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활속 일본어
“거짓말 하네. 거짓말.
구라! 내가 그건 안다. 구라!”
제가 얼마 전 정주행한 드라마 <이 사랑 통역 되나요?>의 한 대사입니다. ‘비행기 안에서 너 나한테 키스하지 않았냐?’는 일본 배우 히로짱(후쿠시 소타)의 말에 차무희(고윤정)가 그럴 리 없다고 펄쩍 뛰는 장면이지요.
엄밀히 말하면 일본어에서는 틀린 표현입니다. 여기서 차무희가 일본인이었다면 <구라>가 아니라 ‘우소(うそ)!’라고 했을 겁니다. 일본인들은 ‘거짓말’을 ‘우소(うそ)’라고 표현하지요. 그런데 차무희는 왜 <구라>라고 했을까요? 우리나라에서는 <구라>를 ‘거짓말’을 의미하는 일본어라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구라>는 어디서 왔을까 궁금해졌습니다. 일본어 교사였던 저는 막연히 ‘쿠라이(くらい:어둡다)’에서 온 말일 거라고 생각하고, AI에게 한 번 물어봤습니다. 그런데 아래와 같이 2개의 주요 설을 제시해 주더군요.
‘くらい(쿠라이): 어둡다’의 어간 ‘쿠라’에서 나왔어요. 어둠은 진실을 가리는 법이니 ‘거짓’으로 사용된 것입니다.
‘くらます(쿠라마스): 모습을 감추다, 속이다’의 ‘쿠라’에서 나왔어요.
꽤 설득력이 있네요. 어찌 되었든 일본어 ‘くら(쿠라)’라는 발음이 속해 있는 단어에서 나온 건 맞는 것 같고, 우리나라에서 ‘거짓말’로 사용되는 것은 분명합니다. 내친김에 거짓말의 종류에 대해서도 곰곰히 생각해 보았습니다.
① 자신의 잘못을 방어하기 위한 거짓말
② 남을 속여서 이득을 취하려고 하는 거짓말
③ 인정받거나 자신을 드러내기 위한 거짓말
④ 남의 잘못을 대신 커버해 주기 위한 거짓말
⑤ 남을 배려하는 거짓말
①~③은 나를 위한 거짓말, ④~⑤는 남을 위한 거짓말이라 할 수 있겠지요. 이 중에 ③번 정도는 애교로 봐줄 수 있지만 ②번은 절대 해서는 안 되는 나쁜 거짓말일 겁니다. 반면 ④번과 ⑤번은 우리가 살아가는데 사람과 사람을 이어주는 강력한 접착제가 될 수도 있습니다. ①,②,③번은 거짓말이 들켰을 때, 기분이 나빠지거나 화가 납니다. 하지만 ④,⑤번은 그것이 거짓말이었다고 알게 된 순간, 오히려 감동하거나 고마움을 느끼게 됩니다. 어쩌면 사랑도 이런 거짓말에서 시작되는 것 아닐까요? <이 사랑 통역되나요?>의 주호진(김선호)과 차무희(고윤정) 처럼요.
사실 몇 해 전부터 외국어(일본어) 교사로서 한 가지 고민이 있었습니다.
‘이제 외국인과의 웬만한 의사소통은 AI가 다 알아서 해줄텐데, 굳이 오랜 시간을 투자해서 공부할 필요가 있을까?’
그런데 그 해답을 이 드라마를 통해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1화>에 이런 대사가 나옵니다.
자신을 배신하고 일본에서 새출발한다는 남자 친구에게 마지막으로 매달려보기 위해 일본까지 찾아 온 차무희는 우연히 만난 통역사 주호진에게 애원합니다.
"좀 도와줘요. 내 마음을 좀 더
진정성 있게 전달하려면 AI보다
인간의 목소리가 통할 것 같아서요.
파파고로 까이면
너무 비참할 것 같아서 그래요.ㅠㅠ"
결국 차무희의 애절한 눈빛에 통역사 주호진은 차마 거절할 수 없어 부탁을 들어주게 되지요. 차무희는 모모짱 라멘 가게에서 만난 일본인 여자가 자신을 만나기 훨씬 전부터 남자친구의 연인이었다는 충격적인 사실을 주호진의 통역을 통해 알게 됩니다.
“근데 어떡하지? 나 눈물 나올 것 같애. 저 여자 앞에서 울면 나, 진짜 죽어버릴 거야.”
그러자 주호진은 차무희를 자신의 품으로 커버하고 이렇게 통역해 줍니다.
“그럼 이렇게 있어요. 내가 수습해 볼게요. 최대한 품위있게.”
何か誤解されているようですが、
나니까 고카이사레떼루요데스가,
(뭔가 오해가 있으신 것 같은데)
私たちは一緒に旅行中で
와따시타찌와 잇쇼니 료꼬추데
(저희는 함께 여행중이고요)
挨拶をかねて立ち寄っただけです。
아이사쯔오 카네떼 타찌욧따 다케데스
(인사차 들린 것 뿐입니다.)
こっちは礼儀を持ってお話したのに、あなたはほんとうに無礼ですね。
콧찌와 레기오못떼 오하나시 시따노니, 아나타와 혼또니 부레이데스네
(이쪽은 예의를 갖춰서 말한 건데, 당신은 정말 무례하군요.)
그야말로 순발력 있고 멋진 <구라>입니다. 바로 이 통역으로 인해 주호진과 차무희의 운명적이고 새로운 사랑이 시작되는 계기가 됩니다. 만약 AI가 통역했다면 이런 상황을 연출할 수 있었을까요? 어쩌면 사랑은 완벽한 번역이 아니라 따뜻한 오역에서 시작되는지도 모르겠습니다.
분명한 것은 언어에는 AI가 대신해 줄 수 없는 수만 가지의 감정이 겹겹이 담겨 있다는 사실입니다. 같은 단어라도 상황에 따라 전혀 다른 의미로 살아 움직이기도 하고요. 그래서 외국어를 배운다는 건 그 나라 사람의 문화와 감정까지 이해하는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그 과정을 통해 인간에 대한 이해의 폭을 더 넓히게 되는 것이죠.
어쩌면 우리 내면에도 주호진과 같은 ‘마음의 통역사’가 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상대의 말을 들으며 끊임없이 행간의 의미를 읽어 내고, 그것을 우리만의 언어로 다시 번역해 전달하는 존재 말입니다.
내 안의 통역사가 주호진처럼 상황을 읽고 사람을 먼저 생각하는 존재라면, 보다 인간적이고 합리적인 관계를 만들어 갈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저 AI처럼 정확하기만 한 통역사라면 오히려 관계를 차갑게 만들지도 모르겠습니다. 앞으로 제 마음속 통역사가 <구라>를 선택해야 하는 순간이 온다면 가급적 ④번이나 ⑤번에 가까운 쪽을 택하라고 일러두어야겠습니다.
제가 만약 지금도 교사라면 아래와 같은 문제를 가장 높은 배점으로 출제했을 겁니다.^^
몇 번이 정답일까요?
03. 위 '라멘가게' 대화 내용으로 볼 때 주호진이 친 <구라>의 종류로 가장 적당한 것은?[5점]
① 자신의 잘못을 방어하기 위한 <구라>
② 남을 속여서 이득을 취하려고 하는 <구라>
③ 인정받거나 자신을 드러내기 위한 <구라>
④ 남의 잘못을 대신 커버해 주기 위한 <구라>
⑤ 남의 아픔을 커버하는 배려의 <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