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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예찬 Oct 22. 2020

2020.10.21_버스와 당근케익

익숙한 레퍼토리였다




    요 며칠 컨디션이 좋지 않다. 오늘 막 두 번째 중간고사가 끝났다. 다음 주에 중간고사 레포트를 내면 된다. 그 다음 주에는 기말 레포트를 미리 내면 된다. 일주일에 시험 하나꼴. 평소 같으면 한 달 내내 시험을 쳐야 하는 이 상황을 끔찍하게 생각했겠지만, 지금은 무미건조하다. 하루에 하루 하나를 버티다 보면 끝나있다. 마치 오늘처럼! 그런 것이다. 익숙하다. 안 쉬면 뭐 어떤가. 쓰러지면 병원 가면 된다. 그리고 사실 쓰러지지도 않는다. 나는 의외로 내 정신보다 강하다. 눈두덩이에 모기가 물렸다. 아니 모기가 나를 문 거지. 중요한 일이 있는 날엔 늘 무엇인가가 꼬인다. 이걸 머피의 법칙이라 하던가. 학교까지 기어 올라가 할 만큼 시험을 쳤다. 충분했다. 흠, 좋아. 학교 앞 버스 정류장으로 간다. 가장 먼저 오는 버스를 타고 가기로 했다. 이게 무슨 말이냐면, 버스 A가 오면 카페ㄱ에 가는 것이다. 조금 더 타고 가면 카페ㅇ에 도착할 수 있다. 버스B가 오면 카페ㅎ에 갈 수 있다. 버스 C를 타면 카페ㅁ에 갈 수 있는데 거기는 멀게 느껴져서 요즘 가지 않는다. 버스 B가 왔다. 타고 카페ㅎ에 가기로 한다. 나는 이따금 정말 내가 이 느릿한 룰렛에 따라 나의 목적지를 정하는 것인지, 아니면 그러기를 바라기에 들어오는 버스들을 이런저런 핑계를 대며 무시하고 골라 타는 건지 알 수가 없다. 그래서 습관처럼 어제 어디에 갔더라 하고 고민한다. 생각보다 나는 어제 무엇을 했는지 떠올리지 못한다.


    머리가 시큰거려서 당근 케이크를 주문하고 내 옆에 두었다. 당근케익이지만 당근 향은커녕 크림치즈 향과 시나몬 향을 마스크 뒤로 듬뿍 빨아들이며 안도감을 취했다. 당근 향이란 무엇인가? 그러면서 취했다. 눈을 한 번 질끈, 그리고 두어 번 깜빡깜빡. 뻐근한 눈을 위로한다. 경쾌하게 타자를 두들긴다. 그것조차 경쾌하지 않으면 일상에 경쾌해질 틈이 없다. 생각해보니 모기 때문에 잠에서 깨다 겨우 다시 잠든 사이에 나는 또 나 때문에 불이 난 꿈을 꿨었다. 또 실수했겠지. 또 자책했겠지. 익숙한 레퍼토리였다.


2020.10.21.



2020.1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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