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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부엉이 아빠 Sep 03. 2022

EP14. 주방을 두려워하지 말라

백수 생존기

잘 다니던 직장을 때려치우고 백수생활을 시작한 지 어언 9개월 차에 접어든다. 퇴사 결정에 고생했다며 응원해주고 퇴사 파티도 열어줬던 아내와 아이들이 이제는 불편한 기색으로 다가서는 느낌이다. 이번 겨울에는 다시 밥벌이의 전쟁터에 나갈 것이라며 가족들에게 이미 천명했지만, 백수생활 초반과는 다르게 꽉 조였던 나사가 조금씩 풀려가는 듯한 그 느슨함에 이제는 그들의 시선이 따가운 눈총이라고 나 스스로 색안경을 끼는 건지도 모르겠다.


~ 새벽 6시에 울리는 알람 소리에 10분만 더 자자고 급히 알람 설정을 바꾸며 눈을 감았지만 어느 순간 10분이 지나 버렸는지 계속 일어나라 울려대는 알람에 겨우겨우 일어나서 흠칫 놀라 옆을 바라보니 다행히 시끄러운 알람 소리에 깨지 않은 아내에 안도하며 살금살금 방문 닫고 후다다닥 샤워하고 옷 갈아입고 빠른 걸음으로 지하철에 올라 부랴부랴 환승하며 도착하니 아슬아슬 늦지 않게 출근도장 찍고 모니터에 쏟아지는 이메일 확인하고 업무 시작하면 어느새 퇴근시간이 돼버렸는지 쏟아져 나오는 인파에 내가 먼저 집에 갈 거라고 이리 밀쳐 저리 밀쳐 빠른 걸음 종종 하면 다행히 아이들 취침 전에는 집에 도착해서 아내가 당연한 듯 차려주는 저녁밥상에 투덜투덜 반찬 투정도 해보고 오늘 설거지는 당신이 하라는 소리에 못 들은 척 털썩 소파에 눕기를 반복했던 그 시절 ~♪

가끔 일요일 아침에 내가 식사를 준비하긴 했지만 그건 가뭄에 콩 나는 듯 한 이벤트였고, 그렇게 주방은 내가 들어설 시간도 없고, 들어서서도 안되고, 침범해서는 안 되는 아내의 영역이었고, 내가 무엇을 잘 해낼 수 없는 두려운 영역이라고 나 자신을 세뇌시키고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이 긴 백수생활에서 쫓겨나지 않고 생존하기 위해서 이제는 주방에 들어설 수밖에 없었다. 냉장고와 요리는 아내의 자존심이니까 건드리면 안 된다는 나만의 철칙을 되새김질해봤지만 그건 두려움과 귀찮음에 대한 핑계였을 뿐 살기 위해선 그 지글지글하고 보글보글한 전쟁터에 들어설 수밖에 없는 입장이 되었다. 빠르게 적응하기 위해서 요리의 몇 가지 수칙을 세워 가슴 안쪽 주머니에 간직했다.

1. 간단해야 한다.
2. 빨리 만들 수 있어야 한다.
3. 잘할 수 있는 몇 가지 요리에만 집중한다.
4. 웬만하면 보기 좋게 만든다.


행동강령을 숙지하고 전장에 나섰다. 우선은 한국인의 밥상에 가장 보편적인 음식, 그 양대 산맥인 된장찌개와 김치찌개에 도전했다. 음식이란 것을 해보니 가장 중요한 건 손맛이 아닌 재료라고 생각한다. 이 찌개도 마찬가지로 붙여진 이름의 된장과 김치가 찌개의 맛을 좌우한다. 다행히도 한국 음식의 자존심, 남도에서 장모님이 직접 만드셔서 공수해주신 된장과 김치가 확보되어 있다. 아, 그러고 보니 된장과 김치는 장모님의 손맛이 들어간 것이니 음식은 손맛이 좌우한다는 말도 틀린 말은 아닌 것 같다. 하여튼, 된장과 김치를 이용하면 간을 할 필요도 없다.


조리법은 아주 간단하다. 멸치로 육수를 내고 된장찌개는 된장을 풀고, 김치찌개는 김치를 썰어 넣고, 기타 재료들을 넣고 끓이기만 하면 된다. 기타 재료 중에 버섯이 많이 들어가면 버섯 된장찌개, 호박이 많이 들어가면 호박 된장찌개, 두부가 많이 들어가면 두부 된장찌개, 고기가 많이 들어가면 고기 김치찌개, 고등어가 들어가면 고등어 김치찌개가 된다.

된장찌개
된장찌개로 식사 준비하기


그다음으로 몽글몽글 보기 좋은 폭탄 계란찜에 도전했다. 아이들이 굉장히 좋아하기에 인터넷을 수시로 뒤적거리면서 그 조리법을 검색하고 가스레인지를 몇 번을 더럽혀가며 겨우 성공했다. 이도 조리법은 매우 간단하다. 단, 가스레인지나 인덕션이 짝 스메시를 맞을 만큼 더러워질 수 있기 때문에 조심해야 한다.


조리법을 보자면, 날 계란을 충분히 깨서 흰자와 노른자가 완전히 물처럼 되도록 계속 저어준다. 그리고 소금을 조금 넣고 썰은 파를 조금 넣고 저어서 준비를 해놓는다. 작은 뚝배기에 멸치로 육수를 내고 계란물 5 대 육수 1이 되도록만 육수를 남겨놓고 끓이는 상태에서 준비해놨던 계란물을 뚝배기에 붓고 눌어붙지 않게 숟가락으로 계속 저어준다. 계란물이 꾸덕꾸덕 해지며 덩어리들이 많아지기 시작하면 그 위에 참기름을 조금 뿌려주고 국그릇같이 밀폐될 수 있는 그릇으로 꽉 덮은 다음 30초를 더 데우고 불을 끄고 30초를  들인다. 그리고 짠하고 국그릇을 개봉하면 폭탄같이 계란찜이 부풀어 올라 아이들이 환호성을 지르게 된다.

폭탄 계란찜의 환호성


그다음으로 빠르게 만들 수 있고 보기에도 좋은 브런치에 도전해봤다. 어쩌면 글을 쓰고 공유하는 이 '브런치' 플랫폼의 모토와도 비슷할 수도 있겠다. 훈제고기와 소시지가 확보되어 있으면 그 풍미를 더욱 낼 수 있어 브런치를 준비하기 전에는 미리 확보를 해두곤 한다. 조리법은 매우 간단하다. 양배추와 양상추를 씻어서 썰고, 훈제고기와 소시지를 먼저 굽고 그때 나온 기름을 이용해서 계란 프라이를 하고, 양파를 굽고, 토마토를 굽고, 버섯을 굽는다. 여기서 가장 중요한 건 플레이팅이다. 조리한 것들과 샐러드를 얼마나 보기 좋게 배치하느냐가 가장 중요한 것이다. 브런치는 그 맛보다는 겉보기가 한 세 배 이상이 중요한 것 같다.   

플레이팅의 중요성


그래도 가장 간단하게 가성비 있게 준비할 수 있는 것은 역시 굽기다. 조리가 필요 없이 단지 굽기만 하면 끝난다. 그리고 생색 내기에 아주 좋은 것이 굽기 만한 것도 없는 것 같다. 단, 재료 값이 많이 들기 때문에 자주 할 수 없다는 단점은 있다. 재료의 가격과 질에 따라 맛도 천차만별이니 재료의 선정중요하다고 할 수 있다.


생선은 보통 얼려있는 것을 굽는 경우가 많은데 이때 중요한 것은 해동인 것 같다. 냉동고에서 꺼내자마자 구워야 할 경우 아주 약불로 천천히 해동시키고, 그때 녹는 물이 다 빠져나오고 나면 프라이팬을 다시 깨끗이 닦아내고 새롭게 식용유를 부어 그때부터 바싹 굽는 게 중요하다. 

고기의 경우 아내와 아이들이 모두 바싹 굽는 것을 선호하기 때문에 굉장히 바싹하게 굽는 편이다. 그렇게 손이 버릇이 들려서 가끔 성인들과 함께할 때도 도대체가 고무처럼 고기를 구워 낸다며 핀잔을 듣기도 한다. 하여튼, 굽기만큼 간단하며 보기에도 좋고 맛도 좋은 조리법은 없다고 생각한다.

극강의 가성비 구이

 

생존을 위해 주방에 들락날락하다 보니 두려워할 필요는 없는 것 같다. 내가 잘할 수 있는 음식 몇 가지만 특화시켜 집중한다면 충분히 해낼 수 있다고 생각한다.


(개그맨 장동민 목소리) "요리, 그까이꺼 머 대충~ 끓이고, 썰고, 우면 되는 거 ~"

단, 이 트는 생존을 위한 자들을 위해 외치는 자조적인 아우성일 뿐이다.


요리의 세계는 그 전문성을 따지자면 너무 아득하고 심오하기 때문에 수박 겉핥기식으로만 하기로 나의 한계를 정해 본다. 9개월 차 백수는 렇게 생존해간다.


  


오늘도 살아남기 위해 호박 된장찌개에 도전해본다.

호박 된장찌개 조리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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