작게 중얼거린다. 그만큼 슬펐구나. 그만큼 아팠구나.
시간이 지나 다시 파도는 잠잠해진다. 하늘은 푸르고 바람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져 있다. 파도는 말이 없다. 언제 그랬냐는 듯 평소와 다름없이 일렁이고 있다. 천천히 걸어가 파도 앞에 쭈그리고 앉아 물속에 손을 살포시 넣는다. 처음엔 닭살이 돋을 정도로 차가웠지만 점차 그 온도에 익숙해진다.
그리고 이제, 파도의 고민을 듣는다. 제 고민만 한껏 던져놓고서 맘 편히 뒤돌아선 자들과 달리, 파도가 겪었을 고충에 처음으로 귀를 기울인다. 그동안 힘들었음을 알아달라는 듯, 손가락 사이에서 파도가 부드럽게 일렁이며 애교를 부린다. 알지, 알고 말고. 서러움을 토로하는 파도의 온도가 아까보다 더욱 따뜻해진다. 그렇게 나는 파도에게, 자신을 찾는 사람들 중 유일하게 고민을 들어주는 사람으로 기억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