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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부엉이 아빠 Sep 10. 2022

EP15. 아범 생각은 어떠니?

백수의 명절

최근에 민족의 대명절 한가위가 다가오면서 차례상의 '전'에 대한 기사가 연일 포털 메인 상단에 포진하고 있었다. 성균관의례정립위원회(이하 성균관)에서 차례상 표준안을 발표했는데, 기름에 튀기거나 지진 음식은 반드시 올리지 않아도 된다며 전 부치기는 더 할 필요가 없다고 하여 논란이 일고 있는 것이었다. 기사 내용보다는 댓글을 더욱 심취해서 읽는 나쁜 버릇을 가지고 있는 나로서는 몇몇 부정적인 댓글을 예상했고, 그 예상은 완벽히 적중했다.

"성균관, 너네들이 뭔데 남에 차례상에 감 나와라 배 나와라 하냐?"

"몇십 년간을 전 부처 왔는데 갑자기 성균관은 또 무슨 뜬금없는 소리냐?"

"집안 대대로 내려온 전통이다. 잔소리하지 마라"


까다로운 전 부치기를 하지 않아도 돼서 룰루랄라 기뻐할 법도 한데 오히려 거의 대부분의 댓글이 속에서 부글부글 끓어오르는 열을 마구마구 발산하며 퉤퉤 거리고 있다. 내용은 자세히 읽지 않고 기사의 제목만을 보고 댓글 창부터 진입한 나로서도 예상되는 댓글의 과녁을 부정으로 정하고 활시위를 당겨 정확히 10점, 그것도 엑스텐에 꽃아 버리며 환호성을 지를 수 있었던 것은 마찬가지로 부글부글 끓어오르는 뭔가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번 추석 연휴기간이 아내의 생일이 겹쳐서 시어머니가 항상 챙기던 며느리의 생일이 애매해짐에 따라 모친께서 추석 전 주에 모여 같이 밥을 먹자고 했다. 그래서 몇 개 되지 않는 단골집을 고민하다가 그중에 한 곳을 심도 있게 정해서 갔더니 다행히 다 같이 만족스러운 결과로 식사를 했었다. 분위기도 몽글몽글 푹신하게 달아올랐겠다 그 분위기를 계속 이어나가기 위해 집 근처 대형 카페로 자리를 옮겼더니 나 빼고 전부 여성으로 구성된 여색이 짙은 그 모임은 함박웃음으로 재잘재잘 화답을 했다.


"방금 밥 먹고 와서 무슨 빵까지 이렇게 산거야?"

아까 계산한 식사값에 거의 버금가는 커피값을 쏜 여동생에게 백수로서 계산을 피해 화장실로 달아났다가 돌아와서 멋쩍은 툭툭거림으로 고맙다는 표현을 해봤다.

"당신은 무슨, 여자들은 밥 배하고 디저트 배하고 따로 있는 거 몰라?"

툭 내뱉는 내 말의 의미를 아는 건지 모르는 건지 아내가 시누이를 대변하며 편을 드는 것이다. 아니다, 어쩌면 오히려 백수 남편 기죽지 말라고 내 편에 서서 자기 등 뒤에 숨으라 하는 것일 수도 있는데 눈치없다고 말하는 내가 눈치는 없는 놈인지도 모르겠다.


그렇게 밥 배, 디저트 배 따로 있는 모친 포함 6명의 여인들은 시간이 어디로 흐르는지 신경도 쓰지 않은 채 열띠게 목청들을 높이고 있지만, 그 구심점이 어디 있는지는 모를 미지의 토론을 펼치며 나의 시선을 몽롱하게 만들고 있었다.

"아범 생각은 어떠니? 아범이 서운할 수도 있는데 오해하지는 말고, 마침 명절 전이라 엄마가 이렇게 이야기를 꺼낸 거야"

갑자기 모친이 멍하고 있는 나를 흔들어 깨우듯 불쑥 물어왔다. 아들의 눈치를 살피며 조심스레 묻는 내용은 대략 이랬다.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두 번 정도 더 제사를 지낸 다음부터는 제사를 설 차례상으로 대체했었고, 추석·설 두 번 지내던 차례상도 설 한 번으로 축소했고 추석에는 가족끼리 모여서 식사하는 날로 바꿨는데, 이제는 설 차례상 그마저도 차리지 말라며 내 의견은 어떠냐고 묻는 것이었다.


이전에 제사를 축소하고 추석 차례상을 폐지할 때 모친은 아들과 며느리에게 제사상과 차례상을 차리는 부담을 자신의 선에서 줄여주자는 마음이었지만, 나는 집안의 장남으로서 그 마음 깊이 헤아리지 못하고 모친과 티격태격한 적이 있어서 또 불협화음이 날까봐 내 눈치를 보며 조심스럽게 이야기를 꺼낸 것이었다.


"엄마 마음 충분히 이해해요, 근데 1년에 딱 한번 차례상 차리는 건데 그게 그렇게 힘들 일은 아닌 것 같은데?"

그런 눈치 보는 모친을 눈치챈 나로서도 조심스럽게 이야기를 이어나갔다. 근 몇 달간 집안일을 하며 주방에 들락날락하면서 음식의 어려움을 모르는 것은 아니지만 서로 힘을 합쳐 작정하고 차린다면 차례상 준비는 그다지 힘든 일도 아닌 것 같고, 그나마 조상들이 1년에 한 번 드시는 진지마저 없애버린다면 그건 너무 야박한 것 같고, 또 시어머니로서 며느리 내외를 생각하는 마음이 너무 과잉됐다 싶어 반문을 던졌다.


"당신은 차례상 준비할 때 쪼금 전 몇 개 부치면서 힘들지 않다니, 차례상은 여자들이 신경 쓸게 얼마나 많은데?"

역시 아내는 내 속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이미 여자들끼리 이야기 끝냈다며 얼굴까지 붉혀가며 시어머니 편을 들고 나서고 있는 것이다.

"그래, 엄마가 이번 설까지는 차례상 준비할 거야, 엄마가 이제 몇 번이나 명절 쇠겠니? 그전에 내가 이렇게라도 해주고 가야지 너네들이 크게 신경 안 쓰고 살지."

모친과 아내는 이미 답정너로 다가오고 있었다. 그녀들은 이미 한통속이었고 나는 억지로 붙들려 인주에 엄지손가락을 찍고 부들부들 계약서에 장을 꾹 찍기 직전에 있는 것이었다.


"잠시만, 잠시만, 엄마 의견에 동의해요. 난 동의해, 절대적으로. 하지만 우리 1년에 한 번 지내는 차례고, 그 차례상 차리는 것도 일종의 축제처럼 즐기면 되고, 그리고 상다리 부러지게 제사상 차릴 필요 없이 조금조금 먹을 만큼만 몇 개 올려서 간단하게라도 지내자. 이런 전통을 아이들에게도 알려주고 물려줘야지. 그래도 우리의 전통이잖아. 우리 선에서 끊어버리면 아이들은 그냥 그 전통을 잃어버리는 거잖아."   

모친의 내리사랑 마음도 알고, 명절 음식 하기 싫어서 시어머니 편을 들고 있는 게 아닌 아내의 마음도 알고 있지만 속에서 부글부글 끓어오르는 감정은 어쩔 수 없이 튀어나오려고 해서 겨우겨우 잘 누른 채 차근차근 설득력 있게 압력 조절 밸브를 조정했다.

"그래, 그럼 차례상에 진짜로 먹을 것들만 놓고, 음식 종류는 격식 없이 그냥 그날 먹을 음식 올려도 되고 배달음식 올려도 되는 거로 하자. 애미도 만들어오던 잡채며 전이며 해오기 없기다."

큰 무리 없이 모친도 나의 의견에 동의했다. 그렇게 모친도 아내도 고개를 끄덕이고, 여동생도 불꽃 튀지 않는 협의에 안도하며 의견은 모두가 웃을 수 있게 잘 조율되었다.  


제사상과 차례상을 맘대로 좌지우지할 만큼의 콩가루 집안이라고 홍보하고 싶은 것은 아니지만, 아버지가 돌아가신 후부터 흐지부지 되는 친척들의 모임에 제사상이 단출해졌고, 차례를 지낸 후 먹는 공기밥 개수가 현저히 줄어들었기 때문에 모친께서 그 권력을 맘대로 휘두를 수 있는 것이라고 변호할 수 있겠다. 그러나 모친의 그 제안에 잠시나마 부글부글 끓어올랐던 것은, 퇴사를 선언한 아들을 믿는다며 응원을 해줬지만 아직도 백수 생활을 이어나가고 있어 어떻게라도 부담 주지 않으려고 애쓰는 어머니의 마음을 알아챘기 때문에 오히려 백수의 자격지심이 발동했던 건지도 모르겠다. 그래도 장남으로서 전통을 지켜내고 아이들에게 우리 민족의 정성을 대물림하기 위해 그 불뚝불 감정을 잘 통제하고 부드럽게 조율한 것은 잘했다고 생각한다.


댓글부터 읽어 재꼈던 성균관-차례상 표준화 방안 발표에 대한 기사를 다시 한번 자세히 읽어 봤다. 남의 제사상에 감 나와라 배 나와라 하는 극단적이고 자극적인 내용이 아니었다. 오히려 차례상을 꼭 격식에 맞춰 차릴 필요도 없고, 과하게 차릴 필요도 없다는 내용이었다. 필요에 따라서는 고인이 생전에 즐겨 드시던 어떤 음식이라도 올려도 상관없다고 이야기하고 있다. 그리고 부정적인 댓글을 예상했던 나를 가장 부끄럽게 만들었던 기사 문구는 다음과 같았다.

"다만, 이렇게 상차림을 하는 것은 가족끼리 서로 합의해 결정하도록 한다. 각 가정의 형편에 맞게 음식을 하는 것이 전통적인 예법이다. 마음은 음식의 가짓수에 있지 않으니 많이 차리려고 애쓰지 않으셔도 된다."

격식과 예보다는 가족의 화합이 더 중요하다는 말이다. 선조들은 이미 신세대 시어머니를 자처하고 있는 나의 모친보다도 훨씬 더 앞서 신식으로 생각하고 있었던 것이다.


나 죽은 다음 아이들이 차례상에 정종 대신 소맥을, 닭백숙 대신 치킨을, 전 대신에 피자를 올려줘도 그건 예법에 어긋난다는 잔소리 대신 흐뭇한 미소로 내려다봐야겠다고 저승에서의 삶을 다짐해본다.

지금도 어디선가는 실제 있을 차례상

https://v.daum.net/v/20220909201955163 

(성균관 차례상 표준화 방안 발표에 대한 기사의 링크입니다.)

https://v.daum.net/v/20220910010109536




많은 것이 가족과 협의에 의해 바뀌어도 알록달록 예쁜 한복은 크게 변하지 않았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정기 발행일이 마침 추석 날입니다. 이렇게 추석 인사를 할 수 있게 되어 영광으로 생각합니다.


민족 최대의 명절 한가위, 가족들과 함께 풍성하고 행복 가득한 하루 보내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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