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예찬 Nov 27. 2020

2020.10.30_죽음과 예술

아무렇지 않을 수 있는 현재의 단상을 생각한다



슨하게 죽음에 대해 생각한다. 지금껏 내가 그것에 대해 얼마나 살펴보고 생각해왔는지 두리번거린다. 뜬금없이 왜 죽음일까. 더 정확히는 한 예술가의 작품 세계를 그러한 시선으로 살펴보려는 시도에서 이 모든 것이 시작됐다. 누구나 아는 포털사이트 검색창에 아무런 수식어 없이 '죽음'을 검색한다. 가장 먼저, 온갖 백과사전에 정의하는 죽음에 대한 텍스트가 나열된다. 스크롤을 조금 더 내린다. 블로그들, 죽음에 대한 책, 미학, 예술에 대한 이야기가 나열되어 있다. 의외였다. 우리는 생각보다 가볍고 다양하게 '죽는다'라는 말을 쓰지 않는가. 아, 생각해보니 '죽는다'라고는 많이 말하지만, '죽음'이라는 독립된 명사를 자주 마주하는 것 같지는 않다. 혹은 이 포털사이트가 모종의 필터링으로 이런 결과물들을 가장 첫 페이지에 띄웠는지도 모른다. 조금 더 스크롤을 내린다. 한 중학생이 차에 치이는 꿈을 꾼 이후로 죽음이 너무 무섭게 느껴져서 치료를 받아야 하는 문제인 건지 질문을 올려놓았다. 그리고 이런 단어도 함께 덧붙이고 있었다. "죽음공포증일까요?" 아. 그 단어를 마주하는 순간 알게 모르게 탄식이 터져 나온다. 가장 먼저 하는 생각. 죽음은 늘 두려운 것이 아니었구나. 죽음도 그것이 실감 나는 거리가 보편적이지 않구나. 죽음에 공포증이라는 단어가 따로 붙는 게 이질적으로 느껴졌다. 반대로 죽음은 공포가 아닐 수 있다는 것 아닌가. 


죽음은 공포가 아니다. 그러니 죽음을 공포의 영역에 따로 두어 부를 수 있다. 의미는 나아가지 않지만 문장은 계속해서 나아간다. 죽음은 두려운 것이 아니었나. 삶에서 필연적인 것이 아니었나. 하지만 그것을 지나치게 두려워해서는 현재의 삶을 이어나갈 수 없다. 그러니 죽음을 잊고 산다. 잊고 산다? 이 말도 이질적으로 느껴진다. 이질감을 느끼는 모든 감각에 질문한다. 내게 죽음은 무엇일까. 나도 그것이 무섭다. 나는 내 삶의 죽음보다 나와 연결되어 존재하는 다른 무수한 세계의 죽음이 더 무섭다. 무의식적으로 나는 그 상상에서 벗어나고자 한다. 문득 그 학생의 마음이 이해되었다. 잊어야 하는가. 


잠시 창밖을 바라보다 스크롤을 다시 올려본다. 죽음을 말하는 예술 작품에 대한 리뷰라든가 비평이라든가 일기라든가 그런 글들. 이런 생각을 한다. 예술은 우리 삶에서 그런 역할을 하는 것인가. 예술이라 하니 최근 읽은 라이너 마리아 릴케의 단편 <대화>가 떠오른다. 다시 스크롤을 내린다. 죽음이라는 단어가 들어간 게임 세일 기간에 대한 질문이 보인다. 그 아래에는 작가의 죽음이 저작권에 영향을 미치는 이유에 대한 질문이 있었다. 흥미로운 질문이었다. 검색 후 최초의 클릭을 허락했다. 하지만 생각보다 무미건조한 대답이 걸렸다. '무미건조함'은 더 이상 이의를 제기할 틈도 없다는 것을 의미한다. 아, 재미없네. 나는 그것이 분명 명료하고 정확한 정보지만 전혀 예술적이지 못한 대답이란 생각을 했다. 한 예술가는, 예술가는 몇 개의 말로 바로 설명될 수 없기에 예술이라 했다고 한다. 나는 그 말이 너무도 인상 깊어 기억에 남겼었다. 조금 더 스크롤을 내린다. 마음이 뒤척여지는 뉴스 칸이다. 테러리즘, 드라마에서의 등장인물의 죽음, 공무원의 죽음, 문학상 수상자의 고백 속 죽음, 택배 노동자의 죽음. 순식간에 지금 이 순간에 존재하는 세상 위 모든 죽음이 스쳐 지나간 기분. 기사 타이틀을 다시 읽어본다. "10살 때부터 죽음에 관해 썼다"는 루이즈 글릭 인터뷰 기사를 눌렀다. 두 번째 클릭을 그렇게 허락한 이유는, 그것이 가장 낯설었기 때문이었다. 


다른 죽음에 대한 소식은 내가 찾아가지 않아도 알려지고 알려지고 반복되고 복제되고 흩어지고 편집되고 복제되고 퍼지고. 아이러니하게도 나는 그것이 죽음이란 내용이 점차 사라진 쓸쓸한 껍데기가 오고 가는 것처럼 느껴질 때가 많았다. 그리고 그것이 아무렇지 않게, 무미건조하게 이루어지는 것이 무서웠다. 그래서 무분별한 가상 공간을 배회하지 않는다. 우울해졌다. 다시 예술가의 고백으로 돌아온다. 예술가와 죽음은 친구가 아닐까 생각한다. 죽음 없는 예술이라. 상상해보자. 일단 고대의 벽화를 지우고, 종교화를 지운다. 이미 그 자체로 서양 미술의 시작은 거의 사라졌다. 그다음, 바니타스(Vanitas. 라틴어로 '인생무상'. 삶의 덧없음을 그리는 장르. 죽음과 관련된 오브제가 자주 등장한다)를 지운다. 죽음에 대해 전설처럼 얽힌 화가들의 처절한 에피소드를 지운다. 가령 고흐의 마지막 작품, 권총, 미스터리 같은 것. 절망의 상징이 된 뭉크. 죽음이 그를 덮치지 않았다면 그는 어떤 예술을 펼쳤을까. 또 무엇을 지워야 할까. 유한한 삶 자체가 안겨주는 불안함, 조급함, 절박함, 그것이 일으키는 응축된 에너지, 떨림, 표출, 공포. 공포. 나는 다시 죽음공포증에 대해 생각한다. 그러곤 그만둔다. 다시 스크롤을 내린다. 베르나르 베르베르의 <죽음>이 나온다. <빅터 프랭클의 죽음의 수용소에서>가 나온다. 그 이상은 찾아보지 않았다.




조금 더 스크롤을 내린다. 국어사전. 죽음竹陰: 대나무 숲이 무성하여 된 응달. 아, 기호로서의 ‘죽음’은 다른 것이 될 수 있었구나. 영어로는 death. 완곡한 표현으론 passing. 조금 더 스크롤을 내린다. “죽음의 5단계”라는 것이 나온다. 흥미롭지만 망설이다 클릭했다. 미국의 심리학자 엘리자베스 퀴블로-로스가 1969년에 쓴 <죽음과 죽어감>에서 선보인 모델로서, 사람이 죽음을 선고받고 이를 인지하기까지의 과정을 5단계로 구분 지어 놓은 것이라 한다. 문득 그것이 죽음공포증이 담기는 그릇의 형태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 다섯 단계는 이렇다고 한다. 부정, 분노, 협상, 우울, 수용. 모든 이론이 그렇듯, 각 단계의 구분과 뛰어넘기는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에 대한 비판이 뒤따른다. 나는 흥미로웠다. 그것이 죽음이 아니더라도 꼭 삶에서 마주하는 절망적인 순간에 관한 것처럼 느껴졌다. 그렇다면 나는 이미 살면서 죽음과 닮은 순간을 느껴온 것이 아닐까? 뒤로 가기. 그다음은 “죽음을 먹는 자들”이란 것이 있었다. 해리포터 시리즈 제목이었다. 그다음은 교육성을 띤 백과사전. 다시 스크롤을 내린다.


어느덧 ‘죽음’을 검색한 결과의 첫 페이지, 그 마지막이었다. 너무도 이상하고 그렇게 느껴지는 것이 놓여있었다. 다음과 같다.


    파워링크 ‘죽음’ 관련 광고입니다. 엔터. G마켓 죽음. 링크. 엔터. 베스트상품 슈퍼딜 당일배송 쿠폰존. 엔터. 쇼핑을 바꾸는 쇼핑! 죽음 스마일클럽은 12% 할인 + 스마일배송 무료배송. 엔터. 죽음 옥션. 링크. 엔터. 옥션BEST 첫구매 혜택 스마일클럽 당일배송. 엔터. 옥션에서 쇼핑할땐! 신규회원 중복할인 쿠폰 3장 받고 스마일배송으로 죽음받기! 엔터. 다원라이프 후불상조. 링크. 엔터. 24시간 후불제 상조서비스. 엔터. 장례식 거품을 뺀 합리적인 가격제시, 장례지도사와 직거래, 저렴한 후불 상조서비스. 


그렇게 ‘죽음’ 검색 결과의 첫 페이지가 끝났다.


입에서 입으로, 놀라운 소식으로 쉼 없이 오고 가며 존재하는 죽음은 인간으로서 실감하는, 삶을 완성하는 것으로서의 죽음이 아닌 것 같다. 살아가는 세상. 살아가는 세상이 된 것만 같은 가상의 공간에서 그것은 늘 자극적인 것, 모든 것이 끝나는 것, 또 다른 사건을 불러오는 것, 늘 있던 뉴스 같은 것, 그러니 반복해도 되는 것. 아, 그렇구나. 그렇구나. 우리는 21세기 바니타스를 사유하고 그려보는 시도를 해야 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것은 비효율적이다. ‘쓸모 있는 인간’이 되는 데에 이 얼마나 쓸모없는 일인가. 이 웅얼거림의 기록은 또 얼마나 쓸모없는 일인가! 나는 다시 예술을 생각하고 싶어졌다. 예술이 말하는 죽음은 어쩌면 우리 삶에 놓여있을 거라 꿈꾸었던, 그리고 비로소 마주 하고 싶어했던 인간적인 죽음을 생각할 수 있게 하지 않았는가, 하고. 비로소 정말 ‘죽음’이 지닌 그 내용을 대면하게 하지 않았는가,라고. 다시 예술을 생각한다. 나는 그것이 사라진 척박한 삶, 그 거친 표면에 잔뜩 긁혀 생채기가 나고도, 가볍게 어딘가에 생채기를 내고도 아무렇지 않아야 하는, 아무렇지 않을 수 있는 현재의 단상을 생각한다. 2020.10.30.



작가의 이전글 2020.10.21_버스와 당근케익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