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난한 숨구멍, 우리가 나눈 사투리 편지
나이가 든다는 것은 생각이 머무는 자리가 깊어진다는 뜻이다. 사춘기의 공상은 한때 화려한 신기루처럼 눈앞을 어지럽혔지만, 이제 그녀는 지나온 인연의 결을 하나하나 만지며 마음의 매무새를 다시 고친다. 그 과정에서 그녀의 삶에 가장 넓은 면적으로 남아 있는 한 사람을 떠올린다.
중학교 1학년, 남녀공학 교실에서 처음 만난 그 아이는 거침없고 구김살이 없었다. 늘 한 발 뒤로 물러나 세상을 바라보던 그녀의 앞에, 친구는 빛처럼 나타났다. 전교 상위권을 놓치지 않던 영민한 아이. 그녀에게 그 친구는 단짝을 넘어, 세상을 바라보는 창이자 닮고 싶은 방향이었다.
고등학교 입학을 위한 연합고사 날의 풍경은 여전히 또렷하다. 시험지 앞에서 막막해하던 그녀의 앞자리에는 그 친구가 앉아 있었다. 친구는 말도, 눈짓도 없이 답안지를 슬쩍 옆으로 밀었다. 부정이라는 말보다 먼저 떠오른 것은, 함께 낙오되지 않기를 바라는 아이들 특유의 투박한 의리였다. 시험 친 날, 둘째 오빠가 사준 까만 자장면 한 그릇은 그 우정이 현실로 남긴 첫 온기였다.
그러나 고등학교 생활은 낭만보다 고통에 가까웠다. 매일 새벽 집을 나서 30분을 걸어 시외버스 정류장에 닿고, 다시 50분 동안 콩나물시루 같은 완행버스에 몸을 밀어 넣어야 했다. 사람들의 체취와 거친 숨소리가 뒤섞인 공간에서, 존엄은 쉽게 밀려났다. 시외버스에서 내려 다시 시내버스로 갈아타고 25분을 더 달려야 학교에 도착했다. 길 위에서 흘려보낸 시간은 가난이 추상적인 개념이 아니라, 매일 몸으로 통과해야 하는 현실임을 가르쳤다. 학교는 꿈을 키우는 곳이 아니라, 하루를 무사히 견뎌내야 하는 장소였다.
그런데 어느 날, 가장 든든했던 친구가 가정 형편으로 부산의 고모 집으로 전학을 갔다. 그것은 연인과의 이별보다 더 큰 상실이었다. 그때부터 그녀의 지독한 ‘우정 짝사랑’이 시작됐다. 일주일에 한 번, 사투리가 섞인 엉성한 문장과 틀린 맞춤법으로 빼곡한 편지를 써 부산으로 보냈다. 답장이 늦어질까 봐 우표 열 장을 봉투에 함께 넣어 보내기도 했다. 그 편지들은 서로에게 숨을 붙들어 매는 가난한 숨구멍이었다.
처음으로 찾아간 부산의 달동네는 발밑에 별이 내려와 반짝이는 곳이었다. “언니, 저게 다 별이에요?”라는 물음에, 친구의 고종사촌 언니는 그것이 사람들이 사는 집의 불빛이라 답했다. 가파른 계단을 오르며 그녀는 울었다. 매일 이 길을 오르내리며 타향살이를 견뎌냈을 친구의 시간을 몸으로 이해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친구는 강한 자존심을 지녔다. 대학 진학이 좌절되자 “나 죽었다고 해라”라는 말을 남기고 스스로를 숨겼다. 그녀는 술래가 되어 그 친구의 행방을 찾았다. 가난은 우정조차 숨어야 하는 일이었지만, 그녀는 그 숨구멍을 쉽게 놓지 못했다.
“부모 팔아 친구 산다”는 옛말은 틀리지 않았다. 가난했던 버스 안에서, 부산의 달동네 계단에서, 그리고 장례식장에서 그들이 나눈 것은 단순한 위로가 아니라 서로의 생을 붙잡아 주는 숨결이었다. 우정은 늘 완전하지 않았고, 그래서 더 오래 버텼다. 그녀는 이제 안다. 오래된 관계일수록 저절로 이어지지 않으며, 정성을 멈추는 순간 조용히 금이 간다는 것을.
오늘을 기록하며 그녀는 다시 묻는다.
그 틈을 건너오며, 우리는 무엇을 잃었고 무엇을 끝내 놓지 않았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