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족’이라는 이름 안에 숨겨진 부담

혼자가 아닌 삶을 위한 마을의 역할

뭐라도 해보려던 스무 살에 아버지가 쓰러졌다. 2011년 일이다. 그 뒤 1인분의 삶으로 돌아가지 못했다. 아버지는 다시 일을 나가지 못했고, 대부분의 시간을 술에 취해 있었다. 저혈당증으로 환각에 시달리다가 또다시 쓰러졌다. 알코올성 치매 초기에 진입했다. 발등에 화상을 입었다. 그러는 동안 나는 병원에서 ‘보호자’로 불렸다. 공공 기관에서 복지 지원을 받으려 할 때는 ‘대리자’이거나 ‘부양 의무자’였다. 주위에서는 심심찮게 ‘효자’로 부르기도 했다. 어느새 2인분의 삶을 담당하는 ‘가장’이 됐다. 돈, 일, 질병, 돌봄이 자주 나를 압도하거나 초과했다. 고강도 저임금 장시간 노동을 해야 했고, 눈앞에 벌어지는 일들을 해결하느라 안간힘을 다 했다. 외로움과 고립감이 뒤따랐다.

-조기현, 《아빠의 아빠가 됐다》(이매진, 2019)에서


‘가족 문제’에서 ‘사회 문제’로 : 가족돌봄청년1)의 재조명


조기현 작가를 처음 알게 된 것은 청년지원기관에서 일하던 중, 참여자로 그를 만나면서였다. 글을 쓰고 영화를 만들고 있다는 이야기를 들었던 터라 단순히 문화예술 분야 진로를 고민하는 청년이라고 생각했었다. 그러던 중 그가 책을 출간했고, 막연히 청년의 여러 고민을 담은 에세이일 것이라 여겼던 나는 예상보다 깊고 묵직한 이야기를 마주하게 됐다. 바로 스무 살 청년이 치매에 걸린 아버지를 돌본 시간을 기록한 《아빠의 아빠가 됐다》였다.


이 책은 가족돌봄은 오롯이 가족 내부의 문제로 여겨왔던 나의 인식을 뒤흔들었다. 시종일관 담담한 서술에도 불구하고 ‘가족돌봄과 생계’라는 이중의 책임을 짊어진 청년의 삶은 무겁고 절박했으며, 이후 이 책을 계기로 사회적 관심이 생겨나기 시작했다. 정책토론회와 연구가 이어졌고, 관련 지원정책들도 하나둘 만들어지기 시작했다.


가족돌봄청년의 규모를 정확히 파악할 수 있는 통계는 제한적이지만, 한국보건사회연구원(KIHASA)은 다양한 자료를 분석해 13~34세 청년 중 주된 돌봄 책임을 지고 있는 이들이 약 9만 2천 명에 달한다고 추정하고 있다(함선유, 2023). 이는 결코 적지 않은 수치이며, 드러나지 않은 사례까지 포함한다면 그 규모는 훨씬 더 클 것으로 보인다. 특히 경기도는 청년 인구가 많아 가족돌봄청년 수가 약 2만 명으로 가장 많은 것으로 추정된다.


이제는 가족돌봄 아동과 청(소)년의 상황을 사회적 책임의 영역으로 인식하고 다양한 정책적 지원이 이루어지고 있지만, 불과 몇 해 전까지만 해도 이는 ‘소년소녀가장’이라는 이름 아래 개인이 감당해야 할 문제고 치부되곤 했다. 최근 들어 돌봄에 대한 국가의 역할이 강조되고, 청년 문제 전반에 대한 인식이 변화하면서 가족돌봄청년은 사회적 지원의 중요한 대상으로 자리 잡고 있다.


이에 따라 지자체마다 가족돌봄청년에 대한 정의가 조금씩 달랐지만, 2027년부터 시행 예정인 「가족돌봄 등 위기아동․청년 지원에 관한 법률」은 이 개념을 보다 명확히 규정하고 있다. 이 법의 시행으로 ‘34세 이하의 돌봄이 필요한 가족에게 간호․간병 및 일상생활 관리 또는 그 밖의 도움을 제공하고 있는 가족돌봄아동․청년’을 정책 대상이 명확히 규정되고, 향후 보다 체계적인 지원이 가능해질 것으로 기대된다. 특히 전통적인 복지 대상자 선정 기준이 소득과 재산에 초점을 두었던 데 반해, 가족돌봄청년 정책은 돌봄의 강도와 돌봄 전담 정도를 기준으로 삼는다는 점에서 큰 의미가 있다.


image.png


독립을 준비해야 할 시간, 돌봄에 머문 청년들


청년의 가족돌봄 문제에 주목하게 된 데에는 ‘이행기’라는 청년의 특성과 그에 따르는 사회적 맥락이 자리하고 있다. 청년은 단순히 나이로 구분되는 집단이 아니라, 아동․청소년기의 의존 상태를 벗어나, 성인으로서의 독립적 삶을 구축해 가는 과정이자 상태로 정의된다. 교육을 마치고, 노동시장에 진입하며, 부모(또는 양육자)로부터 경제적·정서적으로 독립하고, 주거와 가족을 구성하거나 홀로 자립해 나가는 과정은 단일한 사건이 아니라 삶의 여러 영역에서 점진적으로 이루어지는 복합적인 이행이다.


과거에는 청년을 ‘신체적, 정신적으로 한창 무르익은 시기’로 보았지만, 오늘날에는 사회적 책임을 준비하고 자신의 삶을 설계해 가는 이행기의 상태로 인식하는 경향이 강하다. 하지만 현실에서 청년의 이행은 주거 불안, 학자금·생활자금 대출, 불안정한 일자리 등으로 지체되고 있으며, 이러한 지체 현상은 단순한 개인 문제가 아닌 사회 구조의 문제로 자리 잡고 있다. 이 과정에서 지체 상태를 보완하고 이행 과정을 뒷받침하기 위한 청년정책이 필요성을 인정받고 본격화되었다.


이행의 지체는 다수 청년에게 공통적으로 나타날 수 있지만, 가족돌봄청년에게는 훨씬 더 복합적이고 구조적인 형태로 나타난다. 예를 들어, 가족돌봄청년은 고졸 이하 학력 비율이 일반 청년에 비해 높고, 가구 및 개인 부채 규모는 두 배 이상 많으며, 임금 수준도 동년배에 비해 낮은 경향을 보인다. 돌봄 책임이 어린 나이에 갑작스럽게 부여되며 학업이나 진로는 중단되기 쉽고, 이로 인해 경제적 위기와 심리적 불안정이 연쇄적으로 나타난다.


개인의 선택이나 능력 부족이 아니라 가족돌봄의 책임으로 인해 청년이 자신의 삶을 시작하지 못하게 되는 구조는, 단지 개인의 책임으로 돌릴 수 없는 문제다. 이제는 청년의 가족돌봄 문제를 ‘개인의 사정’이 아닌 ‘사회가 함께 감당해야 할 책임’으로 인식해야 한다. 청년이 제 역할을 해나갈 수 있도록, 그들이 짊어지고 있는 돌봄의 무게를 나눌 수 있는 사회적 안전망이 필요하다.

청년을 품는 마을, 돌봄을 나누는 공동체

KakaoTalk_20260325_112628566.png
KakaoTalk_20260325_112533090.png
KakaoTalk_20260325_112551415.png

가족돌봄청년은 종종 보이지 않는 위치에 머물러 있다. 눈에 띄는 돌봄의 장면 뒤에는 학업과 일을 병행하며 가족을 돌보는 청년이 있고, 이들은 여전히 자신이 처한 상황을 ‘개인의 책임’으로 감내하고 있는 경우가 많다. 그렇기 때문에 가족돌봄청년 지원에는 제도적 지원과 함께 일상 속에서 그들을 포용할 수 있는 공동체적 접근이 반드시 병행되어야 한다. 바로 이 지점에서 마을공동체의 역할이 주목된다. 마을은 청년에게 있어 가장 가까운 사회이며, 가족 외 첫 번째 사회적 관계망이 형성되는 공간이기도 하다. 일상적인 만남과 관계 속에서 이루어지는 공동체의 지원은, 가족돌봄청년에게 정서적 안정과 실질적인 생활의 버팀목이 될 수 있다.


최근 고립·은둔 청년, 자립준비 청년 등 다양한 청년에 대한 사회적 관심이 높아지면서 청년을 조기에 발견하고 관계를 맺는 지역 네트워크의 중요성이 커지고 있다. 물론 각종 지원 서비스는 전문기관에서 제공될 수 있지만, 청년이 그 정보에 접근하기 위해서는 가장 가까운 사람들과 장소에서의 연결이 선행되어야 한다. 가족돌봄청년의 경우, 제도적 지원에 닿기까지 긴 시간이 걸리곤 한다. 학교, 복지관, 주민센터, 청년센터 등 생활 가까이에 있는 기관들은 서로 유기적으로 연계되어 청년에게 전문 지원을 제공하고, 마을이 평소의 관찰과 관계 속에서 자연스럽게 ‘신호’를 포착하여 지역 내 기관·자원과 연결하는 역할을 한다면 가족돌봄청년이 제도적 지원에 연결되는 시간을 줄일 수 있다.


마을 안에는 다양한 세대와 경험을 가진 주민들이 함께 살아간다. 자립을 이룬 선배 청년, 청년 문제에 관심과 이해가 깊은 지역 어른, 과거에 유사한 돌봄 경험을 가진 이웃 등은 모두 소중한 멘토 자원이 될 수 있다. 이들과 가족돌봄청년을 연결하여 실질적인 조언과 정서적 지지를 주고받는 커뮤니티 멘토링 프로그램을 운영하는 방법도 생각해 볼 수 있다. 지역기관과 연계하여 운영하거나 마을공동체가 자체적으로 기획할 수도 있다. ‘함께 길을 찾아보자’는 공감과 신뢰 기반의 관계 맺기는 마을공동체가 가장 잘하는 영역이다.


가족돌봄청년이 겪는 또 다른 어려움은 사회적 고립이다. 하루 대부분을 돌봄과 생계, 학업에 쏟다 보면 친구를 만나거나 이웃과 교류할 기회조차 사라진다. 마을에서 열리는 축제, 동아리 활동 등에 가족돌봄청년이 참여할 수 있도록 작은 혹은 소심한 권유와 넉넉한 배려가 필요하다. 이러한 비공식적 참여 기회는 단절된 사회 관계망을 회복하고 스스로를 공동체의 일부로 느낄 수 있게 해 준다. 더 나아가 공동체 활동의 주체로 자리 잡기 위해 장소 접근성을 높이고, 단기 돌봄서비스를 연계해 청년이 자기 시간을 확보하도록 참여 장벽을 낮추는 세심한 설계도 필요하다.


기존에는 주로 육아에 적용되었던 마을 돌봄 모델을 가족돌봄청년에게 적용해 보는 것은 장기적으로 마을공동체가 함께 고민하고 시도해봐야 할 부분이다. 장을 대신 봐주거나, 청년에게 급한 일이 생겼을 때 돌봄 대상자와 함께 있어 주거나, 집안일을 잠깐 도와주는 등 큰 전문성을 요구하지 않는 일상적인 돌봄 활동을 품앗이 방식으로 나눌 수 있다면 돌봄의 부담을 가볍게 나눌 수 있다. 마을이 일정 부분 이러한 돌봄 지원을 일상돌봄서비스와 같은 제도적 틀 안에서 함께 운영한다면, 작지만 실질적인 연대를 실현할 수 있다.


정부나 지자체의 가족돌봄청년 정책은 점점 다양해지고 있지만 당사자 입장에서는 정보에 접근하는 것 자체가 큰 과제가 될 수 있다. 실제로 한 청년은 다른 청년지원서비스를 신청하기 위해 주민센터를 방문했다가, 본인이 차상위 계층 요건에 해당된다는 사실을 처음 알게 되었다고 털어놓은 적이 있다. 그제야 돌봄서비스 신청 안내 문자를 받았다는 이 경험은, 지원 제도가 있어도 청년이 그 존재를 알지 못하면 ‘무쓸모’라는 사실을 잘 보여준다. 마을 정보를 공유하는 온·오프라인 공간에 돌봄가족이 있는 청년과 주민에게 정보를 제공하는 것도 작지만 중요한 지원으로 이어질 수 있다.


가족돌봄청년을 지원하는 일은 어느 한 국면에 머물지 않는다. 청년을 발굴하고, 정책 정보를 제공하고, 다양한 자원과 연결하며, 돌봄의 부담을 함께 나누고, 청년이 자신의 삶을 다시 계획할 수 있도록 돕는 과정은, 단기 개입이 아닌 지속 가능한 사회 안전망 안에서 이루어져야 한다. 청년을 위한 정책은 정부와 지자체가 만들지만, 청년의 곁을 지키는 것은 결국 ‘사람’이다. 가까운 마을, 부탁할 수 있는 이웃, 작지만 반복되는 만남과 연결이 가족돌봄청년의 삶을 회복시키는 가장 따뜻한 사회적 기반이 될 수 있다.

1) 비록 ‘가족돌봄청년’을 중심으로 서술하였으나, 아동·청소년 시기부터 돌봄의 부담을 짊어져 온 경우까지 포함하고 있어, 이는 가족돌봄아동·청소년을 포괄한 ‘가족돌봄’의 책임을 지고 있는 청년 전반을 아우르는 개념으로 이해하는 것이 타당할 것이다.


경기도마을공동체지원센터 '수요일엔마프'


정현미 더가능연구소 수석연구원

작가의 이전글다문화의 과거, 현재, 미래: 브래드포드와 안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