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산층의 마을공동체는 가능한가
복도식 아파트에서 복도 맨 끝의 집은 장점이 있다고들 한다. 맨 끝자리에 살고 있는 나는 한쪽 면이 비어 있으니 다른 집보다 조용할 가능성이 크지만, 한쪽 면이 공중에 떠 있으니 난방에 불리하다는 생각이다. 다만 다른 사람이 통행하지 않는 공간이 확보되긴 하지만, 이 공간에 뭔가를 쌓아두는 건 소방법 위반이라 물건을 쌓아두지는 않는다.
2년 전쯤인가 우리 집과 반대편인 복도 맨 끝에 물건이 하나씩 쌓이기 시작했다. 유모차, 아기 놀이터, 텐트, 골프채가 나오더니 서랍장도 하나 나왔다. 그러다가 엘리베이터가 있는 쪽에도 물건이 쌓이기 시작했다. 이번엔 아기들이 타는 전기자동차가 두 대나, 다른 종류의 유모차 등 모두 아기 물건이었다. 아기와 젊은 엄마, 가끔 할머니로 보이는 여성 노인과 함께 엘리베이터를 타기도 했다. 아기 엄마는 상냥하고 인사를 잘했다. 나는 눈에 띄는 그녀의 외모를 보며 ‘답답한 게 많겠구먼’ 하고 생각했다. 한때 나도 저렇게 물건을 수집 강박 수준으로 사들인 시기가 있다. 내 아이가 복도 끝집 아이와 비슷한 또래였을 때다. 누군가 이걸 바로잡아 줘야 한다. 가벼운 한마디로 정신이 번쩍 들기도 하니까. 집안에 들여놓을 수 없을 정도로 물건을 쌓아두는 건 돌봄이 필요하다는 증거다. 아기 엄마도, 아기도 쉽지 않을 거였다. 감당할 수 없는 물건을 갖고 산다는 건 심각하게 여길 문제다.
한 번은 내가 엘리베이터 앞에 잔뜩 쌓인 물건을 물끄러미 쳐다보고 있자니 어느새 내 옆에 와서 선 3호 노인이 내 눈치를 쓱 본다. “애 물건이잖아. 애들이 살림이 좀 많아. 우리가 이해하고 넘어가줘야지. 때 되면 다 없어질 거잖여.” 하며 아기 엄마를 거들었다. ‘아니, 내가 뭐라 한댔어요.’
나는 수굿하게 “네.” 하며 웃었다. 그러나 그 가족에게 지원이 필요하다는 생각을 지운 건 아니다. 아무리 작고 좁아도 아파트에 살고, 물건을 사들일 수 있는 경제력이 되고, 양육자가 생존해 있다면 사회복지가 개입할 영역은 없다.
아이가 어릴 때 우리 집엔 동네 어린이들이 자주 들락거렸다. 외동으로 크는 아이라 단둘이 있으면 하루 종일 내가 아이의 친구이자 형·누나·동생·엄마·아빠의 역할을 다해야 하니, 차라리 친구를 데리고 와서 놀라고 권했고 다행히 그럴만한 상황과 조건이 되어 아이들이 자주 놀러 왔다. 늘 현관엔 아이들의 신발이 그득했다. 가끔 저녁도 같이 먹었지만 대부분의 아이들이 저녁시간엔 집에 서둘러 돌아가곤 했는데 민수는 저녁을 먹고 가도 된다고 했다. 몇 번은 그냥 같이 저녁을 먹었고 나중에는 저녁시간에도 집에 갈 생각을 하지 않는 것이 걸려 집에 어른이 안 계시냐고 물었다.
“엄마 아빠 10시 넘어서 들어와요.”
민수는 넓은 평수의 아파트에 살았다. 위로 형이 하나 있는데 형은 중학생이라 학원 다니기 바빴다. 초등학교 2학년짜리를 중학교 1학년짜리 형이 학원을 다니면서 챙기긴 어려웠다. 민수의 부모님은 의류 매장을 운영하고 있었는데 직원을 두기가 어려워지면서 매일 퇴근이 늦었다. 집에 가면 사발면을 먹거나 짜장면을 시켜 먹기도 하고 치킨도 가끔 먹는다길래 별일 없으면 우리 집에서 저녁을 먹고 가게 했다.
어느 한날, 우리 아이가 집에 없던 시간에 민수가 벨을 눌렀다.
“아줌마, 놀러 가도 돼요?”
“환이가 지금 집에 없는데, 이따가 한 다섯 시쯤 올 건데, 그때 놀러 와.”
민수는 모니터에서 사라지지 않고 쭈빗대다 물었다.
“환이 없이 저만 들어가서 놀면 안 돼요?”
당황했다. 친구네 집에 놀러 가는 것은 친구를 만나러 가는 것이지 친구의 물건을 갖고 놀기 위해 오는 것이 아니라고 타이르고, 이따가 환이와 약속을 하고 놀러 오라고 돌려보냈다. 그렇게 두어 계절, 우리 집에 들락거리던 녀석이 우리 아이와 관계가 소원해지고 난 다음엔 놀러 오지 않았다. 저녁은 어떻게 먹고 있나 궁금했고 가끔 내 아이에게 그 친구 소식을 물었지만 그 또래 사내 녀석들의 대답은 다 비슷하다. “몰라.”
양육자의 저녁 퇴근이 늦어지는 경우, 주말에 양육자가 일이 있어 집을 비워야 하는 경우, 아이 친구들이 우리 집에 와서 놀고 같이 밥을 먹고 시간을 보냈다. 자격증 시험 공부를 하던 지훈이 엄마는 우리 집에서 놀고 있는 지훈이를 데리러 올 때마다 케이크며 과일을 사 들고 왔다. 처음에 한 번 받았다가 매번 뭔가를 사 들고 오길래 ‘나는 애를 봐준 게 아니고 저희들끼리 논 것이다’고 강조하며 자꾸 뭐 사 들고 올 거면 못 놀러 오게 하겠다고 으름장을 놓기도 했다.
모든 양육자가 우리 집에서 놀던 제 아이를 데리러 올 때마다 뭔가를 사 들고 왔다. 내가 꿈꾼 것은 공동체 육아였지만 그들은 외주로 생각한다고 느꼈다. 늘 뭔가를 사 들고 오는 주변 양육자들의 대응이 달갑지 않았는데, 막상 나에게 같은 일이 닥치자 오히려 나는 한술 더 떴다. 주변에 전화하지 않고 시간당 1만 원을 내는 블록 놀이방에 아이를 보내고 볼일을 보러 다녀왔다. 그나마 “누구네 집에 가 있어”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은 상당한 시간이 지난 다음이었다.
어느 하루는 같은 단지에 사는 엄마가 나를 찾아왔다. 잠깐 얼굴 좀 볼 수 있냐고 물어 밖으로 나갔더니 두 손을 꼭 잡고 주저하며 말을 떼었다.
“환이네 집에 아이들이 자주 놀러 온다고 들었어요.”
“아… 예… 저하고만 있으면 제가 피곤해서 애들을 부른 거죠. 하하.” 나는 별것 아니라는 듯이 대답했다.
“괜찮으면 환이에게 저희 아이도 좀 불러 달라고 얘기해 주시면 안 될까 하고요.”
그이는 학교에서도 동네에서도 자기 아이가 친구를 잘 사귀지 못하는 것 같다며 방과 후에 친구들이 놀러 다닐 때 자기 아이도 좀 끼워 줬으면 좋겠다는 얘기였다. 나는 아마 서로 시간이 안 맞아서 그랬겠지, 별것 있겠느냐고 환이에게 잘 얘기해 보겠다고 말했다.
집에 돌아온 환이에게 “낮에 준영이 엄마가 왔다 갔어.”라면서 이야기를 전했다. 고작 초등학교 2학년이던 환이는 “싫은데?!”라고 단박에 거절했다.
“준영이 학교에서 막 나 놀린단 말야.”
“뭐라고 놀리는데?”
“너 새끼 영어도 못하지?! 막 이런단 말야.”
“그래서 기분이 상했구나. 준영이랑 사이 안 좋아?”
“준영이 좋아하는 애 없어!”
“왜 그럴까?”
“준영이 맨날 영어 잘한다고 으스대고, 여자애들 막 공격해.”
“공격해? 어떻게 했는데?”
“이렇게 손으로 목 잡아서 벽으로 밀었어. 그리고 으씨! 막 주먹 들고 죽여 버린다 이랬어.”
나는 아이에게 준영이 이야기를 조금 더 들었다.
양손을 곱게 잡고 나에게 아이를 부탁하던 준영이 엄마 얼굴은 파운데이션을 두껍게 발랐지만 기미가 가득했다. 준영이 엄마는 매일 고급 외제차에 준영이를 태워 5분 거리 학교에 데려다주고 데리고 왔다. 준영이는 명품 브랜드의 책가방을 메고 다녔다. 저래 가지고는 아무하고도 어울릴 수 없을 것 같았다. 준영이가 교실에서 여자아이들의 목을 잡아 벽에 붙였다는 얘기는 ‘모방’이라는 확신이 들었다. 준영이 엄마의 까맣게 올라온 기미와 불안한 표정, 그리고 걸어서 10분이면 족히 닿을 거리를 굳이 차로 데려다주고 데려오는 모든 행동이 두려움으로 읽혔다. 준영이는 고학년이 되어서도 딱히 누구와 잘 지낸다는 소리를 듣지 못했다. 학교에서는 기피 대상이 되었고 중학교에 가서는 학교에서 벌점을 종종 받는다는 소리를 들었다.
걸어서 갈 수 있는 곳에 아이가 학교를 가게 되면 한 마을의 아이들이 한 학교에 모이게 된다. 내가 살던 곳의 초등학교는 학교 주변을 둘러친 마을에서 아이들이 모두 걸어서 학교로 갔다. 그러니 아이들에게 전해 듣는 소식, 마을에서 들려오는 소식이 같이 들려온다. 마을에서 있었던 유별난 일보다는 학교에서 있었던 놀라운 일이 빠르게 전달된다.
아이가 5학년 때는 학교에서 폭력 사건이 벌어졌다. 화가 난 피해자의 양육자는 마을을 돌며 가해 학생에게 비슷한 유형의 언어폭력과 폭행을 당했다는 서명을 받았다. 가해 학생은 멀리 전학을 갔다. 사건 이후 오랜만에 놀이터에서 만난 재윤이 엄마가 나에게 물었다.
“그게 맞아?”
“전학 보낸 거?”
“걔 부모님도 없다매. 할머니랑 산다매.”
“그렇대. 그래서 어디로 간 거래?”
“큰아빠 집으로 갔대나. 남쪽 지방이래. 그렇게 보내 버리면 애가 반성하고 잘 되나?”
“당한 애 엄마 입장도 이해는 가는데.”
“그렇지, 피해자한테는 사과도 하고 보상도 해야지. 벌도 받아야지. 근데 그렇게 전학 보내 버리면 애들이 잘 되냐고. 또 다른 일을 저지르지 않겠느냐는 거야. 나는 좀 그렇다. 그렇게 그냥 너 잘못했으니 쫓아버리는 것 같아서.”
한때 의기투합해서 재미난 걸 해 보자고 우리 시의 유명지를 하나씩 찾아 방문하고 다녀와서 아이들에게 글쓰기를 시키고, 양육자들은 저녁에 따로 만나 맥주 한 잔씩 기울이던 시간이 있었다.
아이들이 더 이상 엄마를 찾지 않을 때가 되어서야 서로 음식을 나누고 급한 부탁도 할 수 있게 되었다. 그러나 중학교 진학을 앞두고 더 나은 학군지를 찾아 이사를 가는 가족이 있었다. 학원의 레벨 테스트를 두고 산산이 흩어지기 시작했다. 누구는 학원가의 학원으로 갈 수 있고, 누구는 학원가의 학원을 견디지 못해 마을 안 작은 학원에 남으면서 묘한 긴장감이 흘렀다. 초등학교를 같이 졸업한 녀석들이 같은 중학교를 가면서 한두 번쯤 만남이 있었지만 고등학교 2학년부터는 연락이 끊어졌다. 대학입시가 가까워지면 20년 지기 동창도 서로 연락하지 않는 게 매너요, 연락이 되더라도 자녀의 일은 일절 묻지 않는 게 예의가 되었다.
흉내만 냈던 중산층의 마을교육공동체는 아이들이 자라면서 사라졌다. 그때 내가 손 내밀지 못했던 준영이 엄마와 더 챙기지 못했던 민수가 가끔 기억난다. 그 아이들은 지금 어디서 무엇을 하고 있을까. 그렇다고 해서 내가 어디까지 개입할 수 있었을까. 어쩌면 다시 돌아가도 아무것도 하지 못하고 그대로 지켜만 봤을지도 모르는 일이다.
저소득층은 지역아동센터에서 아이들의 빈자리를 채운다. 지역아동센터 종사자들의 말을 들어보면 실컷 달래 놓으면 집에 가서 무너져 돌아오는 아이들을 볼 때마다 가슴이 미어진다고 한다. 중산층이라고 해서 딱히 가정 내 돌봄이 살뜰하게 이루어지지는 않는다. 준영이나 민수 같은 아이는 흔하고도 흔했다. 50평형대 아파트의 절반이 쓰레기로 뒤덮였거나 구더기가 들끓는 경우도 봤다. 학생의 투신은 대부분 아파트 단지에서 일어났다. 재산이 있으면 복지 대상이 아니라는 이유로 누구도 개입하지 않고 간섭하기도 어렵다. 이들은 도움을 요청하는 것을 더러 수치스러워했다. 사회복지는 ‘가난한 자를 위한 것’이라는 고정관념이 스스로를 사각지대로 내몰았다. 폭력 사건이 벌어져 경찰이 출동했을 때는 이미 늦었다. 누군가 곁에 있었다면 사는 이야기는 조금 달라지지 않았을까.
새로 지었다는 어느 아파트 단지에는 반상회나 주민 모임은 없었다. 대신 ‘골프 모임’은 왕성했는데, 서로 명함을 주고받고 자기 사업을 자랑하느라 바빴다. 관리실은 지하에 있는 대신 선큰 광장이 자리 잡고, 관리비로 헬스장을 운영했다. 새로 짓는 아파트 단지에 빠짐없이 등장하는 것은 커뮤니티센터다. 서로 집 구조와 매매가를 통해 상대방의 자산을 추정할 수 있는 상황에서 커뮤니티는 얼마나 작동할 수 있는가.
엘리베이터 문 앞까지 치고 나올 기세로 물건을 쌓아 놓았던 아기 엄마네는 지난 주말에 이사했다. 눈이 많이 온 다음 날이었다. 예의상 “좋은 데로 가시나 보다”라고 했더니 “나쁜 데로 가요.” 하면서 친정엄마 근처로 간다고 했다.
나는 재빠르게 수습하느라 “가시는 곳에서 좋은 일 많으실 겁니다.”라고 중년 부인 티를 내며 덕담을 했다. 상냥한 아기 엄마는 고맙다고 웃으며 배시시 웃었다. 나는 그 많은 짐이 다 들어가는 데로 가야 할 텐데 괜한 걱정을 했다.
위태로운 이웃들을 바라만 본다. 공동체는 어디부터 어디까지일까. 그래도 여기 사람들이 있으니까 살 만하다는 생각을 다시 할 수 있을까.
1기 신도시 아파트의 초창기 모습을 그리워하는 콘텐츠들이 종종 눈에 띈다. 모두 현관문을 열어 두고 살던 아파트가 있었다고. “너희 엄마 병원 갔다. 들어와서 밥 먹어.” 하던 때가 있었다고.
국가는 선진국이 되었고 전 세계가 K-문화에 열광한다는데, 우리는 얼마나 살기 좋아진 걸까. 이웃과 모두 헤어진 뒤에, 우리의 살 만한 이유는 어디서 찾을 수 있나.
*등장인물은 모두 가명입니다.
수요일엔마프 마을큐레이터 이하나(문화공동체 히응 대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