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는 작년의 아름다웠던 벚꽃길을 걷지 않았다

by Quat


어제는 본가를 다녀왔다. 원래는 자고 갈 생각이 없었는데 조카들이 오랜만에 본 내가 반가웠는지 자꾸만 언제 갈 거냐고, 오늘 자고 갈 거냐고 물어보길래 그 모습이 귀여워 자고 가기로 했다. 아침에 일어나 커피 한 잔을 마신 후, 집으로 향하는 버스를 타러 나왔다. 엘리베이터를 타고 1층으로 내려와 캐리어를 끌고 밖으로 천천히 걸어 나왔다. 휴일 이른 오전 시간이라 그런지 밖에 돌아다니는 사람들은 보이지 않았다. 덥지도 춥지도 않은 선선한 공기가 기분 좋게 느껴졌다. 아파트 밖으로 걸어가던 중에 지상 주차장 한가운데 있는 화단에 심어진 나무에 활짝 핀 벚꽃잎들이 보였다. 작년 가을에 이 아파트로 이사 왔을 땐 무슨 나무인지도 몰랐는데 그게 벚꽃나무란 걸 오늘에서야 알았다. 살며시 부는 봄바람에 얇은 나뭇가지가 흔들리더니 벚꽃잎 몇 장이 나무에서 떨어져 나와 춤추듯 살랑거리며 천천히 공중에서 아래로 떨어지는 모습이 보였다. 봄이 왔다는 걸 느끼는 동시에 봄이 끝나는, 아름다우면서도 슬픈 장면이었다.






긴 횡단보도를 건너 정류장에 도착했다. 버스정류장에 설치된 안내판엔 내가 타려는 버스가 전 정류장에서 출발했다는 알림이 나오고 있었다. 아침부터 운이 좋다. 안내대로 곧 도착한 버스에 올라탔다. 창가 자리에 버스를 타고 앉아 블루투스 이어폰을 꺼내 요즘 꽂혀 있는 음악을 재생했다. 회사 근처에 있는 집으로 이사를 한 뒤로는 대중교통을 이용할 필요가 없었는데 오랜만에 버스를 타니 기분이 묘했다. 창문을 살짝 열자 포근하고 몽글몽글한 봄 특유의 냄새가 바람을 타고 흘러들어왔다. 버스 안 모든 자리, 모든 공간이 봄이 되었다.



지금 부모님이 살고 계신 본가로 이사 온 지는 약 6개월이 넘어간다. 그전에 살던 곳은 내가 초등학교 때부터 작년까지 살았는데 그곳에서 지낸 시간을 계산해보면 어림짐작으로도 대략 20년 정도 된 것 같다. 아파트라기엔 작고, 맨션이라기엔 꽤 컸던 그 집에 살며 정말 많은 추억들을 쌓았는데 그중에서도 봄에만 볼 수 있는 특별한 풍경이 있었다.



아파트라기엔 자고, 맨션이라기엔 컸던 집에서 나오면 작은 횡단보도 하나가 있다. 초등학생이 천천히 걸어가더라도 10초면 충분한 짧은 횡단보도를 건너면 정면에 그리 가파르지 않은 오르막길이 나온다. 왼쪽엔 고등학교가, 오른쪽엔 높은 아파트가 있는 그 길은 평소엔 별 특징 없는 평범한 오르막길이다. 아주 가팔라서 조금만 올라도 숨이 헐떡거리지도 않고 그렇다고 많은 차가 다닐 수 있는 넓은 길도 아닌, 어디서나 볼 수 있는 그저 그런 오르막길 중 하나인데 요즘 같은 시기만 되면 이 길은 평소보다 특별한 길이 된다. 길 양 옆으로 심어진 벚꽃나무에 벚꽃이 아름답게 피는데 꽤나 촘촘하게 나무가 심어져 있어, 벚꽃이 한창일 때 길을 걷다 하늘을 올려다보면 빽빽하게 들어찬 벚꽃잎 때문에 하늘이 보이지 않을 정도이다. 평소에 산책하는 것도 좋아하다 보니 벚꽃이 피면 이 짧은 길을 하루에 서너 번, 많게는 다섯 번 이상 걸을 때도 있었다.



본가에서 지금 내가 혼자 살고 있는 집으로 가는 버스를 타면, 예전 오랫동안 살던 그 집 바로 앞을 버스가 지나간다. 창가 자리에 앉아 밖을 바라보고 있는데 익숙한 건물들이 하나 둘 보였다. 자주 가던 근린공원 산책길, 산책을 마치고 집에 돌아가기 전 시원한 캔맥주와 함께 먹을 안주를 사기 위해 가던 편의점, 퇴근 후 배가 너무 고플 때 종종 들러 라볶이와 돈가스, 김밥 등을 사 먹던 분식집이 순식간에 시야에서 스쳐 지나갔다. 하루는 어머니의 기분이 좋지 않아 보여서 기분전환을 시켜드리고자 꽃을 사러 들렀던 꽃집을 지나, 내가 다녔던 중학교의 담벼락 앞에 있는 정류장에 버스가 잠시 멈춰 섰다. 손님을 태운 후 천천히 출발하는 버스 창 밖으로 작년에 보았던 벚꽃나무들이 조금씩 보이기 시작했다. 버스 오른쪽 창문으로 오랫동안 살았던 집이 보이고 왼쪽 창문으로는 오르막길 입구가 살짝 보이더니, 분홍빛의 작은 구체들이 조금씩 커지고 있었다. 몇 초가 지나자 곧게 뻗은 오르막길과 함께 길을 따라 활짝 핀 벚꽃나무들이 보였다. 가슴이 두근거렸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였다. 제대로 된 풍경을 눈에 담아둘 시간도 없이 버스는 움직이고 있었다. 이번 정류장과 다음 정류장의 목적지를 알리는 안내 목소리가 들렸고, 잠시 후 버스는 정류장에 멈춰 섰다. 그리고 손님을 태운 뒤 또 다른 손님을 태우기 위해 다음 정류장으로 이동하기 시작했다. 나는 계속해서 창가 자리에 앉아 있었다. 하차벨은 앉은자리 근처에 있었지만 누르지 않았다. 시선은 여전히 창 밖을 바라보고 있었다. 더 이상 벚꽃나무는 보이지 않았다. 40여분을 더 달린 후에야 하차벨을 눌렀다.







찰나였지만 오랜만에 본 오르막길은 여전히 아름다웠다. 별다른 약속도 없었기에 맘만 먹었다면 버스에서 내릴 수도 있었다. 날씨도 좋았기 때문에 선선한 바람을 맞으며 벚꽃이 가득한 길을 질릴 때까지 걸을 수 있었다. 하지만 그러지 않았다.








누구나 잊을 수 없는 추억이 하나쯤 있기 마련이다. 여행지에서 우연히 본 아름다운 풍경일 수도 있고, 생전 처음 먹어본 맛있는 음식일 수도 있으며, 갖은 고생을 겪어가며 결국 목표를 이룬 순간일 수도 있다. 또는 내가 정말 사랑했거나, 나를 정말 사랑해 준 사람일 수도 있다. 우리는 과거에 겪었던 상황과 비슷한 상황을 겪을 때, 자연스럽게 그때를 떠올린다. 경험에 비춰 결과를 예측하거나, 사람을 판단한다. 그리고 그 상황이 지나가고 나면 예전에 있었던 그 순간을 추억하기도 한다. 그때의 나와 지금의 나를 비교하며 과거로 돌아가고 싶다는 생각을 할 때도 있다. 그와 동시에 이런 생각이 부질없다는 것이란 걸 깨달은 뒤 씁쓸한 웃음을 짓고 다시 현실로 돌아오곤 하는 것이다. 하지만 나는 묻고 싶다. 과연 과거로 돌아간다면 정말로 우리는 행복할 수 있을까?



만약 오늘 내가 버스에서 내린 뒤 오르막길을 걸었다면 분명 기분은 좋았을 것이다. 하지만 집으로 돌아오는 길엔 한편으론 아쉬운 마음도 들 것이다. '좀 더 걷다 올걸', '다음 주에 다시 왔을 때도 벚꽃이 지금처럼 피어 있을까?' 하는 생각들 말이다.



'추억은 추억으로 남겨둘 때가 가장 아름답다'라는 말이 있다. 그 순간 정말 행복하고 즐거웠기 때문에 잊을 수 없는 추억이 되었지만, 막상 그것을 다시 했을 땐 그때 느꼈던 감정을 똑같이 느끼는 건 정말 힘든 일이다.

나 또한 그런 적이 있었다. 대학교를 다닐 때 친구들과 맛있게 먹었던 음식들에 대한 향수로, 몇 년이 지난 후 혼자 대학교를 찾아가 그 음식들을 먹어보았었다. 설레는 마음으로 크게 한 숟갈을 떠서 입에 넣은 뒤 나는 충격에 빠졌다. '이걸 내가 그렇게 맛있게 먹었다고? 말도 안 돼!'



과거로 돌아가고픈 마음은 현재의 내 모습과 처지가 만족스럽지 않다고 느낄 때 더욱 강렬해진다. 인간은 누구나 남들보다 돋보이고 싶은 욕구를 가지고 있기 때문에, 지금 자신의 모습이 별로라고 느끼면 자신이 가장 빛나고 아름다웠던 순간을 떠올리기 마련이다. 이런 상태에 있으면 다른 사람과 대화를 할 때도 과거에 대한 이야기를 보다 많이 꺼낼 수밖에 없다. 이것이 자꾸 반복되면 과거의 자신을 현재 자신의 모습이라고 착각하면서 살아가기도 한다. 사람은 변하지 않는다고 하지만, 우리는 자신도 눈치채지 못한 사이에 조금씩 변하고 있다. 현재의 나는 1년 전의 나보다 훨씬 많은 사람을 만나고, 더 많은 감정을 느낀 상태이다. 같은 상황에서 비슷한 선택을 할지언정, 과거와 똑같은 생각을 하고 똑같은 선택을 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똑같다'라고 스스로 생각하는 것뿐이지, 아주 조금이라도 그때와는 다른 생각을 하게 되는 것이다.








버스 정류장에서 내린 뒤에 골목길을 따라 집으로 걸어가던 중, 커다란 벚꽃나무 한 그루를 보았다. 한 그루임에도 나뭇가지마다 벚꽃잎이 무수히 피어있었다. 잠시 걸음을 멈추고 사진을 한 장 찍었다. 푸른 하늘 아래 흐드러지게 핀 벚꽃이 무척이나 아름다웠다. 오르막길에서 시간을 보내지 않고 집으로 일찍 돌아온 덕분에 새로운 추억을 하나 쌓을 수 있었다. 물론 오르막길엔 훨씬 더 많은 벚꽃나무가 심어져 있다. 하지만 내가 오늘 본 벚꽃나무는 지금 살고 있는 집에서 아주 가까운 곳에 심어져 있어서, 벚꽃이 지기 전까지는 내가 보고 싶을 때 언제든 쉽게 볼 수 있다는 장점이 있다.



현재 자신이 느끼는 행복의 크기가, 과거에 내가 느끼는 행복보다 작고 별 거 없다고 느낄 수도 있다. 그렇다고 해서 과거에 내가 행복했던 무언가를 했을 때 그때와 똑같은 행복을 느낄 수 있다는 보장도 없다. 행복은 크기가 중요한 것이 아니다. 지금 내가 무언가를 할 때 행복하다고 느낀다면 그걸로도 충분하다. 과거에 비해 지금 당신이 불행하다고 느끼는가? 그렇지 않다. 당신은 과거에 비해, 다른 사람들에 비해 '덜' 행복한 것이 아니라, 지금 행복하다고 느낄 무언가가 없는 것뿐이다. 이것은 비슷해 보이지만 전혀 다르다. 행복의 기준을 섣불리 두지 마라. 비교에서 오는 행복은 행복이 아닌, 그저 상대적 만족감일 뿐이다. 타인에게도, 과거의 자신에게도 행복의 기준을 두지 말고 그저 지금 당신이 좋아하는 것에 집중하라. 그러다 보면 당신 자신도 모르게 점점 더 웃음이 많아질 것이다. 행복해질 것이다. 따뜻하게 내리쬐는 햇살에도, 거리에서 마주친 이름 모를 아이의 웃음소리에도, 카페에서 우연히 당신이 좋아하는 노래가 흘러나오는 그 순간에 당신은 미소 지을 것이다. 그뿐이다. 행복이란 것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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