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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예찬 Jan 31. 2021

씁쓸하고 진득하게 입안에 발린 것을 생경하게 느끼듯이

월간 에세이. 좋아하는 것을 사랑하는 일에 관하여 [1월]

[Comment]


이 문장으로 1년 동안 참 멋진 글을 써보고 싶었습니다. 하지만 늘 그랬듯이, 멋진 글보다 지독하게 솔직한 글로 회귀하게 되더군요. 마치 몇 년 전 그린만큼 잔뜩 써 내려가던 작가 노트처럼요. 생각보다 저는 나를 위한 글을 쓰지 않으면 살 수 없는 사람이었습니다. 아마 모든 글이 그러지 않을까 싶어요. 오예찬 글을 보면 누가 봐도 오예찬이래요. 그랬으면 좋겠어요. 잘 쓴 글이 아니라 오예찬이 쓴 글. 


이 글들은 노래를 듣는 듯이 읽혔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어요. 작사가는 사연과 진심을 가득 담아 노래 가사를 썼을지도 모르겠지만, 노래를 듣는 이는 결국 자신이 처한 상황과 마음으로 듣는 것처럼요. 그 청취자는 노래의 가사에 집중할 수도 있겠지만, 그저 잠시 침묵을 밀어내는 순간이 필요했던 것일 수도 있겠죠. 이렇게도 들려지고, 저렇게도 들려지는 순간처럼 글이 읽혔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어요. 그런 가벼운 마음으로 한 달 동안 써온 짧은 글들을 다듬어 띄워 올려보기로 했습니다. 


사족이지만 CD보다는 도톰한 카세트테이프가 더 정감 가는 것 같아 아무런 고민 없이 카세트테이프를 메인 이미지로 삼았네요. 책처럼 차곡차곡 쌓는 느낌도 있고요, 테이프를 돌리고 감는다는 손맛도 있어서 더 좋은 것 같아요. 


매달 말, “좋아하는 것을 사랑하는 일에 관하여”라는 문장을 둘러싼 가깝고도 먼 제 이야기를 나누려고 합니다. 지극히 사적이에요. 지극히 저를 위한 글이고요. 지극히 오예찬다운 글이 되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드는데, 아마 저는 제 자신을 그렇게 지키고 싶은 걸까요. 아마 저는 그렇게 부정하면서도 저를 사랑하려 노력하는 이상한 애인(인)가 봅니다.




1. 문장에 관한 사적인 이야기

“좋아하는 것을 사랑하는 일에 관하여”는 그저 우연히 떠오른 문장이었다. 막연한 상태로 머릿속이나 마음속에서 반복되던 문장. 나는 왜 그 문장을 되뇌고 있던 걸까 싶었다. 그러다 불쑥 내가 살아갈 2021년을 감싸 안을 문장으로 이것을 내걸게 되었다. 나를 궁금해하는 지독한 여정을 또다시 시작할 줄은 상상도 못했는데, 작품 창작을 그만두고 글에 집중하겠다던 사람이 다시 글로 자신을 낱낱이 더듬어보겠다고 한다.


1월 1일. 마치 특별한 마음을 품은 듯 이 문장에 대해 이런저런 생각을 글로 남겼었지만 사실 그 시작은 막연한 연기 그 자체였다. 무엇보다 ‘사랑’이란 말은 내게 전혀 익숙하지 않다. 내가 사랑을 받아본 적이 없거나 느껴본 적이 없다는 얘기가 아니라, 그냥 어색하다. “좋아한다”라는 말도 사실 그렇다. 한 번 내뱉으면 입안으로 살풋 말려들어간 입술에 혀를 쓱 문대 어색함을 지우려 하게 되는 말.


        “위클리 다이어리 페이지를 넘길 때마다 꼭 이 문장을 한 편에 적어 놓고 일주일을 시작했는데, 의외로 나의 눈은 공허하게만 그 문장을 마주하고 있었다”



오히려 피어오른 공허함 속에서 발견한 건 나를 확신하지 못하는 나 자신이었다. 


자기소개 따위를 할 때면 너무도 자연스럽게 “미술에 관심이 많고, 글을 쓰며, 이것들을 좋아하는 사람”이라고 말했다. 그렇게 말하면서도 나를 ‘문화예술 에디터’, ‘글 쓰는 사람’이라고 스스로 정의할 줄을 몰랐다. 나는 내가 누구인지 몰랐다. 세계가 나를 어떻게 받아들이길 원하는지 스스로도 알지 못하는 사람이었다. 더 정확히는 내가 세상에서 어떤 역할을 해야 하는지 스스로 믿지 못하는 사람이었을 테지. 입에서 흘러나오는 말과 내면의 망설임은 그렇게 꽤 오랫동안 어그러져 있었다.


“아, 나는 나를 먼저 확신할 수 있어야겠구나.” 견고한 직사각형 형태의 다크초콜릿 같은 맛의 문장이었다. 미적지근한 입안 체온에 녹아드는 초콜릿을 혀와 입천장 사이에 넣어 뭉근히 눌러 문대면서 녹여 먹듯이. 씁쓸하고 진득하게 입안에 발린 것을 생경하게 느끼듯이 나는 그 문장을 ‘고백’했다. 


         “좋아하는 것을 사랑하는 일에 관하여 말하기 위해서는 내가 좋아하는 것을 정의하면 된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내가 무엇을 말할 수 있는지 고민하면 되겠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내가 정작 마주친 건 “나는 누구인가”라는 질문이었다. 갑자기 너무 많은 것을 마주한 것만 같은 기분이 들었다”




2. 터무니없는 정의하기

‘좋아하다’, ‘사랑’, ‘사랑하다’라는 단어만큼 한두 문장으로 요약하고 정의하는 일이 터무니없는 단어도 없을 것이다. 이런 문자 기호보다 더 자유롭고 사사로운 몸짓으로 나타나는 예술로 표현하는 것이 더 어울리는 단어가 아닐까, 생각한다. 예술은 난해하고 모호하고 쉽게 받아들이거나 표현할 수 없는 느낌을 주곤 하는데, 적어도 내게는 ‘좋아하다’, ‘사랑’, ‘사랑하다’라는 단어들이 딱 그런 것이었다. 


새삼스러워하는 건가, 어색해서 거부하는 건가, 감정이 좀 메마른 사람인 건가. 중학생 때 단체로 건강검진을 받으러 갔다가 혈액검사 중 여러 번 바늘을 꽂아도 피가 나오지 않는 나를 보며 “이 피도 눈물도 없는 사람아”라고 내게 농담하듯 말하던 선배가 생각난다. 어쩌면 사실인가 싶기도 하다. 팔꿈치 아래살이 시큰거린다. MBTI 중에서 제일 희귀하고 인간관계적으로 다가가기 어려운 사람이 INFJ라고 하는데, 나조차도 나에게 다가가지 못하는 걸 보니 참 맞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어쩌면 나를 정의하는 일조차 터무니없는 일일지도 모른다. 그래도 해야 한다. 그래야 세상이 좀 더 편하게 나를 받아들일 수 있을 테니까”





3. 새빨간색이 아니라 보드라운 베이지색

무엇인가를 잠자코 써 내려가다 보니 “좋아하는 것을 사랑하는 일에 관하여”라는 문장이 꽤나 내 영혼에 잘 맞닿아 있는 문장인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뜨겁고 열정적인 애정이 아닌, 모호한 상태로 서로 지그시 응시하고 있는 태도와 상태로서 말이다. 나는 더 열정적인 것을 이 관계 속에서 찾을 수 있을까. 사실 지금도 좋지만. 딱 좋은 미적지근함. 새빨간색이 아니라 보드라운 베이지색.




4. 성냥과 성냥갑


    “만약 열정을 가진 분야가 이미 있고 이를 찾기만 하면 된다고 생각한다면 그건 미친 생각이나 다름없다.”*


일단 좋아하면 될 것만 같았다. 그 마음이 나를 움직이게 할 거라 생각했는데. ‘열정’이란 단어를 잊은 지는 오래였다. 눈을 꿈뻑거렸다. 아, 열정은 내가 태워야 했구나. 한동안 미쳐있었구나. 참으로, 여러 의미로. 쉼 없이 시간 뒤로 돌아가는 내가 지겹게 느껴지곤 하지만, 여전히 그래야 하고 할 수밖에 없던 이유가 이것 때문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든다. 


‘열정’이라는 단어를 다시 내면에 허용하는 날이 올 줄 몰랐다. 그것도 ‘좋아하는 마음’을 확신할 수 없는 시점에서 말이다. ‘좋아하는 마음’이 없다는 건 아니다. 다만 그걸 밖으로 고백하는 것이 어려운 단계에 있는 것일 테지. 미술을 좋아해요, 글을 좋아해요, 사실 관심받기도 좋아하고요, 근데 말을 많이 하면 그렇게 후회하는 사람이에요. 나의 ‘좋아함’마저도 의심하는 사람. 진짜 이상하죠. 그래서 글을 쓰는 사람이 되는 게 맞는 걸까 후회하기도 해요. 근데 글이 아니면 아무것도 못할 것 같아요. 진짜 이상해. 


나의 성냥은 어떤 형태를 하고 있을까. 멋스럽게 보라색 둥근 머리에 까만 나무 기둥의 형태를 가진 성냥이면 어떨까. 성냥갑에는 무어라 새길까. 아, 그럼 성냥갑은 무엇이 되는 거지. 삶? 한계? 껍데기? 와중에 까만 나무 기둥 위로 금박으로 내 이름을 조그맣게 새겼으면 좋겠다는 상상을 한다. 늘 이런 식이다. 결국은 빨간 머리에 나무 다운 나무 기둥, 곧 시커먼 사포질을 당할 평범한 열정조차 그려보지 못했으면서. 나는 그렇게 무의미하지만 영롱한 물웅덩이에 나를 자주 방치하는 편이다.  


무엇인들 어떠할까. 삶의 끝에서 ‘열정’을 가늠하게 된다면 성냥갑에 이쁜 소리로 달그락거리는 성냥의 개수가 아닌 가득 쌓인 재의 언덕과 말라비틀어져 버린 막대의 무게로 가늠하게 될 것인데. 그렇다면 아낌없이 태워도 되겠네. 안도감이 밀려온다. 손끝에 화상도 한 번쯤 맺혀주고, 덜 탄 성냥도 몇 개 두고. 시커멓게 바싹 말라버린 것도 몇 개 두고. 다채롭게 태워보자. 우스꽝스럽지만 나는 그러고 싶나 보다. 오락가락, 그런 걸 좋아하나 보다. 


*도서 <지속가능한 삶을 모색하는 사피엔스를 위한 가이드>(저자. 김선우)에서 인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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