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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부엉이 아빠 Sep 17. 2022

EP16. 백수의 가치

백수의 인간관계

사업을 하다 망하면, 주위에 있던 사람들 중에 진정한 친구가 누구인지 가려낼 수 있다는 말을 어렴풋이 들었던 것 같다. 망한 사업을 다시 소생시켜 줄 만큼의 자금을 빌려주는 대단한 친구들도 있겠지만, 쓰러져있는 패자를 떠나지 않고, 비록 부축해서 일으켜 세워 주지는 못해도, 곧 다시 일어날 수 있을 거라며 등을 토닥여 주며 방문을 슬쩍 닫아주는 친구들도 있을 것이다. 그리곤 다시 다음날 찾아와서 이제는 일어났냐며 방문을 기웃거리다가, 들리지 않는 인기척에 호흡이 붙어있는지만을 살짝 확인한 후 다음 찾아올 날을 스케줄러에 적어놓는 친구들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콩고물 뚝뚝 떨어지던 사업이 더 이상 빨대를 꽂을 수 없게 됨을 알아채고 무 자르듯 단칼에 떠나버리는 사람들도 있을 것이다. 안타깝게도 전자의 진정한 친구들에 비해 그 매정한 사람들의 수는 배이상 될 것이다. 어쩌면 배수를 따질 수도 없을 만큼 대부분일 수도…. 불행인지 다행인지 그렇게 인간관계의 다이어트가 자연스럽게 자행된다. 망한 자의 인생에 기름기가 걸레 쥐어짜듯 쫘악 빠져버리는 것이다.


사업을 하다 망한 것은 아니지만 평범한 직장인의 삶에서 보자면, 나도 작년 말부로 망한 셈이다. 2022년 1월 3일, 새 해 첫 월요일부터 출근할 필요가 없었고, 시무식으로 간단히 막걸리나 한잔하고 일찍 퇴근할 설렘을 느낄 필요도 없었다. "새 해 복 많이 받으십시오", "HAPPY NEW YEAR"라고 시작하는 이메일을 보낼 필요도, 그 당연한 새해인사로 시작하는 이메일을 회신 받을 필요도 없었다. 평일이건 주말이건 미친 듯이 울려대던 그 지긋지긋한 핸드폰 또한 행복한 음소거를 맞이하며, 파수꾼처럼 내 곁을 지키고 있을 필요가 없어졌다.


이딴 회사 때려치우면 어디 섬 같은데 들어가서 징징대는 핸드폰 따위는 던져버리고 두 팔 벌려 자유를 만끽하고 싶다고 버릇처럼 지껄이던 망상은, 현실이 되어버렸다. 피부로 와닿는 그 정적에 마구마구 얼굴을 부벼댔다. 자의적으로 우리 동네라는 작은 섬에 나를 가두고 일부러라도 기웃거리는 진정한 친구들마저 "그래, 그래, 다음에 보자"라는 가벼운 인사로 거절을 하고 있었다. 한동안은 사회와의 완벽한 단절을 소리 내지 않고 여기저기 시끄럽게 알려댔다.


수많은 사람들과 갈등 속에서 인사팀이라는 명찰을 달고 있어서 그런지, 그 엉킨 실타래는 매번 풀려야 한다는 신념에 빠져 나를 강하게 채찍질했었다. 인간관계는 행복한 결말로 귀결되야한다는 강박증이 병적으로 퍼져있어서 그런지, 당분간은 멀리 피해 있자던 진저리 치는 다짐은 백수생활에 숙명과도 같이 귀결되고 있었다. 매정한 사람들은 계급장 땐 벌거숭이를 찾지도 않았지만, 벌거숭이도 떠나간 그들이 안중에 없었다. 질척거리지 않았고, 서운해할 필요도 없이 서로 윈윈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사회적인 동물인 인간이 본능을 거부한채 언제까지 혼자서 처박혀 지낼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간단한 자격증을 따기 위해 학원을 다니려 해도 최소 앞, 뒤, 옆 사람과는 인사를 하고 지내야 했고, 지자체에서 제공해주는 비대면 강의를 수강하려고 해도, 화면과 마이크를 켜놓고 서로 눈을 맞추며 인사를 주고받고 안부를 물어야 했다. 물론 그 작은 모임들에서는 인사팀 물이 완전히 빠지지 않아 친절하게 보였을 수 있었겠지만, 영혼이 있었음을 장담할 수는 없다. 자연스럽게 다이어트가 된 홀쭉한 인간관계를 다시 찌우고 싶지 않았다. 관계가 깊어지면 시작될 감정소비도 하고 싶지 않았다.


백수라는 명찰을 차고 있으니 회사를 다닐 때와 다른 점은, 그러니까 번듯한 직장이나 사회적 지위가 있을 때와는 다르게, 내가 먼저 다가가지 않으면 새로운 사람들은 다가오지를 않는다는 것이었다. 하지만 그것이 서운하지도 않았던 건, 아직 고독이라는 단맛에 취해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잣대를 대고 쭈욱 그어서 이 쪽은 진정한 친구들, 저 쪽은 매정한 놈들이라고 딱 단정 지을 수는 없지만, 차장이라는 직함을 달고 있을 때는 부재중이라는 거절 의사를 표시해도 연락의 끈을 놓지 않으며 귀찮게 구는 선배들이나 알랑방귀 뀌던 후배들도, 백수라는 직함 앞에서는 두 번 이상의 부재중은 더 이상 용납할 수 없다며 곁을 떠나 매정한 놈들 편에 서 버리는 것이었다. 백수의 부재중이라는 신호는 그들에게 굳이 멈출 필요 없는 황색 점멸등의 반짝임 같은 것이었다. 그렇게 나는 백수의 가치를 가늠하고 있었다.


그 가치를 뼈저리게 느꼈던 것은 이번 추석이다. 민족의 대명절답게 추석 연휴 시작 전부터 여러 사람이 안부전화를 주고받고 스마트폰 메신저를 통해 명절 인사를 담은 사진도 보내고 이모티콘도 보내면서 돈독한 관계를 유지한다. 그 예로 작년 추석 때를 상기해보자면, 오랜만에 처갓집에서 보내는 추석인데도 불구하고, 중국 현장과 한국 현장에서 동시 다발적으로 일이 발생해서 긴급히 처리하느라고 추석 전날 잠을 자는 둥 마는 둥, 추석 당일 날 식구들끼리 바닷가로 놀러 가는데 운전을 하는 둥 마는 둥, 장모님이 백년손님을 걱정하도록 노트북 앞에서 머리를 쥐어짜가며 어찌저찌 일을 처리했던 적이 있다. 꽉 조였던 심장을 풀어내며 처갓집 식구들이 옹기종기 모여 앉은 저녁상에 앉아 맘 편히 핸드폰을 들여다보니 신경 쓸 수 없었던, 아니 인지하지도 못했던 추석인사 카톡이 몇 백개가 쌓여있었다. 누구누구 인지 일일이 확인을 해보려면 화면의 스크롤을 한참 내려야 했고, 감사하다고 일일이 답신하는 것도 한참이 걸렸다. 물론 단체 톡방에서 주고받는 대화가 카톡 개수의 많은 지분을 차지하고는 있었지만, 그 대화들도 추석인사가 불 꽃을 튀겼던 것이다.


하지만 이번 추석은 달랐다. 난 전화받을 시간도 충분했고, 메신저를 확인할 시야도 충분히 확보하고 있었다. 그렇지만 작년 몇 백개의 카톡에 비하면 귀엽다고 여겨지지도 못할 만큼의 카톡의 숫자들만이 백수의 가치를 증명해주고 있었다. 이런 형식적인 명절 인사는 가식적이라고 비판까지 했었던 나였지만, 그 고요해진 숫자놀음 앞에서 초라해진 백수의 가치에 대해 강박증을 느끼기 시작했다.


항상 먼저 명절 인사를 해주던 진정한 친구라고 생각하는 두 녀석에게 내가 먼저 명절 인사 카톡을 보내 봤다. 한 녀석은 읽었는데도 대답이 없었고, 한 녀석은 읽지도 않았으며 추석 연휴가 끝날 때까지 회신은 받을 수 없었다. 나는 씁쓸하게 잣대로 그어놓은 그 모호한 경계선에서 그 녀석들의 장기 말 위치를 슬쩍 바꿔놓고 있었다. 진정하다고 생각한 친구들에게까지도 무시당하는 것이 '백수의 가치'라고 판단해버리고 있었다. 역시 사람은 간판이 중요하다고 정해버리는 것이었다.


하지만 다행스럽게도 오판의 늪에 빠져 허우적거릴 뻔할 나를 구해준 건, 아이러니하게도 그 두 녀석이었다. 둘이 짠 것처럼 추석 연휴가 지나고 평일이 시작되는 날에 연락이 왔다. 한 놈은 추석도 못 쇠고 출동을 나갔다 와서 이제서야 카톡을 봤다고 하고, 다른 한 놈은 내 연락을 보고 나중에 전화한다는 걸 깜빡해서 이제서야 전화한다며 이번 주에 하루 놀러 가도 되냐고 훅 들어오기까지 한다. 덕분에 정기 발행일을 하루 앞두고 이렇게 글 쓸 소재를 찾을 수 있어 좋았지만, 어젯밤 놀러 온 그 녀석과 오랜만에 대작을 해버렸더니 골 울리는 숙취에 비몽사몽 한 글씨가 창작의 고통을 더욱 가중시킨다.


사람들을 둘로 갈라놨던 '진정함'과 '매정함'의 그 경계선은 박박 지워 버렸다. '백수'의 가치란 것은 애초에 없었다. 그것은 백수의 가치가 아닌 '나'라는 인간으로서의 가치였던 것이다. 매정하다며 매도해 버린 사람들한테 과연 나는 얼마나 진정성 있게 다가갔었나 되짚어 봤다. 나도 마음 주지 않았다면 받지도 말아야 할 것인데 왜 욕심을 부리고 있던 것인가, 빨대를 꽂고 있었던 건 그들이 아닌 오히려 내가 아니었던 것일까, 계급장이 붙어있건 말건 진정으로 마음이 끌렸다면 자연스럽게 곁에 머물겠지, 추석인사 따위 신경 쓸 필요도 없이 보고 싶은 친구라면 하룻밤을 기꺼이 할애하겠지, 그게 자업자득, 인과응보인 셈이다.


나이 마흔을 넘겼지만 아직도 인간관계에 대해서는 미숙하기 짝이 없다. 초등학교 2학년인 둘째 녀석과 일곱 살인 셋째 녀석이 놀이터에서 저 또래 친구들과 함께 해맑은 표정으로 앞머리가 땀에 폭 젖을 정도로 뛰어다니며 노는 것을 보고 있자면, 어른들이 미숙하다고 생각하는 아이들이 서로가 서로에게 웃음을 주며 오히려 가장 뛰어난 인간관계를 하고 있는 것을 발견한다. 저마다의 가치를 최고로 높이고 깔깔거린다. 물론 세상만사를 면밀히 신경 써야 하는 처자식 딸린 아빠지만, 저 아이들의 명징한 순수함을 빌려서 얼룩진 나의 가치를 조금이라도 맑게, 혹은 묽게 희석시키고 싶은 마음이다.


나의 가치, 나의 인간관계는 결국 내가 만들어가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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