걱정의 밀도

by 한배곧

2년 전 겨울, 부모님과 함께 대천으로 여행을 떠났다.

“겨울바다를 보면 마음이 편해”

어머니의 한마디가 만들어준 여행이었다.

대천은 적어도 내게 설렘이 없는 곳이었다.

몇 번이고 다녀온 탓에, 기대보단 익숙함이 먼저 떠올랐다.

맘만 먹으면 금세 다녀올 수 있는 거리 —

그 실용성이 낭만을 덮어버린 곳.



검은색 렉스턴 차를 타고 고속도로에 올랐다.

속도는 빠르지도, 느리지도 않게

바람이 차창을 스치는 소리가 기분 좋게 들릴 정도였다.

문득, 시간이 온전히 나와 함께 걷고 있다는 기분이 들었다.

나를 끌고 가는 존재가 아니라, 나란히 옆에서 걸어주는 벗처럼.

시간과 내가 수평이 되자,

걱정의 무게가 조금씩 가벼워졌다.

걱정의 밀도가 낮아지는 걸 느낄 때, 창밖 겨울의 차가움이 따뜻함으로 번지는 느낌을 받았다.

뒤에 타고 있는 가족들도 비슷한 마음이었을까.

눈꺼풀이 하나둘 내려앉더니,

차 안에는 조용한 숨소리만 남았다.

그 고요 속에서, 나도 모르게 웃음이 피어올랐다.


밀도는 부피 분의 질량



대학원에 있을 땐, 학위만 받으면 나를 줄기차게

괴롭히던 걱정이 모두 사라질 것 같았다.

하지만 졸업장을 손에 쥔 순간,

세상은 나를 전혀 다른 곳으로 던져버렸다.

나는 얼마나 오랫동안 수동적인 삶에 익숙해 있었던가.

학교의 울타리 안에서, 도전 없는 안락함을 택했던 날들이 떠올랐다.

박사학위 한 장은

이후의 인생 앞에서 너무 가벼웠다.

손바닥 위의 종이 한 장이

내 어깨의 짐을 덜어주지 못했다.

그래도 살아남았다는 사실에 스스로를 다독였다.

나는 지긋지긋한 부조리 속에서도 버텼고,

그 버팀 끝에 드디어 노예에서 해방되었다.

삶의 운전대를 다시 잡았다.

운전은 아직 서툴지만,

이제는 내가 방향을 정할 수 있다는 사실이

무엇보다도 다행이었다.




저녁으로 회를 드시고 싶어 하는 아버지는

다 같이 항구로 가보길 원하셨다.

땅거미가 진 항구에서는 짙은 바닷 내를 느끼게 해주는 세찬 바람이 불고 있었다.

나는 생선시장을 좋아하지 않는다.

호객하는 상인들의 너스레가

마치 내 운전대를 빼앗아 가는 것 같아 불편했다.

초대받지 않은 손님이 불쑥 삶에 들어오는 기분,

그 낯선 온기가 어쩐지 부담스러웠다.

그날은 상인들이 팔아야 하는 고기가 많이 남았는지,

유난히 더 너스레의 강도가 세찼다.

모두가 유난스러울 때는

가만히 있는 사람이 오히려 눈에 띄는 법이다.

왁자한 시장 한편에서

조용히 생선 매대를 정리하고,

간간히 생선들에게 새물을 끼얹어 주는 아주머니가 눈에 들어왔다.

고도로 뛰어난 상술이지는 모르겠지만,

일단 아주머니께 가고 싶었다.

괜찮다면 생선까지도 그곳에서 사고 빨리 시장을 떠나고 싶었다.


나는 그 아주머니에게 갔다.

“횟감 좀 볼 수 있을까요?”

도마에 고정되어 있던 얼굴이 나를 향했다.

피곤이 묻은 얼굴이었지만,

눈동자엔 묘한 생기가 있었다.

“오늘, 참돔이 좋아”

그녀의 말투는 담백했다.

큰 고무대야에서 참돔 한 마리를 건져 올리자

잠을 깨운 듯, 꼬리가 물을 철썩였다.

“다 비슷하지만, 이 놈이 튼실해 보여서 골랐어. 어뗘?”

형용사라곤 하나도 없는 담백한 말투가 나는 좋았다.

가격을 묻자

“참돔은 키로에 사만 원, 현금으로 줘도 가격에서 빼주는 건 못해줘, 대신 이것저것 골라주면 넉넉히 안 아숩게 담아줄께.“

그 대답도 솔직해서 좋았다.

그래서 아주머니가 골라준 생선으로 결정했다.

결정하고 결제를 마치자, 한마디 붙이셨다.

“아까 기지개를 켜는데, 그쪽 애기엄마랑 애기가 눈에 들어온겨, 나도 손녀 생각에 쳐다보는데 마침 여기로 오네, 반가워서 내보기에 젤 싱싱한 놈으로 고른겨. 애기는 몇 살여?”
“이제 돌 지났어요”
“아구 그래서 그렇게 귀여운겨? 참, 회뜰람 좀 걸릴 거니까 애기랑 요 앞에 항구 살짝 다녀와.”

아기 덕분에 되찾은 아주머니의 너스레도 좋았다.

아기에게 바다를 보여주고 싶어서

“그럼 다녀올게요, 잘 부탁드려요."

라고 말한 뒤 아기를 안고

항구 방파제로 가서 바닷바람을 느꼈다.




겨울바람이 매서워,

아기의 볼이 고운 홍시처럼 발그레졌었다.

이내 아기가 감기에 걸릴까 아기와 아내를 차로 돌려보냈다.

그리고 혼자 다시 시장으로 돌아왔다.

그때, 우리가 주문한 생선의 손질이 막 끝나가고 있었다.

그 사이, 다른 가족이 가게 안에 있었다.

두 돌이 지난 듯한 남자아이를 안은 아빠는

생선가게의 생선들을 하나하나 보여주며

이름을 가르쳐주려고 하고 있었다.

반면에 아기의 엄마는 뒤에서 걱정이 가득한 얼굴로 남편을 바라보고 있었다.

아주머니는 간간히 아이와 아이 아빠를 번갈아보며 무표정으로 묵묵히 손을 놀렸다.


그 순간 일이 벌어졌다.


아주머니가 생선 아가미로 칼을 쑤셔 넣으며 머리를 도려내고,

뱃속에서 내장을 능숙하게 빼내고 있었다.

아빠는 손가락으로 아주머니를 가리키며 아이에게 말했다.

“여기서 생선을 사면 저렇게 손질해서 맛있게 먹는 거야, 신기하지?”

동시에 아이의 작은 코끝이 파르르 떨렸다.

"에~~ 취."

재채기와 함께 콧물이 입술 밑까지 길게 흘러내렸다.

그 모습을 본 엄마의 얼굴이 단번에 달아올랐다.

“내가 아까 뭐라고 했어! 애기 감기 걸릴 거 같으니까 항구는 자기만 가고, 애기랑 나는 차에 있는다고 했지! 아휴… 왜 그렇게 고집을 부려 고집을…애기 발이 이게 뭐야! 양말도 잘 안신기고… 얼음장처럼 차자나!!”

거기에 나지막이 아주머니는

“생선집에서 생선 피비린내 나고 생선 내장 튀는 게 뭐가 좋다고 코찔찌리 애한테 보여주고 그려?”

라고 말하시는 것이었다.

그 말은 혼잣말 같았고, 동시에 모두를 향한 말 같았다.


짧은 순간

서로의 걱정들이 공중에서 부딪혔다.

가벼운 밀도의 걱정들이 먼저 튕겨나가고

가장 무거운 걱정만이 자리에 남았다.

나는 그 장면을 보면

아주머니가 왜 내게 ‘애기랑 잠깐 항구보고와’라고 했는지 깨달았다.


가게를 나서며 문 옆 벽을 보았다.

손녀와 함께 찍은 사진이 걸려 있었다.

그 속의 아주머니는

지금의 무표정한 얼굴과는 전혀 다른,

햇살 같은 웃음을 짓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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