삭제된 새벽
나는 늘 열 시를 기다렸다. 열 시가 되면 세상이 열린다. 4평짜리 우주에 작은 창 하나가 생기는 기분이었다. 화면 속에서 이름표들이 하나둘 깜박이면, 내가 아직 인간이라는 사실을 확인받는 느낌이 들었다. 우리는 병의 경과를 공유했다. 병에 걸린 시간과 컨디션에 따라 증상이 각기 달랐다. 누군가는 손끝이 저리고, 숨이 얕아지고, 심한 사람은 잇몸에서 피가 난다고도 말했다. 가끔은 서로의 기록을 맞춰보며 자신에게 ‘남은 시간’을 계산했다. 잔인하지만 그 계산이야말로 우리가 할 수 있는 유일한 미래였다.
가끔 마지막 인사를 남기는 이들도 있었다. “여기까지인 것 같아요.” “다들 고마웠습니다.” 그리고 그 순간부터 그들은, 아니 우리 모두는 말이 없었다. 마지막 인사말을 끝으로 적어도 그날이 끝나는 순간까지 회색빛의 침묵만이 쌓여갔다. 혹시나 그들을 다시 불렀을 때 자신의 현재도 무한으로 멈춰있을까 봐 두려웠을지도 모르겠다. 그때 처음으로 깨달았다. 병뿐만 아니라 죽음에 대한 두려움 또한 전염병처럼 아무도 모르는 사이 조용히 옮겨 붙는다는 것을.
영겁과 같은 고요함도 다음날 오전 열 시가 되면 다시 따뜻해지기 시작했다. 채팅방의 대화는 늘 비슷했지만, 그 반복이 오히려 안정감을 줬다. “오늘은 손바닥이 뜨겁네요. 열이 피부로 올라오는 느낌이에요." "저는 숨이 찢어지는 것 같아요. 웃지도 않았는데." "다들 물 많이 드세요, 어제 탈수 온 듯해서 정신이 아찔했어요." "오늘도 10시 전에 잠들지 않게 조심합시다." "저는 괜찮아요. 어제보단 팔이 더 가벼워진 것 같아요." "팔이 가벼우면 좋죠, 저는 몸이 나눠지는 느낌이에요." 자신의 일상을 나열하는 문장들이 산문처럼 이어졌다. 아침을 먹고, 반을 남기고, 문을 잠그고, 열 시를 기다리고, 채팅방에 들어가고, 몸 상태를 말하고, 누군가의 상태를 읽고, 밤 열 시가 되면 모두가 ‘내일 보자’며 사라졌다. 내일이 오지 않을 수도 있다는 걸 알면서도 ‘내일’을 말했다. 내일은 신앙 같은 말이었다.
그러던 어느 날이었다. 오후 다섯 시쯤이었나, A가 말을 꺼냈다. "저는 오늘로 마지막일 것 같아요. 몸이 어제보다 많이 좋지 않네요. 고마웠습니다. 여기서 누군가와 대화하지 않았다면 저는 진작 혼자 끝냈을 거예요." 늘 그래왔듯 채팅장엔 아무런 말도 올라오지 않았다. 그리고 잠시 후 A의 채팅이 다시 올라왔다. “즐거웠습니다. 다들 건강하세요.” 그날 밤, 나는 열 시가 넘어도 잠을 못 잤다. 규칙이 끝난 뒤의 시간은 늘 더 조용했고, 그 조용함 속에서 내 심장 소리는 더 크게 울렸다. A는 나보다 한 달 전 채팅방에 들어온 사람이었고, 그가 마지막 인사를 건넸다. 그렇다는 건 이제 곧 '내 차례'가 얼마 남지 않았다는 것이다.
A의 마지막 인사 때문인지 그날 밤은 유독 잠이 오지 않았다. 원래라면 아무리 잠을 설쳐도 12시가 넘으면 졸리기 마련인데, 새벽이 되어서도 뒤척이는 순간이 잦았다. 그런데 벽을 보고 있던 내 등 뒤로 들려서는 안 되는 소리가 났다. "띵-동" 규칙 밖의 소리. 심장이 쿵쾅거리고, 몸이 뒤따라 기어가듯 의자에 앉았다. 모니터의 전원을 누르자 채팅방 상단에 작은 점이 깜박였다. 접속 중. 그 닉네임은 분명히 A였다.
믿기지 않았다. 나는 손가락이 떨리는 것도 잊고 키보드를 눌렀다.
“어떻게 접속한 거예요? 몸 괜찮아요?"
"괜찮아요. 괜찮아서 더 무서워요."
"무슨 말이에요?"
"우린 병에 걸리지 않았어요."
'그게 무슨 말이냐'라고 키보드에 입력하는 순간, 갑자기 화면에 낯선 문구가 떠올랐다. ‘관리자의 권한으로 대화가 삭제되었습니다.’ 바로 뒤이어 ‘새벽개님이 채팅방을 나갔습니다.’라는 문구가 떴다. 마치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벌어진 이 사태에 나는 멍하니 모니터를 바라봤다. 방금까지 A와 나눈 대화는 감쪽같이 사라졌고, 채팅방은 평소처럼 다시 고요해졌다.
모니터 오른쪽 아래 시간을 보았다. 새벽 세시 십칠 분. 이미 모든 상황이 끝났고 자야 하는 시간이다. 여기서 내가 할 수 있는 건 없다. 모니터를 끄고 침대에 누워 눈을 감았지만, 머릿속엔 A의 마지막 채팅이 떠나지 않았다. ‘우리는 병에 걸리지 않았어요.’ 그 말이 머릿속에서 계속 울렸다. 말도 안 된다. 병에 걸리지 않았다면 왜 몸이 약해지는가. 나만의 망상이라면 나와 같은 증상을 보인 채팅방의 다른 사람들은 무엇이란 말인가.
뒤척이다가 어느 순간 잠이 들었고 꿈을 꿨다. 황량한 언덕이었다. 바람에 먼지가 일어났고, 앞에는 사람들이 줄지어 걷고 있었다. 그들은 모두 내게 등을 보인 채 같은 방향으로만 걸었다. "같이 가요!" 나는 그들에게 소리쳤지만, 내 목소리는 모래에 묻혀 사라졌다. 달리면 달릴수록 그들과의 거리는 좁혀지지 않았다. 오히려 더 멀어졌다. 그때 모래폭풍이 불어닥쳤고, 나는 눈을 제대로 뜰 수도 없이 앞으로 걸었다. 그러다 문 하나를 발견했다. 문은 허공에 서 있었고, 손잡이도 있었다. 나는 바람을 피하려 손잡이를 잡았다. 그 순간, 귓가에 목소리가 들렸다. 낮지도 높지도 않은, 아주 익숙한 목소리였다. “열지 마.” 목소리는 나를 내밀듯 밀어냈고, 나는 숨이 막혀 그대로 꿈에서 튕겨 나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