폭풍: 상실이 할퀸 자리

대학생은 마지막 껍질의 자존심

by 비채꿈

고등학교라는 견고한 울타리가 사라졌다. 그녀의 앞에는 ‘재수생’이라는 애매한 이름표가 붙었다. 학생도 아니고, 사회인도 아닌 채 어디에도 속하지 못한 상태. 시간 위에 둥둥 떠 있는 반쪽짜리 인생이라 느낀 시간이었다. 그동안 자존심 하나로 버텨온 그녀는 자신의 성적으로는 턱없이 부족하다는 것을 알면서도 부산의 국립대 간호학과에 원서를 넣었다. 그것은 학문에 대한 열망이 아니라, 무너져가는 자존심을 붙들기 위한 마지막 몸짓이었다.

예상대로 불합격 통지서를 받았다. 그러나 그 명확한 실패는 뜻밖에도 도망칠 수 있는 이유가 되어주었다. 고향을 떠나지 못한 채 주저앉아 있기보다는, 실패를 핑계 삼아 다른 공기를 마시고 싶었다.

그해 겨울, 그녀는 여아 언니의 권유로 부산 서면의 한 초밥집에서 두 달을 보냈다. 초밥집은 여야 언니의 큰언니가 운영한다. 우리는 함께 얼릴 때의 추억을 이야기하고, 서로의 고민거리를 이야기하면서 서로를 위로하면서 지냈다. 촌에서 올라온 소녀에게 세상의 경이로움과 냉혹함을 동시에 보여주었다. 부산여대에 다니던 여아 언니를 따라 캠퍼스를 걷던 날들, 처음 마셔본 자유의 공기는 달콤했지만 오래 머물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대학이라는 공간은 그녀의 것이 아니었다. 대학에 대한 갈망이 더 깊어지기만 했다.

결국, 그녀는 다시 엄마의 품으로 돌아왔다. 무엇을 배우고 싶은지보다, 그저 ‘대학생’이라는 신분 뒤에 숨고 싶었다. 친구이자 경쟁자라고 생각한 동네 친구가 자기 언니의 도움으로 대학에 진학했다는 소식은 그녀의 오기를 자극했다. 그녀는 작은 사무실에서 넉 달간 일하며 월급을 모았다. 그렇게 마련한 35만 원. 그것이 그녀가 감당할 수 있는 대학 문턱의 등록금이었다.

그녀는 자신의 형편에 맞는 국립 전문대 식품제조학과에 원서를 넣었다. 학과의 정체성이나 미래는 중요하지 않았다. 합격할 수 있다는 사실 하나면 충분했다. 그토록 되고 싶었던 ‘대학생’이란 신분을 가지고, 청춘을 만끽하고 싶었던 짧은 시기를 청춘을 흉내 내는 연극 같았다. 성화, 미에 와 삼총사가 되어 캠퍼스를 다녔고, 점심은 라면으로 때우면서도 음악다방에서는 라면값보다 비싼 커피를 마셨다. 자욱한 담배 연기 속에서 DJ의 목소리에 취해 노래를 신청하던 시간. 겉멋에 끌려 친구 따라 담배를 피워 물었다가 눈물 콧물을 다 쏟고 나서야 그만두기도 했다. 그것은 방황이라기보다, 너무 일찍 어른이 되어버린 아이가 자신에게 허락한 최소한의 숨구멍이었다.

수요일 연재
이전 09화선인장 즙에 섞인 어머니의 눈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