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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Quat Jun 28. 2024

"난 이런 사람이야"라며 단정 짓지 마세요


누구나 바라는 이상적인 삶이 있기 마련이다. 건물주가 되어 사고 싶은 것, 먹고 싶은 것을 고를 때 가격을 고민하지 않는 삶. 사랑하는 사람과 행복한 일상을 보내며 평생 즐겁게 사는 삶. 현재 몸담고 있는 업에서 성공을 거두어 명예와 인정을 받는 삶.



그러나 모두가 그런 삶을 사는 건 아니다. 배달앱에서 먹고 싶은 음식을 장바구니에 담은 뒤 결제하기 전, '먹을까 말까' 몇 번을 망설이다 결국 대충 끼니를 때우고 잠에 들기도 한다. '이 사람은 정말로 내 인연이야'라고 생각한 사람과 역대급 최악의 이별을 맞이하기도 하고, 숱한 실패 끝에 자신에겐 이 길을 계속 걸을 만큼의 열정과 재능이 부족하다는 것을 깨닫고 큰 좌절을 하기도 한다.



영화나 드라마에선 그런 사건이 일어난 뒤, 주인공은 특정한 사건을 계기로 인생의 전환점을 맞이하지만 현실은 그렇지 않다. 비슷한 실패를 겪고 '다시는 그러지 않으리라' 다짐해도, 시간이 지나면 우리는 같은 실수를 반복한다. 비슷한 행동이 전과 크게 다르지 않은 결과로 이어진다는 걸 잘 알면서도 왜 이런 일들이 자꾸만 반복되는 것일까.






일상에서 불만족을 자주 느끼는 사람들에겐 공통적인 특징이 하나 있다면, 자신을 그 누구보다 자기가 잘 안다고 생각한다는 것이었다. "나는 내가 제일 잘 알아" 틀린 말은 아니다. 다만 이러한 생각에 지나치게 매몰되었을 때 발생하는 문제는, 본인이 자신의 한계를 설정해버리고 그것과 다른 시도는 아예 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예를 들어 좋은 사람을 만나 결혼하고 싶다고 말하는 사람들은 많다. 하지만 그들 중 대다수는 그러한 생각만 할 뿐, 이성을 만날 시도조차 하지 않는다. 이성을 만나려는 시도를 하더라도, 익숙한 방식으로만 만남을 시작하려고 한다. 내게 익숙한 방법으로, 익숙한 장소에서 좋아하는 사람을 찾으려고 한다. 그렇게 해서 연애를 시작할 확률이 얼마나 될까?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말라는 말은 아니지만, 적어도 원하는 게 있다면 그것을 얻기 위해 어색하고 불편한 방법도 활용해 볼 수는 있는 것 아닌가?


 




이처럼 우리는 알게 모르게 스스로 자신의 한계를 설정해 버린다. "나는 이런 건 안 맞아" "난 이런 건 잘 못해" "그건 내가 별로 좋아하는 게 아니야" 참으로 아이러니하지 않은가? 만약 누군가 당신에게 "너 이런 거 싫어하잖아" "넌 이런 건 잘 못해"라며 당신을 평가한다고 상상해 보면, 기분이 썩 좋지는 않을 것이다. 그런데 자신이 자신의 한계를 정하는 것에 대해서는 지극히 합당하고 논리적이며, 현실적이라고 생각한다. 누구보다 나를 잘 아는 사람이 바로 '나'라고 생각하는 것. 모든 건 거기서 출발하게 된다.



우리는 우리 자신에 대해 모든 걸 알지 못한다. 그저 '알고 있다'라고 믿을 뿐이다. 이것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건 거꾸로 말해, 내가 나를 잘 모른다는 걸 두려워한다는 것과 같다. 하지만 나는 '나에 대해 잘 모르는 부분이 있다'라는 건 너무나 당연한 사실이라고 생각한다. 그렇기에 우리는 태어나서 죽을 때까지 나라는 사람에 대해 끊임없이 고민하고 마주해야만 하는 것이다.






어쩌면 이 글을 읽는 당신 또한 스스로에 대해 가장 잘 안다고 생각할지도 모르겠다. 나는 그것을 결코 나쁘게 생각하지 않는다. 자기 객관화, 메타인지가 잘 된다는 건 인생에 큰 도움이 된다. 다만, 당신이 그러한 생각에 지나치게 빠져있지 않길 바랄 뿐이다. 이 세상에서 나를 가장 잘 아는 사람은 당연히 나일 수밖에 없다. 그와 동시에 우리가 생각해야 하는 건, '그렇지만 나조차 모르는 내가 있을지도 몰라'라는 것이다. 왜냐하면 우리는 살면서 수없이 멍청한 실수들을 저지르기 때문이다. 실수를 저질렀을 때 "내가 이런 실수를 저지른다고?"란 생각을 자주 한다면, 그건 당신이 생각하는 것만큼 당신이 완벽하지 않다는 걸 보여준다.



스스로를 어떠한 사람이라고 지나치게 단정 짓지 않았으면 한다. 단정 짓는 순간, 당신의 가능성은 오직 그 안에서 멈추게 된다. 자신을 틀 안에 가두기 시작하면, 타인을 대할 때도 그러한 잣대를 들이대게 된다. 타인을 대할 때 여유가 없는 사람은 그 이유를 상황이나 타인에게서 찾곤 한다. 하지만 대부분의 경우, 스스로 여유가 없는 사람일수록 다른 사람을 대할 때도 여유롭지 못하다.



지금보다 더 나은 삶을 살고 싶다면, 경계는 세울지언정 본인의 한계를 정하는 것부터 멈추어야 한다. 경계와 한계는 엄연히 다르다. "이 선을 넘어갈 수도 있지만, 웬만하면 넘지 않는 게 좋아"가 경계라면, "이 선은 절대 넘어선 안돼"가 한계다. 하기 힘든 것, 좀 더 수월한 건 타고난 성향과 능력에 따라 달라진다. 그러나 할 수 없는 것이란 건 없다. 적어도 당신이 그것을 '할 수 없다'라고 믿지만 않는다면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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