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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부엉이 아빠 Jul 24. 2022

EP11. 관악산 남북 종주기

사당역-마당바위-연주대-운동장능선-안양종합운동장(실내수영장)-범계역-용산

(이 글을 발행하는 시점에 유럽은 폭염으로 난리지만, 블로킹 고기압이라는 현상으로 인해서 한국은 연일 선선한 날씨가 이어지고 있습니다. 하지만 7월 중순 무더위 한가운데 있다고 가정하고 이 글을 읽어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요즘 엄청 더우시죠? 그렇치만 우리 이열치열의 정신으로 저와 함께 오늘 하루 종일 이 무더위와 어깨동무 해볼까요? 동행할 친구들도 몇 명 있습니다. 오늘 늦지 말라며 벌써 새벽부터 전화기 진동을 울려대는 녀석들인데요, 제 대학 동아리 후배들입니다. 평일인데도 불구하고 월차를 내고 참여해준다니 이 더운 날씨에 열사병도 무섭지 않을 천군만마를 얻은 기분입니다. 성격 좋은 친구들이라 동행해도 크게 부담은 없을 것이니 걱정은 마세요. 그리고 오늘 일정이 잘 마무리되면 즐거운 뒤풀이 자리도 마련되어있으니 기대하셔도 좋을 것 같습니다^^.


위아래로 기수가 얼마 차이 나지 않는 예닐곱 명 모인 단체 톡방에서 이 녀석들이 '형님 형님' 하고 있지만 같이 나이 들어가는 처지라 말끝은 거의 짧게 끝납니다. 재학생 때 같았으면 상상도 못 할 일이지만, 그래도 이 험난한 세상 말동무 길동무가 곁에 몇 명은 남아있는 것 같아 그 흐뭇함에 그 반말긴말 중간쯤 되는 말투를 비비적 뭉개 버립니다. 아, 사족을 자꾸 다네요. 각설하고, 그럼 지금 출발해 볼까요?


산행 준비

갈아입을 옷들, 우비, 상비약, 예비 배터리, 선크림, 돗자리, 수건, 등산스틱이 없다는 녀석 빌려줄 집사람의 등산스틱, 수영복이 없다는 녀석 빌려줄 예전에 입던 빛바랜 수영복, 등등을 어젯밤에 미리 등산배낭에 차곡차곡 챙겨놨지만 신선도를 위해 물, 아이스 아메리카노, 과일은 아직 챙기지 않았습니다. 앗, 조심해 주세요. 아직은 집사람과 아이들은 자고 있거든요. 고양이 발걸음으로 조심조심 주방으로 따라와 주세요.


어제 끓여놓은 보리차를 물병 두 개에 나눠 담고, 자두를 씻어서 산행 중에 으깨지지 않도록 플라스틱 통에 담습니다. 다른 먹거리는 챙기지 않냐고요? 네, 김밥과 감자, 고구마, 군것질 거리는 후배 녀석들이 알아서 준비해온다고 하네요. 그 다음 제일 중요한 아이스 아메리카노입니다. 올해 초 구매해서 겨울 동해안 가족여행 때 사용했던 대용량 보온병의 위력을 시험해 봐야겠습니다.

1.5리터 대용량 보온병

냉장고에 얼려놓은 얼음판을 있는 대로 꺼냅니다. 그 판을 양쪽으로 뒤틀어서 얼음을 빼내는데 잘 빠지지가 않습니다. 왜 안 나오냐 탁탁 쳐댔더니... 그 소리에 둘째와 셋째가 깨서 거실로 나오네요. "아빠 오늘 산에가??!!" 성장을 위해서 잠이 중요한데 아빠의 이기적인 소음에 발육에 나쁜 영향을 미친 게 아닌가 미안한 마음이 듭니다. "아직 새벽이야, 얼른 다시 방에 들어가세요", 역시 제 말은 귓등으로도 듣지 않고 둘이서 칼군무하듯 장난감 서랍을 열고 있습니다. 시간이 빠듯하여 더 이상 잔소리는 못합니다.


세 개의 얼음판을 모두 빼내고서야 대용량의 보온병에 보기 좋게 얼음이 차곡차곡 쌓입니다. 커피 캡슐을 대충 여섯 알정도 집어서 커피머신에 돌려 보온병 얼음 위에 뜨겁게 타다닥 부으니, 냉기가 바스러져 수증기가 올라옵니다. 우리 주위에 흔하게 널려있는 커피전문점의 아이스 아메리카노 비율로 어슴푸레 맞춰집니다. 너무 무식하게 1.5리터 씩이나 싸가는 거 아니냐고요? 음, 여름 산행의 위력 앞에 우리가 살아남을 수 있는 일용 할 양식이 될 거라고 믿어 의심치 않습니다.  


모든 준비물을 바리바리 싸고 등산배낭을 들쳐 메니 허리가 휠 것 같습니다. 필요하다고 생각한 것만 쌌기 때문에 뺄 수 있는 것이 없습니다. 한번 무게를 한번 달아보겠습니다.

등산가방 무게 11.7 kg

11.7kg... 뭐, 완전군장으로 행군하는 군인들도 있는데 하체 운동한다는 셈 치고 등에 등산배낭을 한번 튕겨주며 가벼운 마음으로 "아빠 다녀올게!"를 외치고 현관문을 나섭니다. 이제부터는 좀 빠른 걸음으로 따라오셔야겠습니다. 서둘러 지하철 역에 가야지 앉아서 갈 수 있거든요.


사당역 이동

부랴 부랴 왔는데도 역시 서울행 플랫폼에는 줄이 길게 늘어서 있습니다. 괜찮습니다. 한 차 보내고 다음 차에 앉아서 가면 되죠 뭐. 5분, 10분 늦어도 뭐라고 할 후배 녀석들이 아닙니다. 줄 서있는 몇 명이 발을 동동 구르고, 시계를 자꾸 쳐다보고, 열차 운행정보를 계속 들여다보는데 지각인가 봅니다. 출근에 바쁜 그들 틈에서 5분 10분쯤이야 하며 여유 부리는 우리가 조금 얄미워 보이네요.


여기, 여기 빨리 제 옆에 앉으세요. 왜 이렇게 굼뜨세요. 그러다가 못 앉으면 큰일 납니다. 곧 서있기도 힘들 정도로 사람들이 꽈악 찰 거예요. 그럼 한 숨 주무세요. 저는 책 좀 보면서 가겠습니다. 가방이 그렇게 무겁다면서 책까지 챙겼냐고요? 네, 사당역까지 가려면 한 시간 반은 가야 해요. 그 지루한 시간에 책은 필수 품이지요. 무슨 책이냐고요? 정유정 작가님의 소설 '종의 기원'이에요. 반 정도 읽었는데 계속 궁금증을 자아내게 만드는 신기한 이야기네요.


일어나세요, 다음 동작역에서 4호선으로 갈아타야 합니다. 벌써 후배 녀석들은 15분 전 대기로 사당역 4번 출구에 다 도착해있다고 하네요. 동작에서 사당역은 두 정거장이라 10분이면 충분한 듯 보이는데 사당역에 도착하니 4번 출구까지 한참이 걸립니다. 약속시간보다는 15분 지각입니다. 후배들은 15분 전에 도착했으니 30분 정도를 기다린 셈입니다.


저기 저기, 세명이 편의점 옆에 있네요. 짜식들 오랜만에 봤더니 이미 한 녀석은 머리가 많이 빛나네요. 그래도 학생 때의 천진난만한 표정은 벗겨지지 않고 그대롭니다. 졸업하고 녀석 결혼식 때 한번 얼굴 봤으니 9년 만에 만나는 셈이네요. 세월 참.


왜 이렇게 늦게 왔냐, 왜 이렇게 살이 쪘냐, 뭘 그렇게 등에 무겁게 짊어지고 왔느냐 핀잔들을 주지만 역시 어색함과 격식은 없어 보입니다. 시간은 순간적으로 거꾸로 흘러 우리들은 이미 대학생이 되어 있습니다. 어제 밤잠 설쳐대던 설렘이 격하게 해소됩니다.


아, 지하철에서 내려서 겨우 여기 잠시 걸어왔는데 어깨가 빠질 것 같습니다. 짐을 좀 덜어야겠습니다. 가방에서 대용량 보온병을 꺼내 준비해온 종이컵에 얼음과 함께 아메리카노를 가득 따라 줍니다. 녀석들이 시작부터 이게 뭐냐며 폭소를 터뜨리지만 그 어떤 고급 커피보다 맛있다며 너스레는 떨어줍니다. 하지만 그것으로는 부족합니다. 한잔 더 마셔야 한다며 가득 또 따라줍니다. 차가움에 띵하도록 머리가 아파 오겠지만 두 번째 잔의 남은 얼음까지 바드득 씹어먹어 주네요. 그 배려에 대용량 보온병의 수위는 반으로 줄었습니다. 덕분에 저의 발걸음도 두배는 가벼워집니다.


등산 시작

대로변 옆 언덕길로 쭉 따라 올라오니 저기 등산로가 보입니다. 각오들 단단히 하고 오라고 했지만 운동을 꾸준히 해오는 녀석들이라 사실 제일 걱정되는 것은 접니다. 들킬세라 어떠한 어려움이 있더라도 우리가 계획한 데로 변경 없이 강행한다고 호언장담해줍니다. 녀석들은 형님 낙오하면 바로 버릴 거라면서 으름장으로 동조합니다.

계획한 관악산 남북 종주 등반로 / 사당역 방면 관악산 등산로 초입에 있는 안내도

저기 보이는 안내도에 관음사를 지나서 관악능선 따라 쭈욱 올라가면 된다며 세 번째 등반 밖에 안되면서 우쭐해 봅니다. 안내도를 따라 상세히 설명하고 있는데 저 녀석들 벌써 앞으로 가고 있네요. 원래 이런 분위기입니다. 당황하지 마시고 얼른 따라가시지요.  


30분도 채 오르지 않았는데, 벌써 숨이 차오르고 땀범벅이네요. 다리가 후들거립니다. 첫 번째 낙오입니다. 녀석들 낙오하면 버릴 거라더니 다행히 같이 쉬어 주네요. 이렇게 쉽게 지칠 리가 없는데 무더위와 더불어 무거운 배낭을 원망해 봅니다.

바람은 불어오지 않지만 훤히 내려다 보이는 서울 시내가 시원한 바람을 대신해줍니다. 휴, 이제 시작인데 완주할 수 있을까 걱정입니다. 다시 대용량 보온병에 아메리카노를 시원한 게 한잔씩 말아 마시고 자리를 박차고 일어납니다. 출발!


비 오듯 땀이 흐른다고 걱정하지 마세요. 땀이 많은 편입니다. 이거 보세요 이마에 스포츠 헤어밴드를 짜니 마치 물걸레 짜듯 쭈욱 짜지지요? 예전 현장에서 일할 때 땀이 작업복을 적시다 못해 흘러내려서 안전화에 고여서 발바닥이 질퍽질퍽해질 정도였으니 말 다했지요. 죽지 않습니다. 이 상태로 쭈욱 갈 수 있습니다.

  

계단들이 끝도 없이 펼쳐지네요. 이렇게 산에 올라가기도 힘든데 이 수많은 계단들을 일일이 만든 사람들의 노고를 생각하니 숙연해집니다. 인간의 이기심에 의해 만들어진 등산로의 계단이지만, 또 이렇게라도 해놓지 않으면 더 많이 자연이 훼손될 수 있기에 고마움으로 한발 한발 내딛습니다.


중간 간식 시간

역시 무더위 때문에 금방 지쳐 버립니다. 중간 간식 먹자는 핑계로 앞서가는 세 녀석을 다시 앉힙니다. 두 번째 낙오입니다.

각자의 물병과 간식을 꺼내려고 하지만 제 아이스 아메리카노와 자두로 빠르게 선수 칩니다. 조금이라도 빨리 제 짐을 덜어야겠습니다. 후배 녀석이 싸온 방울토마토가 꿀 맛입니다. 자두의 단 맛이 느껴지지 않을 정도로 달콤함이 입안으로 톡 하니 퍼집니다. 요즘 방울토마토는 이렇게 달게 나온다고 하네요. 형님 이러다가는 시간 안에 종주 못합니다, 빨리 갑시다라는 재촉에 얼른 일어나야겠습니다.


지금부터 정상까지는 말없이 오르겠습니다. 천천히 따라오시지요.

마당바위
관악문

관악문까지만 가자, 관악문까지만 가자, 관악문을 통과하고 퍼졌습니다. 세 번째 낙오입니다. 이미 땀은 상의를 다 적셨고, 바지까지 적셔 내려가고 있습니다. 땀을 1리터 이상은 흘린 것 같습니다. 쓰러지지 않기 위해서 좀 쉬었다 가야겠습니다. 저 멀리 관악산 정상, 연주대와 기상대가 보입니다. 가까워 보이지만 30분 이상은 가야 할 것 같습니다. 이번에 녀석들은 기다려 주지 않네요. 능선 계단을 따라 쭈욱 가고 있습니다. 서로서로 오랜만에 보는지라 사는 이야기, 재학생 시절 이야기, 서로의 안부를 주고받으며 우리가 낙오한지도 모른 체 가고 있습니다. 굳이 잡지 않고 헤어밴드의 땀을 쥐어짜며 지켜봅니다.


정상을 향한 마지막 계단. 마지막 힘을 쥐어짜며 올라가 봅니다. 영차 영차.

계단 꼭대기입니다. 자연의 푸르름을 너머 서울 시내가 펼쳐집니다.


관악산 정상

고개를 돌려 뒤쪽을 내려다보니 관악산 정상입니다. 관악산 정상석과 그 앞으로 기상대가 보입니다. 관악산 정상은 각종 장치물들로 인해서 다른 산 정상에 비해 자연의 아름다움은 크게 느낄 수가 없습니다. 슬슬 허기가 져 옵니다. 그늘이 없으니 조금만 더 가서 점심을 먹기로 하고 정상석 배경으로 사진을 남깁니다. 정상에서 사진은 꼭 남겨야 합니다. 시간이 지나고 나면 추억보단 사진이 남습니다. 그리고 그 사진으로 추억을 다시 꺼내 볼 수 있고요. 자 찍습니다. 김치~


연주대가 뒤로 보입니다. 깎아지른 듯 한 벼랑 위에 어떻게 불당을 꾸몄는지 참, 인간들은 대단하다는 생각입니다. 하지만 그 경건함은 오래가지 못하고 아침식사를 거른 공복에다 땀도 한 몇 리터 흘렸더니 이제는 머릿속이 온통 먹을 생각뿐입니다. 마침 헬기장 옆에 식사에 알맞은 테이블과 좌석 모양의 돌이 놓여있네요. 여기다가 자리 깔고 식사하시지요.


김밥을 책임지고 싸온 후배 녀석이 동네에서 제일 맛있는 김밥이라며 아마 전국 순위에 들 수도 있다며 너스레를 떱니다. 설마 하며 입안 가득 김밥 세 점을 한꺼번에 털어 넣었더니 진짜 밥알 한알 한 알, 단무지 한 조각 한 조각, 햄, 당근, 오이, 우엉이 서로의 맛을 뽐내며 향긋하게 입안 가득 상콤하게 퍼집니다. 허풍이 아니네요. 고구마 감자를 담당해온 녀석은 울상입니다. 날씨가 너무 더워 갈증 때문에 손이 가지 않기 때문입니다. 괜찮아, 괜찮아, 하산할 때쯤에는 바닥날 거라며 위로해줍니다. 허기진 배는 나름 정성스럽게 싸온 음식들과 남자들의 수다로 금세 채워집니다.


쓰레기가 남지 않도록 자리를 잘 정리합니다. 산에 다니면서 남이 버린 쓰레기는 줍지 않더라도 내가 버린 쓰레기는 없도록 각별히 주의하는 편입니다. 다행히 녀석들도 그런 편인가 봅니다. 잔소리할 필요 없이 떨어진 김밥의 밥알 한 톨도 비닐봉지에 주워 담고 있네요.


배도 든든히 채웠겠다 이제는 발걸음을 좀 재촉해야겠습니다. 하산 후 다음 일정이 수영장인데 일일 자유수영 입장 시간이 지금부터 두 시간 정도밖에 남지 않았거든요. 말씀드렸던 수영복 챙겨 오셨지요? 돌부리에 차이지 않게 조심해서 빠른 걸음으로 내려가 보시지요.


하산 시작


어어, 잠깐, 여긴 길이 없는데... 안양운동장 방면이 이 쪽이 맞아? 여긴 등산로가 아니잖아, 이쪽이야, 이쪽. 관악산은 서울대입구에서 시작해서 다시 서울대 쪽으로 내려가는 등산로만 타봐서 안양 쪽 등산로는 잘 모릅니다. 저 앞에 후배 녀석 중 한 명이 안양에 살고 있기 때문에 길을 잘 안다고 떵떵거리더니 헤매고 있네요. 역시 자연 앞에서는 겸손해야겠습니다. 핸드폰에 지도를 펴고 GPS 신호에 따라 발걸음을 옮겨보겠습니다. 시간상 계획했던 관악 수목원 쪽으로 하산, 비봉산 방면 등산로 이동은 포기하고 운동장 능선을 따라 바로 안양 방면으로 쭈욱 내려갈 겁니다.

  

조심조심, 골로 가고 싶지 않으면 정신을 바짝 차려야 합니다.


저 멀리 안양 종합운동장이 보입니다. 시계를 보니 수영장 입장시간이 한 시간 정도 남았습니다. 실내 수영장은 종합운동장에서도 10분 정도를 더 걸어 들어가야 합니다. 이제는 시간이 촉박합니다. 위험하긴 하지만 위험하지 않을 정도로 뛰어 보도록 하겠습니다.

뛰어!, 뛰어!


관악산 남북 종주 완료
사진 찍고 쉬고 밥 먹는 시간을 빼면 실제 4시간 정도의 산행.

드디어 안양 종합운동장 등산로 입구에 도착했습니다. 다리에 감각이 없고, 온몸이 땀범벅이고, 그 몇 시간 새에 살이 빠졌는지 등산바지가 자꾸 흘러내리지만 종주를 해낸 뿌듯함으로 날아갈 것 같은 기분입니다. 너무 고생하셨습니다. 이 녀석들은 역시 체력 괴물들 답게 저 앞에 뛰어가고 있네요. 아아, 괜찮습니다. 놔두세요. 따라 뛰지 않아도 됩니다. 수영표 마감시간 전에 입장권 먼저 발권해놓는다고 뛰어가는 겁니다.    


수영(안양 실내수영장)

안양 실내수영장은 종합운동장에서 주택가를 좀 지나 있습니다. 수영장 회원들에게 불편을 주지 않도록 흙을 잘 털어내고 등산스틱을 잘 접어 넣고 탈의실로 들어섭니다. 등산복은 땀으로 흠뻑 젖어있어서 락카에 그대로 넣으면 안 되겠습니다. 싸온 비닐봉지에 몽땅 벗어 넣고 땀냄새가 약간이라도 삐지지 않도록 비닐봉지를 꽉 여밉니다.


탈의를 전부 하고 전자저울에 올라서니 아침에 집을 나설 때보다 4kg나 빠져 있습니다. 방금 수영장 들어오기 전에 편의점에서 산 이온음료 500ml를 숨도 쉬지 않고 벌컥벌컥 다 마셨으니 그 무게를 빼면 4.5kg이 빠진 셈입니다. 탈진하지 않은 것이 다행입니다. 확실히 무더위에는 체력을 주시하면서 산을 타야겠습니다.


수영장의 고마운 샤워기는 몇 시간 동안의 찌든 땀을 깨끗하게 씻어 줍니다. 저렴한 입장료로 좋은 시설을 이용할 수 있는 우리나라에 자부심을 느끼며, 얼굴로 샤워기의 세찬 물줄기를 받아냅니다. 아, 너무 오래 씻었습니다. 자유 수영시간이 30분도 채 남지 않았습니다. 빨리 풀장으로 나가야겠습니다. 저기 후배 녀석 세 명 모두 수영에는 일가견이 있어 당연한 듯 수심 2m 레인으로 들어가 있습니다. 저도 따라 들어가겠습니다. 수영에 자신 없으면 따라 들어오시면 안 됩니다. 2m 수심은 좀 위험하거든요.


시설은 좀 오래 돼 보이지만 대회용 수영장이라서 그런지 굉장히 크고 넓습니다. 다행히 레인을 종 50m가 아닌, 횡 25m로 쳐놔서 뭉쳐있는 근육에 걱정 없이 반대편을 향해 출발해봅니다. 후배 녀석 뒤를 따라 자유형으로 천천히 물을 잡아 밀어냅니다. 반대편 터치 후 평형으로 쭉쭉 물을 차 돌아옵니다. 어어, 근데 종아리가 불안합니다. 발가락이 안으로 오므라 듭니다. 다 돌아오지 못했는데 쥐가 나 버립니다. 여차여차 겨우 끝에 도달해서 풀장 밖으로 나옵니다. 다리를 쭈욱 펴고 풀어보지만 잘 풀리지 않습니다. 쥐가 허벅지까지 타고 오릅니다. 체력을 기만한 결과입니다.


이대로 끝내기는 아쉬워 조급하게 풀어놓은 뻐근한 다리를 붙잡고 다시 풀에 들어갑니다. 이번에는 반대편에 도달도 하기도 전에 쥐가 다리를 콱 뭅니다. 후배들이 옆에서 유유자적 물살을 가르며 무리하지 말라고 합니다. 연장자 티를 내고 싶지 않지만 순응하며 수영은 그만둡니다. 그래도 알량한 자존심에 풀장 밖으로는 나가지 않고 풀 안에서 종료 시간을 맞이합니다.


샤워를 마치고 준비해 간 평상복으로 막 갈아입는데 전화기 진동이 울리기 시작합니다. 단체 톡방에 서울역 근처에서 근무하고 있는 후배 녀석이 열심히 채팅을 하고 있습니다. 용산역 근처에 어디 어디로 가있으라고 합니다. 자주 가는 음식점이 요즘 손님들이 많아 예약을 받지 않는다고 먼저 가서 자리를 잡으라고 합니다. 네, 맞습니다. 뒤풀이는 용산역 근처에서 합니다. 요 녀석이 저녁을 쏜다고 하네요. 작년까지만 해도 후배에게 얻어먹는다는 것은 저에게 있을 수 없는 일이었지만 지금은 백수로서 그런 자존심을 세울 때가 아닙니다. 맛있게 얻어먹어 주는 것도 배려라고 생각합니다. 같이 가셔서 함께 맛있게 드시지요.


범계역 - 신용산역

수영장 앞에 범계역 가는 마을버스가 있습니다. 뽀송뽀송하게 씻고 나왔는데 노상 정류장에 버스를 기다리고 있으니 무더위에 금세 땀이 나네요. 다행히 마을버스의 빵빵한 에어컨이 흐르려던 땀을 닦아 줍니다. 범계역에서 신용산 역까지 30분 정도 걸립니다. 아직 퇴근시간 전이라 지하철에 앉을자리가 꽤 있습니다. 퍼지는 몸을 좌석에 그대로 기대 놉니다. 피로와 허기로 눈이 스르륵 감깁니다.

   

용산은 어렸을 때 컴퓨터 용품을 사러 왔던 선인상가의 기억으로 강하게 머릿속에 자리 잡혀 있어 천지가 개벽한 지금의 용산은 좀 낯섭니다. 현 대통령의 아집으로 인해서 대한민국 가장 핫플레이스가 된 용산의 분위기는 어떤지 한번 느껴보겠습니다.


오늘 한 턱 낸다고 한 후배 녀석이 예약이 안돼서 불안했는지 신용산역 6번 출구 뒤쪽으로 먹거리 골목에 식당 여러 곳을 포인터로 동그랗게 그려서 보내줍니다. 빨리 안 가면 줄 서야 한다, 못 앉는다, 한참 기다려야 한다, 안절부절입니다. 야야, 먹을 때는 천지때까리다, 꼭 좋은 자리, 좋은 음식 먹어야 하냐? 좋은 사람들, 좋은 분위기면 새우깡에 소주도 괜찮다며 달래 봅니다. 하지만 먹자골목에 들어서서 각종 음식 냄새를 맡으니 제 마음도 조바심이 생기네요.


저녁식사(뒤풀이)

다행히 후배가 찍어준 식당들 중, 바로 첫 식당에 우리를 위한 테이블이 딱 하나 비어 있습니다. 삼겹살 3인분 항정살 2인분 주문 후 음식이 나오기도 전에 시원하게 맥주를 한잔씩 합니다. 진심으로 서로에게 오늘 너무 고생했다며 건배~! 주위 테이블이 시끌시끌합니다. 덩달아 우리 테이블도 시끌시끌 해집니다.

  

'치이익' 고기 익는 소리에 군침이 돕니다. 맥주 한잔 마셨을 뿐인데 취기가 올라옵니다. 덩달아 재학생 때 추억들이 올라옵니다. 한번 살짝 부싯돌을 당겨주니 후배 녀석들이 추억에 활활 타오릅니다. 사람들로 꽉 들어찬 식당에서 가장 열기 띤 테이블이 돼버립니다. 워워, 목소리 좀 낮추자 제어해보지만 이내 동조되어 목소리를 높이고 있습니다. 괜찮을 것 같습니다. 여기는 도서관이 아니니 좀 즐겨도 되겠습니다. 주위 다른 테이블도 목에 핏대를 세우고 즐기고들 계시네요.


격식이 없고 긴말반말 오가는 사이지만 그래도 고기는 막내가 굽습니다. 겉바속촉으로 정성스레 구워진 고기를 한 점 한 점 먹다 보니 잠시 잊었던 오늘의 물주인 후배 녀석이 조금 늦게 끝났다며 고개를 조아리며 착석합니다. 이 녀석도 거의 10년 만에 보는 녀석이지만 술에 물 탄 듯 물에 술 탄 듯 자연스럽게 대화에 스며듭니다. 우리는 현재에 있지 않습니다. 과거 재학생 시절에 젊다는 인지조차 하지 않던 그 시절 동아리방 테이블에 앉아 있습니다. 둘러앉은 다섯 명의 피부는 어느새 탱글탱글 해져있고 듬성듬성 벗겨졌던 머리는 덥수룩한 숱으로 채워져 있습니다. 걱정과 근심은 희망과 꿈으로 바뀌어있습니다.

  

역시 고깃집의 마무리는 볶음밥입니다. 산행과 수영으로 열심히 운동을 해놓고 알코올과 탄수화물로 몸을 혹사시키고 있는 겁니다. 산에 다니는 사람들 중에 이래서 배가 나오는 분들이 많은 가 봅니다. 그러든지 말든지 지금에 집중하겠습니다. 짭조름한 밥알들에 취해 이런저런 사정을 바 줄 수가 없습니다.


한 녀석이 밖에서 심각하게 통화하더니 들어옵니다. 빨리 집에 들어가 봐야겠다고 합니다. 오늘 하루 종일 놀게 해 줬는데 저녁식사를 도대체 언제까지 하냐면서 문을 걸어 잠그겠다고 안주인으로부터 전화가 오셨답니다. 일말의 토도 달지 않고 열외 시켜 줍니다. 뒤돌아서서 가는 후배의 어깨가 아쉬움에 축 처져 있습니다. 남은 저희도 아쉬움에 자리에서 일어나 2차 장소로 이동합니다. 아직 할 말들이 많이 남아있거든요.


이 녀석들과 동아리방에서 이런 분식 안주에 많이 먹었었습니다. 그때의 그 맛은 나지 않지만 비스므레하게 꾸며 봅니다. 단체 톡방에 참여하지 못한 몇 명을 위해서 지금 진행되고 있는 상황을 바로바로 사진 찍어 업로드해줍니다. 알람이 시끄럽다며 핀잔을 주는 녀석도 있지만, 읽음 표시가 바로바로 사라져 버리며 참가하지 못한 아쉬움이 격하게 표현됩니다.


오늘 고깃집도 쏘고 분식집도 쏜 후배 녀석이 집에 가져가라며 떡볶이를 포장해와서 각자의 손에 쥐어 줍니다. 얼마 전 팀장 된 기념으로 마구 쏜다며 너스레를 떱니다. 여기 한 봉지 더 있습니다. 가지고 가세요. 이 녀석이 자칫 잘난 척한다고 보일 수 있지만 저는 잘 나가는 후배 녀석이 매우 뿌듯합니다.


마무리

지하철이 끊기기 전에 일어서야 합니다. 시간의 제약이 없다면 이 녀석들과 밤새 이야기해도 모자라겠지만 다음을 기약하며 작별합니다. 다음 만날 날이 몇 달 후가 될지, 몇 년 후가 될지 그것은 알 수 없지만, 또 이렇게 다시 만난다면 끈끈하게 하루 종일을 보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그때도 같이 동행하시지요.


염불(산행)에는 마음이 없고 잿밥(뒤풀이)에만 관심 있는 관악산 남북 종주기가 아녔는지 모르겠습니다. 어쨌든 무더위에 시원하게 하루를 잘 보낸 것 같습니다. 동의하시지요? 그럼 다음 만날 날을 기약하며 이만 작별인사를 하겠습니다. 즐거웠습니다. 안녕히 가세요.



개인적인 사정이 있어 토요일 정기 발행일에 발행하지 못하고 오늘 발행합니다. 다음번에는 시간을 꼭 맞추도록 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부엉이 아빠 올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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