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언제부터 사랑을 계산하게 되었을까
'결혼'이라는 단어를 들었을 때 축하보다 걱정이 더 앞서는 건 왜일까요. 얼마나 버틸 수 있을까. 잘 살아낼 수 있을까. 축하보다 질문이 먼저 떠오르는 것이 지금의 분위기인 듯합니다. 30대가 되면 자연스럽게 결혼 이야기가 오가던 시기는 이미 지난 지 오래입니다. 결혼을 전제로 연애를 한다는 말이 어색해졌고, 결혼을 원하지 않는다는 말도 더 이상 특별하지 않게 되었습니다. 사랑이 식어서라기보다 사랑 이후의 삶이 예전보다 훨씬 복잡해졌기 때문일 것입니다.
요즘의 사랑은 감정만으로 결정하기 어렵습니다. 좋아하는 마음보다 먼저 확인해야 할 조건들이 많기 때문입니다. 수입, 일의 안정성, 주거 환경, 부모에 대한 책임, 삶의 방식. 마음보다 현실이 먼저 질문을 던지곤 합니다. 사랑이 감정의 영역이 아니라, '얼마나 감당할 수 있는가'라는 리스크의 영역이 되어버린 것입니다.
사랑이 감정보다 리스크 관리가 되어버리면서, 사람들에게 이혼도 더 이상 흉흉한 소문처럼 받아들여지지 않게 되었습니다. 주변에서 이혼 이야기를 듣는 일이 일상이 되었고, “그래도 버텨라”라는 말은 점점 설득력을 잃어갑니다. 누군가는 이것을 사랑이 가벼워졌다고 말합니다. 하지만 다른 시선에서 보면 ‘더 이상 자신을 잃지 않기 위한 선택’이 늘어났다고도 볼 수 있습니다. 끝까지 버티는 사람이 강한 것이 아니라, 적절한 시점에 멈추는 것이 더 옳은 선택이라고 여겨지게 된 것일지도 모릅니다.
많은 이들이 “사랑은 현실”이라 말합니다. 그렇다고 해서 그들이 사랑을 포기한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그 반대에 가깝습니다. 안정적인 직장, 예측 가능한 생활, 감정에 휘둘리지 않는 성숙한 사람을 원한다고 말하면서도 실제로는 사소한 연락 하나에 마음이 흔들리고, 바쁜 하루 중에 짧게 보내는 안부 메시지에 의미를 부여합니다. 겉으로는 냉정한 선택을 이야기하면서도, 마음 한쪽에는 특별한 무언가를 기대합니다. 퇴근길에 아무 이유 없는 전화 한 통, 차 안에 남겨진 짧은 메모, 생일도 아닌 날에 건네는 작은 선물 같은 것들. 우리는 현실적인 사랑을 원한다고 말하면서도, 여전히 설명되지 않는 순간들에서 사랑의 증거를 찾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그래서 ‘사랑이 멸종 위기에 처했다’는 말은 완전히 틀린 표현은 아닐지도 모릅니다. 다만 사랑이 사라졌다는 의미보다는, 우리가 바라는 본질적인 사랑이 이전만큼 쉽게 발견되지 않는 환경이 되었다는 뜻에 더 가까워 보입니다. 여전히 존재하지만, 예전처럼 무심코 스쳐 지나가듯 만날 수 없는 것. 삶을 버텨내는 일에 온 신경을 쏟다 보니, 사랑이 설 자리가 점점 더 좁아진 시대에 우리가 서 있는 것일지도 모릅니다.
어쩌면 우리는 지금까지 ‘내가 어떤 사랑을 받고 싶은지’에 더 많은 관심을 쏟아왔는지도 모릅니다. 그렇다 보니 어떻게 대접받고 싶은지, 얼마나 이해받고 지지받고 싶은지에 대해서는 비교적 선명하게 떠올릴 수 있죠. 그러나 정작 나라는 사람에게 어떤 사랑이 어울리는지, 내가 감당할 수 있고 함께 책임질 수 있는 관계가 무엇인지에 대해서는 깊이 생각해 볼 기회가 많지 않았습니다.
'받고 싶은 사랑', '원하는 사랑'만 좇기보다, 나라는 사람에게 맞는 사랑이 무엇인지 천천히 고민해 보는 시간도 필요합니다. 그래야만 나와 정말로 어울리는 사람을 찾을 수 있을 테니까요. 사랑을 둘러싼 조건과 리스크만 바라보던 시선에서 한 걸음 물러나보세요. 나와 맞는 방식의 사랑을 찾으려는 노력이 조금씩이라도 늘어난다면, 사랑은 아직 멸종 위기를 완전히 벗어나지 못했더라도 적어도 서서히 회복의 길로 들어설 수 있지 않을까 조심스럽게 생각해 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