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저리주저리
“할거지?”
이 한마디로 시작되었다.
드라마 <슬기로운 의사생활 시즌1>에서 기억에 남는 장면이 하나 있다.
소아외과 조교수이자 대학병원 이사장직까지 겸임하던 안정원이 친한 친구이자 동료 의사들에게 한 장의 계약서를 내민다.
바로 ‘VIP 병동 전담의료진 고용계약서’.
간담췌외과 이익준, 흉부외과 김준완, 신경외과 채송화는 그 내용을 듣자마자 눈이 번쩍 뜨인다.
“연봉 두 배”라는 말에 반응 속도는 거의 응급수술 수준.
그런데 딱 한 사람. 산부인과 양석형만은 시큰둥하다.
양석형 : “난 엄마랑 더 놀래.”
안정원 : “연봉 두 배에 지정 주차.”
양석형 : “글쎄~”
안정원 : “하… 지정 주차에 단독 연구실, 교수 1인실 줄게.”
양석형 : “그런 거 말고. 내 조건은 딱 하나.”
안정원 : “뭔데? 다 들어줄게.”
양석형 : “밴드.”
연봉도, 주차도, 연구실도 아닌 ‘밴드’라니. 처음엔 웃기기도 하겠지만 그 장면의 배경을 알고 나면 양석형의 그 말이 더 이상 가볍게 들리지 않는다. 그 시점의 양석형은 같은 병원에 계속 남을지조차 확실하지 않은 상태였다. 결혼과 인간관계에도 실패해 혼자 남아 있던 사람이었다. 그래서 밴드는 단순한 취미가 아니었다. 그에게 밴드는 공식적인 약속이었고, 정기적인 만남이었고, 무엇보다 도망칠 수 없게 만드는 관계의 장치였다.
‘밴드’라는 한 단어는 어쩌면 이런 뜻이었을지도 모른다.
“나를 혼자 두지 말아 줘.”
“우리, 계속 만나자.”
이렇게 결성된 밴드가 바로 ‘미도와 파라솔’.
주중에는 정신없이 의사로 살아가고, 주말이면 양석형의 집에 모여 합주를 한다.
나는 이 장면을 보며 슬며시 웃고 말았다.
왜냐하면…
나도 이미 오래전에 비슷한 계약서를 한 번 내민 적이 있었기 때문이다.
“할거지?”
그 한마디에서 시작된 이야기.
2008년.
나는 같은 학교 후배 교사들에게 조심스럽게 말했다.
“우리… 밴드 한 번 해볼래?”
그렇게 결성된 것이,
경안고 교사밴드 KTB(Kyungan Teacher’s Band)다.
그런데 시작부터 난관이었다. 보통 밴드는 악기를 어느 정도 다룰 줄 아는 사람들이 모이기 마련인데, 우리는 한 학교에서 꾸리려다 보니 잘하는 동료가 거의 없었다. 결국 방법은 하나. 맨땅에 헤딩. 나조차 드럼을 맡기로 했지만 그전까지 스틱을 잡아본 적도 없는 완전 생초보였다. 그렇게 시작한 밴드가 어느덧 20년이 다 되어간다.
실력은 부족해도, 열정은 진짜였다. 솔직히 지금도 연주 실력으로 말하자면 내세울 정도는 아니다. 우리는 악기를 잘하는 교사들이 모인 팀이 아니라 그저 열정 하나로 뭉친 사람들이었다. 매년 신입생 환영회, 학교 축제, 지역사회 게릴라 콘서트, 방송 출연(KBS 9시 뉴스, SBS라디오 김창렬의 올드스쿨)까지 공연할 수 있는 곳이면 어디든 달려갔다.
그리고 무엇보다 우리에겐 든든한 팬들이 있었다. 바로 학생들이었다. 우리가 박자를 놓쳐도, 연주가 틀려도, 합이 어긋나도, 학생들은 늘 우레 같은 환호와 박수로 응원해줬다. 그 함성 덕분에 여기까지 올 수 있었는지도 모른다.
평소에는 교단에서 분필 가루를 휘날리며 수업하던 사람들이 이렇게 가끔 모여 음악으로 하나가 되고 서로 즐거운 시간을 보낼 수 있다는 것. 그게 얼마나 행복하고 감사한 일인지.
<슬기로운 의사생활>의 의사들은 전공이 달라도 각자의 환자를 위해 최선을 다한다. 그리고 밴드는 그들이 겪는 인간적인 어려움과 무게를 견디게 해주는 하나의 숨구멍처럼 보인다.
우리도 그랬다.
KTB 멤버들 역시 각자의 과목은 달라도 학생을 위해 최선을 다하는 교사들이었다.
사람을 상대하는 일만큼 어렵고 소모적인 일이 또 있을까. 그래서 더 필요했던 건
함께 버틸 수 있는 사람,
서로 웃을 수 있는 시간,
그리고 가끔은 ‘교사’가 아니라 ‘나’로 살아갈 순간이었다.
우리에게 밴드는 서로의 관계를 이어주는 강력한 장치이자 연대였다.
그래서 나는 확신한다.
우리는 이미 오래전부터 <슬기로운 의사생활>의 ‘미도와 파라솔’처럼
우리만의 <슬기로운 교사생활>을 해오고 있었다는 것을.
KTB가 앞으로 언제까지 이어질지는 모르겠다.
하지만 한 가지는 분명하다.
어떤 어려움이 와도 내 삶의 유대와 낭만으로 단단히 자리 잡았다는 것.
연봉 두 배도, 단독 연구실도, 지정 주차도 그저 조건일 뿐이다. 하지만 밴드는
사람을 붙잡아 주는 약속이고,
버티게 해주는 관계이며,
살아 있게 만드는 낭만이다.
그러니 앞으로 또 어떤 것을 새롭게 시작하고 싶다면, 일단 무조건 던져 보는 거다.
“할 거지?”
KTB공연 이력
· 경안고 축제 및 신입생 환영 공연(2008년~현재까지 매년)
· 안산시민 대상 안산시 노적봉 게릴라 콘서트 오프닝 공연(2008.08.30.)
· SBS라디오 '김창렬의 올드스쿨' 출연(2009.03.01.)
· 안산 시민을 위한 콘서트 위락공연(2009.06.26.)
· KBS 9시뉴스 출연‘음악으로 제자들과 소통’(2010.05.15.)
· 안산시 고3학생 수능 응원을 위한 게릴라 콘서트(2010.08.23.)
· 안산시 주관 봉사활동 박람회(화랑유원지) 초청공연(2010.10.09.)
· 안산 시민을 위한 청소년 락페스티벌 오프닝공연(2010.12.18.)
· 수능 후 수험생을 위한 위로공연(2011.11.11.)
· 안산 국제거리극 축제 공연(2012.05.05.)
· 안산시 청소년의 달 ‘열정유’ 초청 공연(2019.05.19.)
· 안산 올림픽기념관 공연장 ‘썬데이 믹스’ 초청 공연(2025.01.1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