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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예찬 May 27. 2023

4. 정원은 아이가 흘린 잔해로 빛났다

비릿하고 다정한 물 내음이 눈가를 두드리면 꿈에서 깨어난다.

숨죽여 빛나는 나의 우울에게.

우울 위에 피어난 비밀의 세계.
우울이 내게 가득 안겨주던 외로이 반짝이는 이야기들.

날짜 끝머리가 7일 될 적마다 찾아옵니다.


-4-
정원은 아이가 흘린 잔해로 빛났다


나를 대신하여 호수에 침잠한 아이가 있다. 지느러미의 요정. 물 그림자. 아득한 눈동자를 빛내는 물구슬의 화신. 나의 물고기. 그림자가 지나간 자리엔 비늘 조각이 떨어졌다. 메마른 편린. 이름 없는 풀들 사이에서 아룽아룽- 정원은 아이가 흘린 잔해로 빛났다.


슬픔에 잠길수록 밝게 일렁이는 달빛 아래서 외로움의 그림자는 지나치게 선명했다. 칼날로 그으며 세상과 분리되어 버린 윤곽선. 그 아린 경계선을 감추고픈 그림자에는 자박자박 물이 고였다. 몽상을 찾아 물결을 새기다 이곳까지 스며든 호숫물이었다(그래서 호수는 단 한 번도 영원히 고여있던 적이 없었다). 고이다 못해 흘러넘친 물이 발뒤꿈치를 찰랑- 가지럽힐 때 놀라 뒤돌아 서면 아이가 있었다. 까만 동瞳과 까만 공孔의 눈맞춤. 멍울진 동공이 서로를 어루만졌다.


‘안녕’


그림자. 호수 웅덩이 위로 고개를 내민 아이. 나의 그림자. 뻐끔뻐끔 찰박이는 입술 소리만 겨우 낼 수 있던 아이는 내게 아무것도 말해주지 않았다. 낯을 가리는 나도 뻐끔뻐끔. 말하는 법을 잊고 아이를 바라봤다. 다행히도 우린 침묵을 두려워하지 않았다. 나와 아이의 거리에는 두려움이 앉을 자리가 없었다. 나는 이곳 풀밭 위에서, 너는 호수 아래서. 이곳에선 각자로 존재할 수 있던 우리는 서로를 지겹게 껴안다가 결국 서로가 배어버린 채 닮아버린 온기를 지니고 세계를 배회하고 있었다.


다만 우리의 호흡은 그렇지 않았다. 나는 허공을 마셨고 아이는 호숫물을 마셨다. 아린 통증의 냄새를 맡고 고개를 내민 아이는 허공에 오래 머물수록 하얗게 말라갔다. 아가미 대신 입술을 헐떡이는 아이에게 너무나도 미안해서 어서 돌아가라고, 돌아가라고 목소리를 내어주곤 했다. 무릎을 꿇고서 아이와 이마를 맞대면, 아이는 그제야 안심이 되었는지 호숫물과 함께 그림자 아래로 사라졌다. 슬픔과 미안함. 어쩌면 내가 아이에게 느끼는 유일한 감정이었고, 아이가 나로부터 느낄 수 있는 영혼의 결은 그것이 유일했다. 아이도 나와 같은 생각이었을까. 돌아가, 돌아가. 어르고 달래다 보면 나의 슬픔도 아이와 함께 돌아가 산호의 빛이 되었다.


한 번 고갤 내밀면 날 졸졸 따라다니던 아이의 입술은 늘 다른 음을 내었다. 나는 들리는 대로 따라 읊어보곤 했고 그렇게 늘 다른 감정의 때를 타곤 했다. 나는 아이에게서 새어 나오는 무료한 음악 속에 머물며 온갖 통증들을 어루만졌다.


아이가 떠도는 궤도, 그 궤도를 한 축 삼아 동그랗게 맺힌 소금 물방울에 깊게 입을 맞추면 짠 내음을 타고 눈꼬리에 맺히는 눈물. 물소리의 감촉이 느껴졌다. 어느 것은 동그랗게 하순에 맺히는가 하면, 거세게 부딪쳐 잘게 흩뿌려지는 것도 있었다. 발을 헛디뎌 후두둑 흘러내릴 때는 온 혈관이 잘게 떨렸다. 나는 살아있었노라고. 날카롭고 까만 그림자 앞에서 흐느끼며 읊조렸다.


사랑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 입맞춤을 마다할 수 없었고. 아이야 아이야. 짓궂게도 까만 동공과 물방울 그리고 지느러미로만 제 언어를 다 하는 그 아이를 마냥 외면할 수 없었다. 그렇게 속절없이 아득한 슬픔 속으로, 아늑함만을 좇으며. 빼곡한 나무들만이 고고하게 서 있는 깊은 숲속에서도 호수 곁에 머물렀다.


illustration by sasa
illustration by sasa


비릿하고 다정한 물 내음이 눈가를 두드리면 꿈에서 깨어난다. 아이는 사라지고 풀밭 곳곳에 떨어진 비늘들이 반짝였다. 꼭 비늘을 남기고 사라지던데, 아닌가 아이도 자신이 무얼 떨구고 가는 건지 모르는 걸까. 이름 없는 풀들 사이에 몸을 누인 잔해들은 빛으로 호흡했다. 정원은 그렇게 땅에서도 빛이 났다.


내가 가진 가장 여린 힘으로 집어도 비늘을 물을 집은 것 마냥 흘러내리다 말라 사라졌다. 할 수 있는 거라곤 물끄러미 바라보는 것뿐. 눈에 밟힐 정도로 선명한 비늘을 발견할 적이면 작은 유리 돔을 덮어주었다. 순전히 나의 욕심이었다. 조금이라도 더 곁에 두고 지켜보고 싶은 마음. 바늘에 그어진 얇은 나이테로 호수의 옛 모습을 마주하곤 했다. 나를 뒷바라지해주었던 그 지독한 슬픔을.


나는 다시 아주 깊이 침잠했다가, 불쑥 허공 위로 돌아온다.



illustration by sas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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