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부엉이 아빠 Aug 27. 2022

EP13. 일당은 커피 한잔입니다.

준공 10년 차 아파트 셀프 도배 작업 일지

(독자님들과 대화를 하는 형식의 글에 재미가 들려서 또 이렇게 오남용하고 있습니다. 이번 챕터까지만 사용하고 자제를 할 테니 거북스럽더라도 조금만 참아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저희 집에는 숙원사업이 하나 있습니다. 아, 정확히 말하자면 아내의 숙원사업이라고 할 수 있겠네요. 바로 을 새로 도배하는 것입니다.


기억하실지 모르겠지만, 저와 아내 사물을 바라보는 시각 극과 극인 면이 있다고 언급한 적이 있습니다. 예를 들어, 저는 물건의 실용성을 중시하는 반면 아내는 사물의 모양이나 배치가 주변 환경과 어우러지는 미적 감각을 우선시합니다. 사용하던 물건을 잠시 에 쓸 일이 있어서 그대로 놔두면 아내는 달려와서 원래 물건이 있던 자리에 집어넣기 바쁩니다.

"이거 양말 다 신은 거지? 빨래통에 넣는다" 

아내가 어느새 달려와서 제가 오늘 얼마 신지 않고 벗어 놓은 양말을 엄지와 집게손가락으로 가까스로 잡고 통보합니다.

"아, 아니야! 내일 또 신을 꺼야, 놔둬!"

그럼 저는 깜짝 놀라 제지하곤 합니다.

"양말 많아, 그냥 빨어, 더러워."

아내는 진저리 치며 저의 알량한 계획을 뿐히 즈려 밟습니다.
아, 예시를 잘 못 들었네요. 이건 물 부족 국가의 절약정신과 위생관념 간의 대립 문제인 것 같습니다.

(혹은 많은 남자와 여자의 일반적인 대립일 수도 있습니다)  


하여튼, 저는 조금 아름답지 않더라도 효율적으로 물건을 배치하고 사용하는 편이고, 아내는 비용과 노력이 조금 더 들더라도 눈에 보기 좋아야 합니다.

잠시만요, 핸드폰 배터리가 얼마 남지 않아서 잠시 충전 좀 할게요.

"여보, 여기 있던 핸드폰 충전기 케이블 또 어디다 넣어놨어!? 못 말려 증말..."


그래서 이 숙원사업인 도배를 새로 하는 문제도 벌써 오래전부터 왈가불가 설왕설래 티켝태격 줄다리기해왔습니다.

한쪽에서는 분양받고 입주한 지 벌 10년 가까이 흘렀고, 구석에 낀 곰팡이는 닦아도 점점 닦이 않고, 찢어지고 해진 곳이 듬성듬성 쥐 파먹은 것 마냥 늘어나면서 미관을 망친다고 연일 볼멘소리가 이어집니다. 다른 한쪽에서는 그런 불평불만에 귀에 당근을 박은 듯 초연 해지며, 이 정도면 깨끗하고 보기 좋다, 아직 새로 할 때가 아닌 것 같다, 도배가 한두 푼이 아니다, 만약 새로 한다면 이건 절대적 낭비다, 막내가 초등학교 고학년 때나 가서 하자라며 맞서고 있는 상황이었죠. 그 대립은 월척이 미끼를 물고 낚싯줄을 바다 깊이 끌어당기듯 꽤나 팽팽했습니다. 서로의 릴을 감았다 풀었다 수싸움도 굉장히 심했습니다.


최근에 아내가 이직을 단행하면서 마침 한 달 정도의 휴식간이 생겼습니다. (집안에 백수가 둘이나 되어 버렸습니다) 기회는 이때다 싶은 건지 아내는 이 한 달 남짓한 기간 동안에 도배를 할 것이라 천명했습니다. 분명 비용 문제로 따지고 들어올 저를 대비해서 셀프 도배 견적을 다 내놨고(업체견적 대비 20% 정도임), 그 예산조차도 확보를 해놓고 통보를 한 것입니다.


이제 저는 더 이상 반항할 수가 없습니다. 껀덕지가... 아니, 명분이 없습니다. 아내는 셀프 도배의 기술도 영상으로 다 마스터했다고 합니다. 저는 옆에서 서서 보조만 하면 된다고 합니다. 몸이 천근만근 무겁지만 어쩔 수 없이 도살장 끌려가듯 작업복을 준비해야겠습니다.


앞서 저와 함께 관악산도 갔다 오시고, 영화도 보시고, 책도 보시고, 캠핑도 다녀오시면서 신나게 놀건 다 놀았으니 이번 도배에 일손을 좀 보태주셔야겠습니다. 아, 이런 작업 해보신 적 없다고요? 아, 괜찮습니다. 제 아내가 또 이런 일에 손재주가 있거든요. 저번에는 욕실 타일 줄눈이 시공도 혼자 완벽하게 해냈으니 혹시 도배가 잘 못 될까 걱정하지 않으셔도 되겠습니다. 그냥 저희는 제 아내가 시키는 것만 잘하면 되겠습니다. 자, 작업복 갈아입으시고 따라오세요. 힘든 작업이니 일당도 두둑이 챙길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그리고 첫째도 안전, 둘째도 안전입니다. 열정도 좋지만 다치면 절대 안 됩니다. 자 아래 구호 외치시고 시작하시지요.


"Safety First, 좋아! 좋아! 좋아!"


아내가 대략적인 일정을 브리핑합니다. 잘 들어보시죠.

"대략적인 작업 순서를 이야기하자면,

1) 우선 벽면의 물건들, 가구들을 먼저 치워야 해.

2) 그러고 나서 기존 벽지를 뜯어 낼 건데, 이때 중요한 건 기존 벽지를 완전히 뜯어내면 안 된다는 거야. 이게 실크벽진데, 벽지 표면에 PVC비닐이 입혀져 있는 이중 벽지라고 보면 돼. 그 PVC 비닐이 입혀져 있는 겉면만 조심해서 뜯어낼 거야.

3) 그렇게 겉면을 뜯어내고 나면 곰팡이 핀 부분도 같이 떨어져는 나갈 건데, 혹시 내부 벽지까지 오염되어 있는 경우에는 소독제를 뿌려서 말릴 거야.

4) 소독제까지 마르고 나면 새로운 벽지를 바를 거야. 풀이 발라져 있는 벽지로 주문했으니까 풀을 짜고 바르고 할 수고는 하지 않아도 돼.

5) 새 벽지를 다 바르고 나면 하루를 꼬박 말려줘야 해.

6) 잘 마른 게 확인되면 다시 가구들을 정리하면 모든 작업이 완료되는 거야.

되게 간단하지?"


가구들을 어느 세월에 다 옮길 건지, 저 크기의 가구들이 방문을 통과할 수 있을 것인지(통과했으니까 저렇게 떡하니 들어가 있겠지만), 블라인드를 때다가 고정핀이 부러지면 어떻게 할 건지, 코너 코너 미세한 부분은 어떻게 재단하고 맞춰 벽지 바를 건지, 작업하기 전부터 걱정을 먼저 시작하는 이 범불안장애적 성격인 저로서는 전혀 간단해 보이지가 않습니다. 우선 시키는 대로 해보겠습니다. 안방에 물건부터 거실로 옮기라고 합니다. 자, 안방으로 들어가시지요.

책장 옮기는 일은 시간이 많이 걸립니다. 책을 옮기고 책장을 옮기고... 바닥에 끌려서 상처 나지 않도록 담요나 이불을 이용해서 옮깁니다. 땀이 주룩주룩 흐릅니다. 하필이면 이 더운 여름에 진행하게 되네요. 푹푹 찌는 이 더위가 야속합니다.


물건들을 하나둘씩 치우고 나니 기존 벽지가 상당히 더러워 보이긴 합니다. 아내 말 듣기를 잘했다고 생각이 드네요. 10년 남짓한 세월을 잘 버텨 준 벽지에게 손바닥으로 한번 쓰윽 문질러 주며 고마움을 표시해 봅니다.


이참에 10년 동안 정든 침대도 작별인사를 합니다. 어찌 보면 멀쩡할 수 있지만 바닥에 틈이 없어 청소하기가 힘들고 벽면에 붙는 형태라 침대 뒤쪽으로 곰팡이가 피어나 이제는 더 이상 함께 할 수 없다는 꼬리표를 달고 밖으로 내어집니다. 허리 다치지 않게 조심하세요. 옮기기 편하게 여기 스케이트보드 위에 올려봅시다. 영차!


자, 이제 기존 벽지를 뜯어낸다고 합니다. 먼지가 많이 날릴 것 같으니 마스크를 쓰시고요. 커터 칼로 살짝 긋고 벽지의 겉면을 조심조심 뜯어서 살짝 뜯기면 쭈욱 잡아 빼라고 합니다. 이렇게요. 여기 빨간색 플라스틱 스크레이퍼로 벌어진 틈에 넣고 밀어내면 쭉쭉 밀리기도 합니다. 네, 그렇게 쭈욱 당기면서 벗기세요.


이제 기존 벽지도 다 땠고 아내가 새로운 벽지를 바르기 전에 소독을 좀 한다고 하니 우리는 좀 쉬었다가 하겠습니다. 등에 땀이 범벅입니다. 여기 참을 좀 내왔으니 기호에 맞게 커피 드시려면 드시고 우유 드시려면 따라 드시고요. 도배를 한번 하려면 이렇게 일이 많으니 인건비가 어쩔 수 없이 비쌀 수밖에 없겠습니다. 업체에서 하는 도배가 비싼 이유가 이 인건비 때문일 거예요.


"근데, 여보, 우리 보조들은 일당이 얼마야?"

"응, 거기 있잖아, 커피 한잔"

"뭐? 일당이 커피 한잔이라고??!!"

... 이건 노동착취나 다름없습니다. 아, 근데 아까 전에 고용계약서를 읽어보지도 않고 사인을 했습니다. 억울하고 부당하지만 제대로 확인하지 않고 덜컥 사인한 저희 잘 못도 있으니 군소리 말고 작업에 임해야겠습니다. 자, 시원하게 한잔 하시고 일어나시죠. 이따가 밥이라도 푸지게 대접하라고 졸라야겠습니다.


새 벽지는 풀이 발라져 있는 상태라서 좀 무겁습니다. 잘 못 들고 있으면 그 무게에 벽지가 찢어져 버리니 넓게 잡아야 합니다. 아내가 벽 크기에 맞춰 대략적으로 붙이고 나면 저희는 공기가 안쪽에 차지 않게 바깥쪽으로 팍팍 밀어줍니다.


완성도를 높이려면 끝 부분들을 잘 마무리를 해줘야 합니다. 플라스틱 롤러로 가장자리를 팍팍 밀어주고, 코너 부분도 뜨지 않게 도구를 이용해서 붙여주시고요. 예술의 극치는 이런 미세한 부분이 좌지우지하는 게 아니겠습니까?   


스위치 부분은 미리 커버를 벗겨 놨었고 스위치 부분에 풀이 묻지 않도록 종이나 신문지 등으로 씌워 놨었습니다. 새 벽지를 그 위에 그대로 바르고, 스위치 부분에 X자 형으로 칼집을 낸 후에 가장자리를 둘러서 잘라냅니다. 그러고 나서 스위치 커버를 덧씌우면 거의 전문가가 작업한 것처럼 모양이 나옵니다.


아침부터 시작했는데 벌써 해가 뉘엿뉘엿 지고 있습니다. 그래도 안방은 거의 다 끝났습니다. 아내가 혹시 모를 여유분까지 한 장 시켰는데 그거 딱 한 장이 남습니다. 거의 전문가 수준으로 사이즈를 잰 것입니다. 이거 마음먹고 한번 도배로 밥벌이를 해도 될 것 같습니다.

"여보, 우리 도배를 전문적으로 좀 해볼까?"

"안방 요거 하는데 하루 종일 걸렸는데 이래 가지고 입에 풀칠이나 하고 살겠어요? 쓸 때 없는 소리 하지 마시고 창틀 하고 바닥에 뭍은 풀들 마르기 전에 걸레로 깨끗하게 닦아내고 나오세요. 이제 다 끝났으니 벽지 바른 거 건조만 잘 시키면 될 것 같아요"


먼저 나가서 씻고 옷 갈아입고 나갈 준비 하세요. 제가 아까 전에 아내한테 아무리 보조라고 그래도 사람을 그렇게 부리면서 일당이 커피 한잔이 뭐냐고 따졌습니다. 그리고 오늘 하루 종일 땀 흘렸으니 저녁식사는 기깔나게 대접해야 한다고 신신당부해놨습니다. 저는 걸레질 좀 하고 금방 나갈게요.

 

아내가 1년에 한 번 먹을까 말까 한 장어집으로 들어갑니다. 아까 너무 볼멘소리를 했었나요, 만만치 않을 장어 가격에 부담이 좀 되긴 합니다. 하긴, 인건비를 팍 줄어서 도배 전체 비용을 확 줄였으니 저희는 부담 없이 배불리! 맛있게! 먹으면 될 것 같습니다. 아니면 혹시? 내일도 힘내서 열심히 작업에 임하라는 아내의 큰 그림?... 아, 아닙니다. 숯불에 노릇노릇 탱글탱글하게 구워지는 저 뽀얀 속살만 생각합시다. 그냥 입에서 살살 녹네요.


안녕히 주무셨습니까? 몸은 좀 어떠세요? 저는 오랜만에 현장 작업을 했더니 온몸이 쑤십니다. 허리보호대도 찼습니다. 제가 만성 추간판 탈출증이거든요. 안방 좀 보세요. 어제 눅눅하게 꾸물꾸물 붙어있던 벽지가 바짝 말라서 쫙 펴졌습니다. 보기가 꽤 괜찮습니다. 그리고 침대 배송기사님이 아침부터 오신다고 전화가 왔습니다. 아내가 인터넷을 뒤지고 뒤져서 형편에 맞게 잘 골랐더라고요. 특히 통풍이 잘 되고 침대 아래 청소가 가능한 제품입니다. 침대 매트리스는 어젯밤에 소독제를 몇 번을 뿌리고 또 뿌려서 바짝 말려 놨습니다. 제 마음도 뿌듯하게 뽀송뽀송 해집니다.


자, 이제 얼마 남지 않았습니다. 아이들 놀이방, 현관, 거실만 작업하면 될 것 같습니다. 아, 그리고 추가 작업도 있습니다. 화장실 문 아래쪽이 계속되는 습기에 부풀어 오르고 들고 일어나져서 그 화장실 문도 때서 작업을 해야 하거든요. 화장실 문 시트지와 똑같은 문양의 시트지는 아내가 어디서 구했는지 저기에 구비되어 있습니다. 네? 그 많은 작업을 언제 다 하냐고요? 아, 괜찮습니다. 걱정하지 마세요. 안방을 하면서 손발 맞춰 봤으니 설렁설렁 해도 한 6박 7일 정도면 충분할 거예요. 작업복 갈아입고 오세요. 아이들 놀이방 책부터 옮깁니다. 이제부터는 말없이 묵묵히 일만 하겠습니다.



아이들 놀이방 도배 작업



현관 도배 작업



거실 도배 작업



화장실 문 정비 및 시트지 작업



정말 고생하셨습니다. 일주일간 작업을 모두 무사히 마쳤습니다. 비 내리듯 흘린 땀은 비록 우리를 녹초로 만들었지만 이렇게 찬란한 결과물을 선사하며 모두의 마음을 뿌듯하게 해 줍니다. 아내 말을 잘 들으면 자다가도 떡이 생긴다는데 그동안 이런 핑계 저런 핑계 대며 도배작업을 미뤄왔던 제 자신을 반성해봅니다.


이렇게 백수생활의 버킷 리스트를 또 하나 지웁니다. 도와주셔서 감사합니다.

"셀프 도배 하기"


완공 후 사진을 공유합니다.
안방 / 거실 / 거실
아이들 놀이방 / 아이들 놀이방 / 현관


이전 12화 EP12. 뭐? 2박 3일로 캠핑을 가자고??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