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0년대 어느 시점부터 ‘느슨한 연대’, ‘느슨한 공동체’라는 표현이 빠르게 퍼지고 유행하기 시작했다. 개인이 자기 삶을 온전히 책임져야 하는 무게가 점점 무거워질수록, 관계만큼은 가볍기를 바라는 심리가 작용한 것일까. 과거 공동체가 상징하던 끈끈함이나 강한 결속은 이제 건강한 관계를 지속하기 위해 피해야 할 요소로 여겨지곤 한다.
이러한 변화는 우리 사회가 만들어 온 ‘단단한 공동체’에서의 경험과 관계가 깊다. 학교, 회사, 군대처럼 사실상 사회의 일부라 불러야 할 조직들이 한국에서는 ‘공동체’라는 이름으로 불리며, 관계보다 규칙과 규율이 우선되는 경험을 강요해 왔다. ‘가족’ 역시 예외는 아니다. 경쟁 중심의 사회 구조는 가족을 생존을 위한 재생산의 기지로 만들었고, 구성원은 서로에게 생존을 위한 최선을 강요하게 되었다. 가족은 외부의 세상에서 짊어진 짐을 내려놓고 쉬고 회복할 수 있는 곳이어야 하지만 구성원들은 집에 와서도 쉴 수 없었다. 한국 사회에서 가족의 결속은 안식과 회복보다는 사회라는 전선에서 살아남기 위한 트레이닝의 목적에 맞춰져 있다. ‘긴장 상태’를 내려놓기가 힘들다.
‘느슨하다’는 말은 원래 줄이나 끈이 헐겁게 풀려 있는 상태를 뜻하는 형용사다. 이 단어는 동시에 우리의 마음을 묘사하기도 한다. 사전에는 ‘마음이 풀어져 긴장됨이 없다’는 뜻도 함께 실려 있다. 여기서 ‘긴장됨이 없다’는 표현이 유독 눈에 들어온다. ‘느슨한 연대’나 ‘느슨한 공동체’에서 사람들이 기대하는 것도 어쩌면 이 ‘긴장 없음’ 일 것이다. 공동체에서 ‘연대’나 ‘협력’과 같이 노력이 필요한 일보다는 ‘편안함’과 ‘여유’에 방점이 찍히는 셈이다.
그러나 어느 순간부터 이 '느슨함'이 너무 많은 가치를 괄호치고 포괄하게 되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빡빡한 삶과 공동체의 규율 등에 지쳤기에 또 다른 극단을 지향하는 것은 아닐까. 그래서 이런 질문을 던져본다.
"과연 느슨함만으로 충분한가?"
나는 이에 대답하기를 노력하기보다는 차라리 내가 생각하는 공동체의 모습에 대해 고민해 본다. 우선, 단단한-느슨함의 이분법이 아닌 복합적인 모델, '탄력적 공동체'에 대한 상상을 시작해 보았다.
탄력적 공동체에 대한 상상
‘탄력적 공동체’는 ‘연결의 거리감을 조율하며 관계의 부담을 줄이되 공동의 목표나 과제에 대해서는 결속할 수 있는 유연한 형태의 공동체’를 의미한다. 즉 연결의 강도(Strength)보다는 장력(Tension)을 조율하는 능력이 핵심이다.
중학교 시절, 나는 과학경진대회에서 ‘달걀 낙하 실험’에 참가했다. 주어진 재료는 빨대와 고무줄. 달걀을 높은 곳에서 떨어뜨려도 깨지지 않게 해야 한다는 과제는 단순하지만, ‘가볍지만 안전한 구조’를 만드는 일은 쉽지 않았다. 물론 빨대를 엮어 달걀을 완전히 감싸면 충격이 달걀까지 닿지 않지만, 구조물의 무게가 지나치게 증가한다. 반대로 빨대를 느슨하게 묶으면 달걀이 외부로 튕겨 나가 버린다. 충격이 전달되기 전, 에너지가 흡수되고, 흘러 나가도록 하는 설계가 필요하다. 그 원리의 핵심은 ‘탄성(elasticity)’이었다. 형태를 잡을 수 없을 정도로 느슨하고 흐물거려도 안 되고 너무 단단하게 엮여 있어서 구조의 변형이 없으면 충격은 그대로 전달된다. 구조는 단단히 잡혀있되 휘어지고 변형되어도 다시 그 구조로 돌아올 수 있는 탄성이 있어야 한다.
탄력적인 연결로 이어진 공동체를 상상하며 이때의 장면들이 떠올랐다. ‘단단하면서 느슨한’ 공동체라니, ‘따뜻한 아이스아메리카노’ 같은 단어가 생각나기도 하지만 불가능한 상상은 아니다. 오히려 사람들의 다양한 삶과 서로 간의 상호작용이 반영되는 커뮤니티의 모습을 ‘느슨하다’ 거나 ‘결속적’이라거나 하는 이분법으로 정리하는 것이 더 어려운 일은 아니었을까.
청년커뮤니티의 특징에서 바라본 탄력적 공동체의 가능성
나는 ‘단단하지도, 그렇다고 느슨하지만도 않은 중간적 공동체 가능성’에 대해 진지하게 고민할 계기를 2019년 한 연구에서 얻었다. 서울시 청년 허브의 의뢰로 서울의 청년커뮤니티의 활동 양상을 조사하던 때였다. 예상은 했지만, 기존에 내가 가지고 있던 커뮤니티에 대한 이미지, 가까운 유대나 강한 소속을 통해 유지되는 전통적 공동체와는 전혀 다른 장면들이 펼쳐져 있었다.
먼저 놀라웠던 것은 양적 규모였다. 흔히 청년 세대를 설명할 때 쓰이는 상투적 표현들, “개인주의적이다”, “혼자를 선호한다”는 이미지와 달리, 매년 수백 개의 청년커뮤니티가 활동 지원을 요청했다. 그들은 끊임없이 만남을 기획하고, 느슨한 협동을 실험하고 있었다. 나는 수백 건의 활동 지원서를 읽고, 다양한 인터뷰를 진행했다. 그 과정에서, 청년들이 커뮤니티를 ‘만들고 유지하는 방식’을 하나의 과정으로 파악하고, 청년들의 ‘커뮤니티 하기’를 정리했다.
이 과정에서 청년들의 커뮤니티 활동의 구조적 특성을 세 가지 축 밀도(density), 속도(tempo), 방식(mode)으로 정리할 수 있었다. 커뮤니티의 내적 상호작용은 이 세 요소의 조합을 통해 변화했다. 특히 인상 깊었던 것은, 거의 모든 커뮤니티가 공유하던 ‘적정 거리감’의 윤리였다. 그들은 “부담스럽지 않지만 사라지지 않는 관계”를 원했다. 관계는 존재하되, 그것이 개인의 시간과 정체성을 압박하지 않아야 했다. 많은 사람이 이런 관계를 ‘느슨하다’는 단어로 설명했지만 내게는 그것이 단순히 ‘느슨하기만’ 하게 보이지는 않았다. 오히려 ‘유연하다’는 단어가 어울린다고 생각했다.
나는 유연성이라는 특징을 새로운 사회적 합리성으로 바라보게 되었다. 오늘날의 청년 세대는 극도로 개인화된 사회 구조 속에서 살아간다. 가족은 더 이상 안정적 보호망이 아니고, 노동과 주거, 관계의 기반은 불안정하다. 모든 선택이 개인의 몫이 되었고, 그 선택의 결과 또한 전적으로 개인에게 귀속된다. 인터넷에서 회자하는 ‘누칼협(누가 칼 들고 협박했느냐)’이라는 표현은 이런 시대의 냉소적 반응이자, 개인이 감당해야 할 책임의 과잉을 드러내는 은유다.
따라서 청년들이 커뮤니티 참여를 계산하고 조절하는 것은 관계의 책임을 회피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취약한 자원 조건 속에서 관계의 지속가능성을 관리하는 실천이다. 그들은 ‘느슨한 소속’과 ‘적정한 거리’를 통해 불안정한 사회 구조 속에서 자신을 보호하며, 동시에 다양한 규칙들을 통해서 공동체의 지속가능성을 도모하고 있었다. 함께 모인 사람들이 지킬 ‘그라운드 룰(ground rule)’을 정한다거나 평등한 관계성을 위해 모두가 평어를 쓰는 것을 지향한다거나, 관계의 위계를 피하기 위해 일부러 비슷한 연령대의 사람들이 모이기도 했다. 이런 규칙들은 공동체 안에서 관계를 누리면서도 함께 달성하고 싶은 목표를 놓치지 않을 수 있도록 환기하고 결속하게 하는 역할을 했다.
사실 커뮤니티에 참여한다는 것은 자원의 분배 결정이 필요한 일이다. 시간, 감정, 노동, 재정 등 개인이 가진 자원이 유한한데 하나의 공동체에 깊이 관여한다는 것은 다른 가능성을 포기한다는 의미이기 때문이다. 과거에는 이러한 비용을 완충해 줄 수 있는 중첩적 네트워크가 존재했다. 한 관계에서 소진되더라도 다른 관계에서 회복될 수 있었고, 공동체 간의 교차적 소속이 관계의 안전망으로 작동하기도 했다. 그러나 오늘날의 원자화된 개인은 더 이상 그러한 ‘여분의 네트워크’를 갖지 못한다. ‘관계의 실패’는 단순한 좌절이 아니라, 곧 사회적 고립으로 직결될 수 있다. 이런 상황에서 청년들은 커뮤니티의 지속가능성보다는 개인의 삶의 지속가능성을 우선순위에 놓고 활동할 수밖에 없다.
결국, 오늘날 공동체의 지속 가능성은 결속의 강도가 아니라 유연한 연결의 구조적 설계에 달려 있다. 공동체가 우선이 되어 공동체를 위한 판단과 자원 배분을 강요하는 것이 아니라 적당한 연결의 강도를 구성원들이 함께 찾아가면서 서로 합의한 공동체 활동의 규범을 통해 공동체 안에서의 안전감을 유지하는 것이다. 탄력적 공동체는 ‘단단한 공동체’와 ‘느슨한 공동체’라는 이분법 속에서 개인이 느낄 수 있는 ‘공동체에 대한 회의감’에서 탈출할 수 있는 길을 열어준다. ‘내가 너무 많이 헌신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라는 무게감과 ‘관계에서 오는 충족감을 느끼기 힘든’ 느슨함 외에도 가능한 관계 맺기의 방법이 있다는 제3의 길이다.
노인 커뮤니티를 통한 ‘탄력적 유대’ 연구 사례
이런 생각을 한 사람이 나만은 아니었다.(사실 ‘나만 이런 생각을 했을 거야’는 생각이야말로 가장 위험하다) 2019년, 미국의 질적 사회학자 스테이시 토레스(Stacy Torres)는 「탄력적 유대감: 사회적 관계에서의 거리와 친밀감(On Elastic Ties: Distance and Intimacy in Social Relationships)」이라는 논문을 발표했다. 이 연구는 뉴욕시에 있는 ‘라 마졸렌’이라는 빵집을 중심으로 형성된 노인들의 일상적 상호작용을 수년간 관찰한 인류학적 현지 조사에 기반한다. 토레스는 기존의 사회조사 방식—예를 들어 “가족·친구 수”, “정기적 교류 빈도”와 같은 설문항목으로는 포착되지 않는 비형식적이고 일상적인 사회적 관계의 결을 탐구했다.
그녀는 이렇게 말한다.
“이들에게 설문조사를 실시했다면, 대부분은 ‘사회적 지원망이 거의 없는 노인들’로 분류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현장 관찰은 전혀 다른 사실을 드러낸다. 그들의 삶에는 ‘탄력적 유대(elastic ties)’가 존재했다.”
내가 살핀 한국 청년들의 사례가 목적을 가진 의도적 커뮤니티였다면 토레스는 뉴욕의 한 빵집을 중심으로 모이는 노인들의 관계망을 살피며 노인들의 일상적 ‘관계 맺기의 방식’의 특징을 정리했다는 점이 다르다. 하지만 흥미로운 것은 세대도, 문화도, 관계의 형식도 다르지만, 이들이 보여준 관계의 감각은 한국 청년들이 말하는 “부담스럽지 않으면서 놓치고 싶지 않은 거리감”과 놀라울 정도로 닮아 있었다는 것이다.
토레스는 관찰을 통해 노인들이 ‘친밀함과 거리두기’를 동시에 관리하는 다양한 사회적 전략을 구사하고 있음을 발견했다.
• 어떤 노인은 일부러 이름을 묻지 않거나 기억하지 않았다. 기억력 저하는 그들에게 자연스러운 ‘핑계’였다.
• 또 다른 노인은 관계가 지나치게 가까워지는 것을 경계하며, 때때로 상대를 의도적으로 비난하기도 했다.
• 그러나 동시에 이들은 가족에게조차 털어놓지 못한 내밀한 이야기 건강 문제, 상실의 두려움, 경제적 곤란을 스스럼없이 공유하기도 했다.
이러한 역설적 관계, ‘친하지만 친하지 않은 척’하는 관계는 단순한 모순이 아니라 취약성(vulnerability)에 대한 사회적 방어였다.
토레스는 이들이 가진 ‘취약성’에 주목한다. 고령의 노인이면서 대부분 일인가구인 이들은 이미 가족의 지원마저 끊어진 상황이었다. 이들에게 친밀감은 삶을 지탱하는 정서적 자양분이면서 동시에 예고된 상실이었다. 누군가와 깊이 연결될수록, 상실이 다가왔을 때의 고통은 감당하기 어려워진다. 이들은 스스로도 보호하지 못하는 상황에서 타인의 돌봄까지 감당할 여력이 없었고, 친밀한 관계에서 타인의 돌봄 요구를 거절하기 힘든 상황을 어려워했다.
토레스는 마크 그라노베터(Mark Granovetter)의 ‘약한 연결’(Weak tie)와 ‘탄력적 연결’을 비교하며 탄력적 유대관계가 약한 연결(느슨한 연결)의 한 유형이 아닌 새로운 유대 형태로 개념화할 필요가 있다고 이야기한다. 그라노베터가 유영화한 약한 유대관계는 단순히 일시적인 연결 혹은 건너 건너 연결되어 정보나 자원을 주고받는 관계다. 반면 ‘탄력적 연결’은 전통적 강한 연결과 약한 유대 사이에서 존재를 지속하며 거리를 두면서도 직접적인 친밀감을 유지할 수 있는 새로운 범주라는 것이다.
토레스는 노인 간의 관계망이 더 친밀해져서 서로를 돌볼 수 있어야 한다거나 사회가 이를 지원해 주어야 한다고 주장하지 않는다. 오히려 거리감을 두면서도 지지와 도움을 주고받을 수 있는 관계를 유지하고 싶은 이 ‘탄력적 연결’이 제공하는 이점에 주목하자며 이렇게 말한다.
‘거리 두기와 친밀감 축소의 동기가 동시에 존재하는 상황에서 탄력적 연결의 공동체는 다른 상황에서는 고립될 수 있는 사람들이 연결을 유지하는 중요한 수단으로 기능한다. 타인과의 관계에서 오는 압박이 지나칠 때, 탄력적 유대는 대립 없이 물러설 수 있는 길을 제공한다.’
탄력적 공동체라는 가능성 혹은 상상
사람과 사람이 맺는 관계는 항상 ‘모호함’을 띤다. 나는 저 사람과 친하다고 생각하는데, 그 사람은 그 정도는 아니라고 생각하기도 하고 그 반대의 경우도 있다. 탄력적 공동체에 대한 상상은 일차적으로 이 모호함을 설명할 더 많은 표현의 방법을 찾는데 있다. 누군가는 느슨함, 단단함 외에 탄력적이라는 말을 추가하고 설명하며 우리가 관계 맺고, 활동하고, 추구하려는 공동체의 모습에 대한 더 많은 이야기가 만들어지길 바란다. 누군가는 ‘끈적이는’ 혹은 ‘매듭 져있는’ 혹은 ‘조각으로 이어진’ 공동체를 상상하고 설명하는 것도 좋다.
서울의 청년커뮤니티 사례와 뉴욕 노인들의 네트워크 사례는 문화적 배경도, 세대적 조건도 다르지만, 탄력적인 공동체의 상(혹은 더 많은 공동체의 모습에 대해)을 우리가 왜 고민해야 하는지에 대한 공통의 고민을 보여준다.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사회, 경제, 관계적 측면에서 ‘취약성’의 구조 속에 살아가고 있다. (대 외로움의 시대, 연결을 고민하다) 공동체는 분명 그 취약함을 완충할 수 있는 사회적 안전망이 될 수 있다. 그러나 현실에서는 개인이 감당해야 할 시간, 감정, 자원의 제약이 커져, 공동체에 진입하는 일조차 버겁게 느껴진다. 그렇기에 우리는 평온한 시기에는 느슨하게 편하게 진입할 수 있지만, 위기의 순간에는 단단하게 서로를 보호해 주는 안전망도 될 수 있는 유연한 구조의 공동체가 필요하다.
이 이야기는 하나의 아이디어에 가까운 논의일 수 있다. 그러나 불완전하기에 더 필요한 이야기이기도 하다. 공동체에 대한 논의가 빠르게 변화하는 사회에서 조금 늦게 현실을 따라잡아 가고 있는 듯하다는 생각이 들기 때문이다. 많은 사회문제의 대안으로 공동체가 제시되지만, 현대사회에 적합한 모델을 내어놓는 것은 힘든 상황에서 상상력을 자극하는 새로운 개념과 이야기들이 좀 더 실험적으로 오고 가기를 원한다. (공동체 이해 방식의 변화와 새로운 공동체 모습에 대한 상상) 이제 공동체는 이상적인 유대의 형태, 따라야 할 본이나 모델이라기보다는 변화하는 세계 속에서 서로의 취약함을 지탱하기 위한 사회적 장치 혹은 지지의 구조로 이해되어야 하는 것이 아닐까라는 생각을 한다. 여러분도 스스로의 공동체를 해석하는 새로운 개념에 대한 탐구를 시작해 보시기를 바라본다.
수요일엔마프 큐레이터 송하진(고래) 밀양소통협력센터 팀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