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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예찬 Feb 28. 2021


'가능성'이란 거짓말

월간 에세이. 좋아하는 것을 사랑하는 일에 관하여 [2월]

[Comment]


처음에는 각각의 글이 우연히 떠올린 것에서 시작되었다고 생각했고, 그저 단편적인 글뿐이라고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완성되어 나열된 그 모습을 보니, 그 글들은 예상보다 더 그 시간에 살고 있던 ‘나’를 증명하고 있었습니다. 이번에는 실마리 같은 것이 될 수 있도록, 글이 쓰인 시점을 함께 적어두었습니다.


1번부터 5번까지의 글은, 형식적으론 따로 존재하지만 한 존재를 두고 느슨하게 연결되어 있습니다. 내면의 흐름이 문득문득 보인다고나 할까요(물론 저에게만 보일 수도 있겠습니다), 글쓴이의 마음으로 덧붙여봅니다.


일기 같은 성찰적인 글부터 추상적인 글까지, 이번에는 조금 더 다양한 글이 모였습니다. “내가 보기에 참으로 아름다웠더라...”라는 고백을 우연히 한 번 더 하게 되더군요. 저의 아름다움은 이런 것인가 봅니다(‘아름다움’에 대한 것은 4번 글에서 만나보실 수 있습니다).


여담으로 손가락이 많이 간지러웠습니다. 다시 그림을 그리고 싶다는 생각을, 이런 글을 쓰며 다시 하게 되더군요. 하지만 글로 이야기하는 것 역시 재미있는 것 같습니다. 내가 오롯이 나로서 존재할 수 있는 글들이 좋다는 생각을 다시 했네요. 별별 글을 쓰고 있지만, 그 빽빽한 틈 사이 이런 글을 쓸 공간을 마련해둔 지난 나에게 감사의 인사를 보내야겠습니다.






:: 2월 끝에서의 2월 시작에 대한 이야기


1. '가능성'이란 거짓말

    이곳에 있는 대부분의 글들은 그 제목도 내용도 모두 2월 말에 처음 쓰였다. 그와 달리 “‘가능성’이란 거짓말”이란 제목은 유일하게 2월의 시작부터 내 머릿속을 맴돌던 것이었다. 그것은 우연히 떠올린 것치고는 꽤 충격적인 문장이었다. 그리고 사실인 것 같았다. 이 거짓말에 사로잡혀왔다는 것이 정말 맞는 것 같아서 아무도 모르는 곳에서 홀로 얼굴을 붉히며 이에 대한 고백을 해야겠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언젠가 찾아온 기회에 누가 시키지도 않은 반성문을 쓰고 나니 쉽게 물러나지 않을 것 같던 문장의 궤도가 제 자취를 감추었다. 그래서 2월 끝자락에서 나는 무조건 쓰겠다고 다짐했던 이 문장에 대한 글을 써야 하나 고민했는데, 그래도 담백하게 기록을 남기면 좋을 것 같다고 생각했다.


     지극히 개인적인 이야기다. 나는 ‘가능성’이란 단어를 참 좋아했던 것 같다. 나는 ‘가능성’을 믿었다. 그리고 “가능성을 믿는다”라는 말은, 내가 나를 확신한다는 것을 보여주는 가장 멋진 말인 것 같았다. 내가 그런 사람이었다기 보다는 그저 그런 사람이 되고 싶어서, 그 말을 곱씹고 또 곱씹었다. 하지만 여느 때와 같이 문득 인 회의적인 생각과 함께 의심 하나가 떠올랐다. “나는 ‘가능성’을 믿는 것 외에 무엇을 하고 있었을까”. 말 그대로 머리를 한 대 맞은 기분이 들었다.


    그러니까 게으른 나를 만든 건 사실 ‘가능성’이라는 것에 기대고 있는, 막연하기만 할 뿐인 믿음과 좋은 감정이 아니었을까. 물론 게으름이 아니라 언제든 취할 수 있는 휴식이라 말할 수 있었다. 하지만 그보다 앞서 밀려온 부끄러움은 그런 판단의 여유를 지워버렸다. 내가 ‘가능성’을 가능성이 아니라 거짓말로 만들어버린 건 아닐까 두려웠다. 내가 나에게 그런 짓을 저질러버렸다는 의심이 나를 그토록 두렵게 했다. 이것이 옳은 판단이었는지, 이유 있는 두려움이었는지는 그 누구도 알 수 없다. 하지만 나는 누가 시키지도 않은 반성을 그렇게 시작했다. 2월 내내 그런 마음으로 이 문장을 내 곁에 두고 매일매일 떠올리며 괴로워했다.




:: 2월 중간


2. 나를 말하는 일

    내가 나에게 보내는 반성문을 쓰고 있다. “과속 주의” 그리고 “비포장도로”라는 표현이 딱 어울릴 정도로 거친 글이 완성되었다. 죽든 말든 상관없다는 식으로 과속방지턱도 시속 120km로 넘어갈 기세의 문장들이었다. 화풀이, 투정 정도로만 정의될 수 있는 어리석은 글이었다. 과연, 날 것은 그렇다. 당연히 공개할 수 없는 글이다. 필요한 책임감을 짊어지고 다시 쓰거나, 나만 알고 있다가 잊는 글로 남겨야 한다. 전자와 후자 모두 택하기로 한다. 나만 알고 있는 것으로 남겨두고, 이것을 기억하며 새롭게 다시 쓰자. 솔직함은 다루기 어렵다. 그것이 공개되어야 하는 아이러니에 봉착할 때는 더욱이나 그렇다. ‘나’를 말한다는 건 정말 무엇일까. 


     며칠째 어깨가 욱신거린다. 어깨야 오래 앉아있는 일상에 늘 아프던 곳이지만, 근육이 들쭉날쭉 부풀어 오른 것 마냥 신경 쓰이는 건 오랜만이었다. 글을 쓰고 있는 이곳은, 이곳의 주인장은 정말 무슨 생각인지, 너무 춥다. 손톱이 보기 좋게 보라색으로 물들었다. 손은 미약한 체온이라도 나눌 겸 버벅거리다 제 엄지를 감싸며 주먹 쥐기를 반복한다. 고개를 들면 구름 하나 없는 시퍼런 하늘이 펼쳐지는데, 그 아래 갈색 지붕이 걸리고, 내 앞에 흔들리고 있는 얄팍한 나뭇가지 끄트머리가 겨우 그 지붕 위를 넘어서 하늘에 걸린다. 나는 그 장면이 너무 답답하고 시리다고 생각한다. 내 시선을 가로막는 지붕을 밀어버리고, 나뭇가지를 가위로 싹둑 잘라도 속 시원하지 않을 것이다. 그런 장면이 있다면, 그런 장면 오롯이 남아있는 것이 가장 이상적일 거라고 생각한다. 집을 나서며 우연한 망상 사이 “우리는(너는) 이상도 꿈꿀 수 없는 세상에 살고 있구나”라고 속삭였는데 내가 뭐라고 그런 말이나 중얼거리고 있었나 싶다. 나야말로 이상이란 걸 꿈꾸는 일을 두려워하고 있지 않은가. 


     “나는 그러지 못했다”라고 문장을 찍어낼 때마다 숨이 턱 막히듯 손가락이 멈칫한다. 너무 단순한 문장인데, 내가 살아온 방식에 내찌르는 대못같이 느껴져 숨이 막힌다. 왜 그러지 못했을까, 나는 정말 한심했구나. 하지만 내가 가장 두려운 것은 이것이다. “이렇게 말하고도, 앞으로 아무런 변화도 가지지 못한다면 난 정말 뭐가 되는 걸까” 이것이 그 대못의 가장 첨예한 끝에 매달려 있다. 내 어딘가가 관통되는 건 상관없는데, 그 날카로운 끝이 후벼파는 생경함은 이겨낼 수가 없다. 그럴 때마다 나는 정말 약한 사람, 인간이구나 생각한다. 그리고 두려워한다. 그것을 내가 또 핑계 삼을까 봐. 미간을 들썩이고 다시 양손의 엄지를 감싸며 손을 움켜쥔다. 그리고 한숨. 참으로 무기력한 한숨. 나도, 이곳도 너무 시리다. 


     푸르딩딩한 손을 목 언저리에 대니 참 따뜻하다고 생각한다. 내 몸에서 유일하게 열감을 내며 욱신거리던 어깨도 잠시 가라앉는 듯하다. 나를 말하는 일은, 헤아리지 못하는 것으로 지금의 내가 겨우 웅얼거릴 수 있는 하찮은 언어를 내뱉는 일이 아닌가 생각한다. 





3. 드로잉

    나는 그에게 멍청하다고 말했다. 누가. 그가 되묻는다. 나는 입을 떼지 않은 채 우리 둘 다, 라고 답했다. 그는 신경질이 날 정도로 입을 다문 채 나를 응시할 뿐이었다. 백지 위에 대충 그어진 검은 선 마냥 공허한 대면이 이어진다. 그는 우리가 이곳에 검은 페인트를 쏟아버렸던 때를 기억하냐고 물었다. 야속하게도, 나는 기억하고 있었다. 발길질 한 번에 실낱같은 존재가 지워지는 건 순식간이었다. 다시 드러난 이곳에 내가 어떻게 도달했는지에 대해서는 기억하지 못한다. 누군가는 시간이 약이라고 하던데. 막상 얕은 시선으로 다섯 손가락을 다시 확인하던 나는 막연하게 꿈이 아닐까 생각했다. 백색 상태의 꿈. 백색이라 정의하고팠던 꿈. 나는 흰색이 무엇인지 검은색이 무엇인지 알 도리가 없었다. 어쩌면 지금도 그런 것일지도 모른다. 그가 내 앞에 있지 않은가.


     그는 날렵하게 잘 다듬어진 연필이 아니어서 다행이었다고 말한다. 나는 굳이 그 말을 덧붙이는 그를 이해하지 못했다. 왜? 차리리 뿌연 연필선이 낫지 않았을까. 아니, 아니랜다. 그럼 너는 너를 숨겨줄 시커면 면을 완성하느라 선을 긋다가 제풀에 지쳐 하나의 점으로 소실해버렸을 거라고. 왜. 왜, 그러면 안 되는 걸까. 왜 연필이 아니라 그 끔찍한 구렁텅이를 내 발 가에 두었느냐고. 그날 네가 발로 찼지. 나는 다 알고 있어. 나를 지워버리다니, 그 우굴거리는 웅덩이에 내던져 버리다니. 아니, 사실 네겐 퍽이나 나른한 유영이 아니었냐고. 내게 시선을 올리고 있는 동공이 그 순간의 장면을 상기시킨다. 나는 입을 떼지 않은 채 우린 정말 멍청하다고 말했다. 아무 말도 없었다. 그의 동공을 피해 나의 등 위에서 사부작거리는 머리카락 사이로 숨어버리고 싶어졌다. 하지만 이미 그 바람이 이 꿈의 시작이었음을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알 도리가 없었다. 어쩌면 지금도 그럴지도 모른다.



4. 갈라파고스

    누군가는 기억할 것이다(그러지 않아도 상관없다). 나는 자주 무의미하고도 영롱한 그곳에 나를 방치하기를 좋아한다고. 그곳은 내가 깨뜨리겠다고 다짐하고 또 다짐하던, 마법사물에 클리셰처럼 나타나곤 하는 수정구슬 같은 것이었다. 무엇이든 비춰볼 수 있는, 빨려 들어가면 예상치 못한 이세계가 펼쳐지는 그런 수정구슬 말이다. 망상가. 몽상가. 말만 하는 사람 뭐 그런 거. 그곳은 내가 노력하지 않아도, “내가 보기에 참으로 아름다웠더라...” 고백할 수 있을 정도의, 글로 고스란히 남겨져야 했을 정도로 창조되고 가꾸어졌다.




:: 2월 중간과 끝 사이


5. 구슬 밖

    용기를 내서 지난 내가 썼던 글들을 다시 들춰봤다. 죽도록 부끄러울 줄 알았는데(나는 과거의 내가 쓴 글을 가장 무서워한다), 생각보다 과거의 나는 잘 해내고 있었다. 나를 단정 짓고 아무 근거 없이 평가하던 사람은 다름 아닌 나였던 것이다. 정말 부끄러운 글을 썼다고 생각했는데, 막상 고개를 들어보니 어쩌면 지금의 나보다도 더 의미 있게 자신의 여정을 이끌어온 내가 나를 응시하고 있었다. 생각해 보니 그렇다. 잘 넘어간 것보다, 부끄럽고 괴로웠던 고민이 더 선명한 잔상으로 남기 마련이다. 그리고 나는 그것만으로 지난 나의 모든 것을 부끄러운 것으로 치부해버렸다. 진짜 부끄러운 사실은 그러고 있던 나 자신이 아닌가.


     다행이었다. 새롭게 시작할 수 없는 사람이라 생각했는데, 다시 용기가 나는 것 같다. 나의 나약함이 골칫거리라고 했던 게 정말 맞다. 반성문 그 무엇이라 말한 글을 완성해서 올린 어제의 나에게 충고해 주고 싶다. 너, 그 글을 쓰기 전에 한 번이라도 마음 담아 지난 너를 들여다봤으면 어땠을까 싶어. 너는 아니라고 생각하는데, 너무 지난 너에게 모질게 구는 거 아니니. 내가 정말 그렇게 하찮고 부족하게만 살았을까. 아니잖아. 아니잖아. 너무 모질었다. 다들 가면을 쓰고 살아간다는데, 나는 가면 쓰는 법도 모르고 사는 게 아닐까. 방 한구석에 혼자 박혀서 내가 나에게 가면을 씌우고, 그 모습이 정말 나의 모습이라고 착각하고 있던 게 나의 자화상이었나. 


     언젠가 그런 자화상을 그렸던 것이 새로운 의미로 우연이 아니었다는 생각이 든다. 문을 낮춘다. 문을. 저 바닥으로. 턱 하나 없이 넘나들 수 있는 문으로. 열기만 하면 들어올 수 있는 것으로. 



자화상, 20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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