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장 뜨거운 것부터, 가장 차가운 것까지
비가 주룩주룩 오던 날, 양주 신애네 집 마당에서 기다리던 파란 트럭에 비루한 살림살이를 싣고 우리 가족이 향한 곳은 남쪽이었다. 엄마는 무슨 일이 있어도 언제가 되더라도 서울로 돌아가겠다고 했다. 엄마에게 경기도는 일시적 피난처였고 서울의 변방이었다. 세상의 중심은 서울이라고 굳게 믿었다.
모친의 고향은 함경북도 청진이다. 전쟁 때 남한으로 내려와 한남동에 정착했다. 엄마는 서울의 북쪽으로 이동할 때마다 실패한다고 느끼는 것 같았다. 자신의 고향과 가까워지는데도 불구하고.
양주에서 가장 가까운 의정부는 가능동이었다. 우리는 2층에 교회가 있는 건물의 맨 끝집에 가겟방을 얻었다. 도로를 보는 쪽은 가게로 쓸 수 있고 안쪽에 작은 살림방을 둘 수 있는 구조다. 12번과 13번 종점이 가까이에 있었다. 요즘은 이런 상가가 없지만, 80년대만 하더라도 장사와 살림을 한 곳에서 해결하는 일이 잦았다. 화장실은 내부에 없다. 화장실은 건물의 뒤편에 공용을 사용하고 살림방 옆에 작은 부엌공간을 둘 수는 있다. 말하자면 상수도와 하수도는 있으나 오수관은 설치되지 않았을 것이다. 엄마와 아빠는 커다란 아크릴판을 사다가 글자의 테두리를 그림처럼 그려 글자를 잘라냈다. 하얀 바탕에 초록색 글자였다. ‘그림의 집’. 간판집에서 만든 게 아니라 우리 집 간판은 튀어 보였다. 지금도 이 건물이 남아있다. 포털사이트의 로드뷰로 보면 1층엔 여전히 작은 가게들이 있고 2층엔 다른 이름의 교회가 들어서 있다. 이 집에서 엄마와 아빠가 헤어졌다.
아빠가 집을 떠난 뒤 우리는 거처를 옮겼다. 의정부의 두 번째 집은 의정부 시외버스터미널과 중랑천 사이에 있는 동네였다. 이번에도 가겟방이었다. 좁은 골목 안에 있는 2층인가, 3층인가 하는 건물의 1층이었다. 건물주인은 2층에 살았다. 건물주는 중앙로에서 금은방을 한다고 했다. 집 앞에는 커다란 한옥 여관이 있었고, 그 옆에는 파란 대문집이 있었다.
그 사이 기독교에 완전히 몰입한 엄마는 간판을 “임마누엘”로 달고 성경책과 성화, 기독교서적을 팔았다. 가끔 박을 사다가 조각을 하고 매듭을 연결해 장식품을 만들었고, 겨울이면 연탄난로 위에 파라핀을 녹여 양초를 만들었다. 우리의 가겟방엔 늘 파라핀냄새와 베니어판의 포르말린 냄새가 가득했다.
마을은 시외버스터미널과 시장이 가깝다 보니 사람이 북적였다. 동네엔 또래 아이들이 많았다. 나는 학교가 끝나고 나면 동네 아이들과 천방지축으로 뛰어놀았다.
해가 질 때면 엄마가 나를 잡아끌고 제일시장으로 향했다. 시장이 문을 닫을 때쯤 바닥에 버려진 배춧잎들이 있었다. 엄마는 이걸 모으면 배춧국을 끓일 수 있다고 했다. 모두 멀쩡한 것들이라고 강조했다. 나는 별생각 없이 배춧잎을 같이 주워 담았다. 깨끗한 배춧잎을 보며 이런 것들이 모두 공짜라니 재밌는 일이라고 생각했다. 생선가게엔 떨이가 시작되어 가끔 시장에서 삼치나 고등어를 샀다. 햇빛이 길게 시장통에 늘어지던 날, 엄마는 오뎅공장을 가리키며 우리 골목의 제일 부잣집이라고 얘기했다. 그러면서 ‘배운 건 별로 없어도 잘 살 수 있다’는 묘한 말을 했다. 엄마의 유일한 무기는 자기의 학력이었기에, 그 무기를 갖고 여러 사람을 폄하하는 걸 즐겼다.
오뎅공장 사장은 외동딸이 하나 있었는데, 나와 동갑이고, 같은 학교를 다녔다. 박상미. 상미와 같은 반이었는지는 또렷하게 기억이 나지 않지만, 이사 온 지 얼마 안 되어 단짝 친구가 되었다. 상미는 공부도 잘했고 선량했다. 너그럽고 친절한 아이였다. 상미와 나는 같은 피아노학원에 다녔고 걸스카우트도 같이 했다. 사실 우리 집 형편에 피아노학원이나 스카우트 같은 건 엄두도 내지 말아야 할 사치였으나, 교육에 욕심 많던 모친의 욕망과 남들을 이겨 먹으려고 안달이던 나의 욕구가 만나 무리한 일들을 감행했다.
상미네 집에는 피아노도 있고 동화책도 많았다. 나는 시간이 날 때마다 상미네 집에 가서 피아노도 치고 과일도 얻어먹었다. 상미에게는 보조바퀴가 달린 자전거가 있었는데 상미는 한 번도 자전거를 타지 않았다.
“나 니 자전거 한 번만 타도 돼?”상미는 더 묻지도 않고 맘껏 타라고 했다. 나는 상미네 집 마당에 늘 세워져만 있던 스텔라에 대해서 물었다.
“근데 너네 집 차는 왜 맨날 저기 서 있어?”
“우리 아빠가 운전을 못해.”
“운전을 못하시는데 차가 있는 거야?”
“응. 운전은 삼촌만 할 줄 알아.”
“... 우리 집도 옛날엔 포니가 있었어.”
나는 안 해도 될 말을 남기고 상미의 자전거를 ‘빌려서’ 골목으로 나갔다. 상미는 밖에 나가 노는 걸 좋아하지 않았다.
아이들이 몰려들어 “박상미 자전거를 이하나가 탄다”라고 떠들어댔다.
“상미한테 허락받았거든!”
나는 상미의 자전거를 타고 중랑천변까지 올라가 마구잡이로 내달렸다. 해가 지면 상미네 집에 자전거를 갖다 놓고 다음 날 학교에서 돌아오면 다시 상미네 집에 가서 자전거를 꺼내서 중랑천변을 달렸다.
그러던 어느 날 보조바퀴 한 개가 떨어져 버렸다. 나는 아랑곳하지 않고 자전거를 꾸준히 탔다. 상미는 자전거에 관심도 없었다. 며칠 지나 나머지 보조바퀴 하나도 떨어져 버렸다. 나는 상미에게 보조바퀴가 떨어졌다는 얘기도 하지 않았다. 상미도 자전거에 대해서 묻지 않았다. 나는 엄마에게도 자전거에 대한 이야기를 하지 않았다.
가끔 우리 가게에는 외국인들이 들렀다. 엄마는 간단한 영어로 물건을 팔았다. 동생은 얼굴이 하얗고 키가 크고 코가 높은 외국인을 보고 무섭다고 울었다. 나는 외국인과 대화를 나누는 엄마를 보며 멋있다고 생각했다. 우리 가게 맞은 편의 파란 대문집엔 한 부부가 살았다. 부인은 한국인이고 남편은 미국인이었다. 미국 아저씨를 마주칠 때마다 나는 “헬로~”인사를 해봤다. 소풍 가기 전날 파란 대문 앞에서 아줌마가 나를 바라보고 손을 흔들어 부르더니, 봉투를 하나 건넸다.
“아저씨가 너 내일 소풍 가서 먹으라고 사 오셨단다.”
봉투 안에는 프링글스 감자칩과 허쉬초콜릿이 들어있었다. 미제과자라니. ‘나는 미국인에게 과자를 선물 받은 사람이다!’ 나는 프링글스를 소중히 가방에 넣어 소풍을 갔다. 아이들에게 우리 동네 미국 아저씨가 특별히 가져다주었다고 자랑했다.
“왜 너만 그런 걸 줘?”
“나는 영어를 할 줄 아니까 줬겠지?”
영어를 할 줄 안다니. 거짓말이다. 나는 꽤나 재수 없는 어린이였다.
어느 날은 엄마가 옷을 한 보따리 싸들고 들어왔다. 어디서 샀냐고 물으니 미군부대 쓰레기장에서 가져왔다고 했다.
“미군부대 쓰레기장에 가면 쓸만한 게 얼마나 많은지 아냐? 여기 봐라 이 햄도 위에만 조금 먹고 그냥 버렸더라.”
엄마가 가져온 옷들은 거의 다 새것이었다. 하나도 지저분하지 않았고 디자인도 산뜻했다. 엄마는 무지개색의 층층이 원피스를 나에게 입히며 좋아했다.
“네가 키가 커서 미국애들 옷도 잘 받는구나.”
그렇다. 그때는 또래보다 키가 컸다. 나는 부대에서 쓸어왔다는 옷을 입어 재끼느라 바빴다. 엄마는 매일매일 다른 옷을 입고 나가도 다 못 입을 만큼의 옷을 가져온 것이다. 엄마는 동네 아줌마들과 가끔 미군부대 쓰레기장에서 ‘내가 너희들을 위해 이런 짓까지 한다’고 강조했는데 사실인지는 확인한 적 없다. 아무튼 윗부분만 쥐새끼가 파먹은 것처럼 도려져 있던 커다란 햄깡통은 선명하게 기억난다.
형편이 조금 나아지자 엄마는 제일시장의 수입코너 가게를 들락거리기 시작했다. 엄마는 거기서 코티분을 샀는데, 화장품도 미제가 최고라며 감탄을 금치 못했다. 미군 PX에서 빼온 물건들을 파는 곳이었다. 옥수수 그림이 있는 소시지는 엄청나게 짰지만, 입맛을 완전히 장악해 버렸다. 엄마는 가끔 미군 전투식량인 레이션을 사줬다. 누런 봉투에 각종 음식이 들어있었는데 영어를 모르니 하나씩 까면서 새로운 걸 발견하는 재미가 있었다. 한 봉지를 뜯으면 크래커가 나오고 한 봉지를 뜯으면 레토르트 형태의 미트볼인지 스튜 같은 것도 있고, 껌, 피넛버터, 설탕, 커피 같은 것도 담겨있었다. 오뚜기 3분카레가 나온 지 몇 년 안 됐을 때다.
미군부대의 이면을 보게 된 것도 그때쯤이었다. 지하철이 의정부까지 오지 않던 시절(의정부-창동 간 노선은 1986년 개통되었다.), 철길 주변에는 작은 술집들이 다닥다닥 붙어있었다. 머리를 한껏 부풀리고 짧은 치마를 입은 젊은 여자가 미군의 목을 끌어안고 술집 앞에서 뜨겁게 이별하고 있었다. 나는 그 언니의 치마가 너무 짧아 속옷이 보일까 봐 조마조마했다. 그렇게 줄지어 있는 술집들이 이 도시에서 어떤 역할을 하는지 어렴풋이 가늠하게 되었다.
엄마와 함께 다니던 교회에서는 미군부대를 방문하기도 했다. 캠프잭슨과 캠프레드클라우드, 둘 중 한 곳이었을 거다. 교인 중에 누군가 미군부대에서 일하는 사람이 있었다. 그때는 엄마는 그 사람이 정말 좋은 직업을 가진 거라며 “미국같이 강한 나라의 직원이니 얼마나 좋겠느냐”라고 했다. “너도 열심히 공부해서 미군부대 같은데 들어가면 좋겠다”는 말도 붙였다. 나중에 의정부 3동으로 이사했을 때 중랑천인지 백석천인지가 범람해 둑이 무너진 적 있다. 부대에서 나와 군인들이 제방을 다시 쌓았다. 엄마는 보리차를 끓여 시원하게 식힌 뒤에 그들에게 갖다주었다. 흑인병사가 엄마에게 땡큐라고 말했다. 엄마는 진짜로 미군들을 좋아했다.
상미네 집에서 제일시장으로 가는 길가에는 과일을 파는 수레가 있었다. 내가 기억하는 건 귤이었다. 다른 과일도 있음 직한데 내 기억에는 귤수레만 남아있다. 수레의 주인은 농인이었는데 엄마는 귤을 사면서 이런저런 이야기를 했다. 체격이 퉁퉁하던 귤장사 아주머니는 늘 서글서글하게 웃었다. 나는 말을 하지 못하다는 건 어떤 세계에서 사는 건지 궁금했다. 소리는 듣는 것 같은데 말을 하지 못하면 꽤나 답답하겠다는 생각도 했고, 엄마가 그 사람을 가엾게 여긴다는 걸 느끼고 있었다. 말을 하지 못하는 그 사람에 비해 우리 모친은 꽤나 말이 유창한 사람이었으니까. 골목에는 푸성귀를 이고 다니며 파는 노인이 오기도 했다. 노인이 머리에 이고 다니는 바구니가 무겁고 힘들다며 엄마가 비름나물을 잔뜩 사서 무쳐주었다.
상미와 함께 다니던 피아노학원은 우리 골목보다 중랑천에 더 가까웠다. 마당이 넓은 기와집이었는데 방이 여러 개 있었고, 방마다 피아노가 있었다. 학교를 다녀와 피아노학원에 가면 원장님의 남편이 런닝셔츠 바람으로 마당에 나와 담배를 피우고 있었다. 엄마는 “여자가 돈 벌면 사내놈들이 다 그 지경이 된다”라고 했다.
중앙로 주변엔 양주에 살 때 내 부모들이 거래하던 서점이 몇 개 있었다. 성화액자나 공예품을 만들어 납품하던 곳이라 가끔 같이 그곳에 인사를 가기도 했다. 중앙로에서 인생 첫 설렁탕을 먹어봤고, 냉면도 먹어봤다. 그때 중앙로의 그 냉면집이 지금의 의정부 평양면옥인지는 잘 모르겠다. 엄마는 냉면이 이북음식이라 알려줬고, 설렁탕은 서울음식이라 말해줬다. 중앙로에는 내가 먹어본 중 가장 뜨거운 음식과 가장 차가운 음식이 나란히 있었다.
상미네 골목에서 이사를 나왔다. 엄마는 외상값을 받지 못해 망한 거라고 말했다. 목사들이 책을 사가고 돈을 주지 않는다고 욕을 해댔다. 그러면서 엄마도 교회 일에 시들해졌다.
신곡동으로 이사하면서 상미와 소원해졌다. 자전거를 빌릴 데도 없었다. 신곡동에서는 아이들과 땅따먹기를 하며 놀았다. 김장김치를 100포기쯤 해서 그해 겨울 내내 김치만 먹고 지냈다. 봄이 되어 의정부 3동으로 이사를 했다. 마당이 있는 독채 전셋집이었다. 바로 옆에 중랑천이 있었다. 동네에는 상추를 키우는 집이 있어서 가끔 500원을 들고 가서 꽃상추를 한 보따리 사 오는 심부름을 했다. 마당이 있어 콩도 심고 고추도 심었다. 나는 그해 여름 방학 내내 심하게 앓았지만, 병원을 가진 않았다. 기력이 돌아올 때쯤 엄마가 제일시장에 가서 칵테일후르츠와 파인애플 깡통과 레이션을 사다 주었다. 지금도 몸살을 앓고 나면 가끔 칵테일후르츠 통조림이 생각난다. 그때쯤 동두천에 가서 돈까스를 처음 먹어봤다. 경양식집이었던 모양인데 스푼과 포크, 나이프가 여러 개 놓여 있었다. 무엇으로 먹어야 하는지 잠깐 고민했을 때 같이 있던 어른이 “어떻게 먹는지 알려줄까?”하고 물어서 “편한대로 먹죠.”라고 대답하고 아무거나 집어 들었던 기억이 있다.
의정부는 나에게 다채로운 ‘맛’을 보여줬다. 스팸, 미제 소시지, 레이션에 들어있던 미트볼, 깡통에 든 토마토 스파게티, 캠벨스프, 델몬트 파인애플 통조림과 칵테일후르츠 통조림, 코카콜라, 허쉬초콜릿, 밀가루 맛이 나던 미제 크래커, 돈까스, 부대찌개, 설렁탕과 냉면, 비름나물, 삼치, 상미네 공장에서 나오던 오뎅과 리어카의 귤. 포장마차의 우동과 중국집의 짜장면, 닭장에서 닭을 꺼내 그 자리에서 잡은 뒤, 기계에 넣고 털을 뽑아 그 자리에서 튀겨내는 닭튀김집도 있었다.
먹거리의 경로는 복잡했고, 파는 사람들도 다양했다. 조미료의 맛, 공장에서 나오는 가공식품의 맛을 알게 되었다. 액체로 된 것, 액체도 고체도 아닌 것, 고체로 된 것, 생김새와 맛도 향도, 그 음식이 오는 곳도 모두 다른, 의정부의 맛.
80년대 중반의 의정부는 모든 것이 모이는 자리였는지도 모른다. 나는 사람의 생김새가 모두 다를 수 있고, 다양한 직업이 있고, 돈을 버는 방법은 각양각색이며, 모든 집마다 적당한 우환이 있다는 걸 알게 되었다. 골목길에서 아이스크림을 먹는 친구를 반은 협박하고 반은 애원하며 뺏어 먹으면서도 단 한 번도 가난하다는 생각을 하지 못했다. 나는 그냥 ‘잠깐 우리집에 돈이 좀 없을 뿐’이라고 여겼다. 나에겐 가끔 허쉬초콜릿과 레이션을 먹을 일이 생겼기 때문에, 단맛에 취한 채 건방지고 드센 아이로 자라고 있었다.
엄마는 의정부3동을 정리하며 이제 서울로 돌아갈 때가 되었다고 했다. 양주에서 출발해 의정부를 거쳤으니 이제 다시 서울로 가야 한다고. 전쟁이 끝난 지 30년이 지났는데, 북에서 온 엄마는 계속 “남으로”를 외쳤다. 1987년, 엄마의 소원대로 서울에 다다랐다. 그래봤자, 서울의 북쪽 끝이었지만.
수요일엔마프 마을큐레이터 이하나(문화공동체 히응 대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