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가 당신을 대신 정의하게 둘 것인가
자신의 내향적인 성격을 ‘문제’라고 여기는 사람들이 있다. 말을 빨리 꺼내지 못하고, 처음 보는 사람들 앞에서 존재감이 희미해지며, 혼자 있는 시간이 늘 필요하다는 사실이 어쩐지 결함처럼 느껴지곤 한다. 그런데 생각해 보면 이상한 일이다. 성격은 태생적으로 다양한데 왜 어떤 성격은 “괜찮은 성격”으로 통과되고, 어떤 성격은 “고쳐야 하는 성격”으로 판정받는가.
30년 동안 행복을 연구한 서인국 교수는 자신이 생각하는 가장 어리석은 질문이 “어떤 성격이 좋을까요?”라는 말이라고 한다. 왜냐하면 성격은 도덕 시험의 정답지가 아니기 때문이다. 외향성이 빛나는 순간이 있고, 내향성이 빛나는 순간이 있다. 영업과 같이 분위기를 살려 일을 성사시키는 능력은 외향성의 장점이 된다. 반대로 복잡한 문제를 오래 붙잡고 정리하며, 감정의 결을 섬세하게 읽는 능력은 내향성의 장점이 된다. 결국 성격은 좋고 나쁨이 아니라, 상황과 역할에 따라 효율이 달라지는 ‘도구’에 가깝다.
그렇다면 왜 내향인들만 상대적으로 자기 성격에 문제가 있다고 느끼기 쉬울까. 어렸을 때부터 ‘외향성이 곧 정답’이라는 방식으로 교육받아왔을 가능성이 크기 때문이다. 발표를 잘하면 “적극적이라서 좋다”는 칭찬을 듣고, 조용하면 “자신감이 없다”는 해석을 받는다. 쉬는 시간에 혼자 있으면 “친구가 없나”라는 시선이 붙고, 모임에서 말수가 적으면 “재미없다”는 판정이 내려진다. 즉, 내향성 자체가 문제라기보다, '내향성을 바라보는 사회의 시선'이 문제라는 것이다. 조용함을 결핍이라 인식하면, 내향인은 자기 자신을 계속 고장 난 기계처럼 점검하게 된다.
서인국 교수는 TV 프로그램에 출연해 북유럽 국가들, 특히 행복 지표에서 꾸준히 높은 평가를 받는 핀란드와 같은 나라들을 언급하며, 그 나라 사람들이 왜 행복한지에 대해 연구한 결과로 ‘개인주의가 발달했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우리는 흔히 개인주의에 대해 “타인을 배려하지 않고 내 이익만 챙기는 태도”로 오해하지만, 진정한 개인주의는 그 반대에 가깝다. 타인을 틀에 가두고 옳고 그름을 재단하기보다, 각자의 생각과 방식이 다를 수 있음을 전제로 존중하는 게 개인주의의 본모습이다. “네가 그렇게 생각한다면 그럴 만한 이유가 있겠지”라는 문장이 그 나라 사람들에겐 갖춰진 것이다.
반면 우리는 특정한 상황, 관계, 심지어 삶에도 정답이 있다고 믿는 편이다. “노력해야 성공한다”, “대기업이 아니면 답이 없다” 같은 명제들에 의문을 제기하면, 현실을 모르는 멍청이 취급을 받곤 한다. 더 무서운 건 내가 행복하다고 느껴도 주변 사람들이 “그건 행복한 게 아니야”라고 대신 결론을 내려버릴 때다. 이런 환경에서 내향인은 더 취약해진다. 애초에 말로 주도권을 빼앗아오는 방식이 익숙하지 않기 때문이다. 조용한 사람은 “반박하지 않는 사람”으로 오해받고, 결국 “동의하는 사람”으로 처리된다. 그러다 보면 자기 안에서도 어느새 같은 목소리가 들리기 시작한다. ‘내가 틀렸나 보다’라는 목소리다.
외향적이든 내향적이든 성격에 정답은 없다. 내향인은 큰 무리 속 잦은 만남보다, 소수와의 깊은 대화에서 더 큰 만족을 얻는다. 반면 외향인은 새로운 자극과 확장된 관계 속에서 에너지를 얻는다. 성향에 따라 ‘선호하는 조건’이 다를 뿐이다. 내 성격이 어떤지보다 더 중요한 건, 나에 대해 제대로 파악하고 주변 사람들의 말에 쉽게 휘둘리지 않는 일이다. 나를 설명하는 기준을 남에게 빌리기 시작하는 순간, 삶은 고통의 연속이 된다.
정답을 강요하는 사회에서 소신을 유지하는 일은 결코 쉽지 않다. 특히 내향인에게는 더 어렵다. 싸움이 싫고, 설명이 길어지고, 오해가 생기는 과정 자체가 피곤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많은 내향인은 자기 방식을 지키는 대신 자신을 깎아내리는 쪽으로 갈등을 끝낸다. “내가 이상한 거겠지”라는 문장 하나로 모든 소음을 정리해 버린다. 그러나 그 방식은 조용하지만 잔인하다. 사회의 목소리를 잠재우는 대가로, 자기편을 잃기 때문이다.
그러나 자기 방식에 대한 신뢰를 조금씩 되찾기 시작하면 이상한 일이 벌어진다. 행복이 ‘남들이 인정하는 모양’이 아니라 ‘내가 납득하는 모양’으로 바뀌기 시작한다. 그리고 그 변화는 생각보다 견고하다. 타인의 기준에 맞춘 행복은 언제든 타인의 말 한마디에 흔들리지만, 자기 기준으로 만든 행복은 쉽게 무너지지 않기 때문이다. 내향인에게 필요한 것은 성격 교정이 아니라 '기준의 주도권을 되찾는 일'이다.
스스로를 별로라고 생각하는 내향인들에게 말해주고 싶은 것이 있다. 익숙한 환경에서 벗어나 “사람 많은 곳에 더 나가라”는 의미가 아니다. 자신이 정말로 해보고 싶었던 것, 좋아하는 것들을 눈치 보지 말고 해 보라는 것이다. 혼자 걷고 싶으면 걷고, 깊이 파고들고 싶으면 파고들고, 작은 루틴을 만들고 싶으면 만들어도 된다. 그렇게 “주변에서 정의하는 나”에서 벗어나 스스로 “나”를 정의하는 시간을 갖다 보면 깨닫게 될 것이다. 자신이 '별로'가 아니라, 빛나는 '별'이었음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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