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상하지. 숨을 쉬는데 왜 외로운 걸까.
숨죽여 빛나는 나의 우울에게.
우울 위에 피어난 비밀의 세계.
우울이 내게 가득 안겨주던 외로이 반짝이는 이야기들.
날짜 끝머리가 7일 될 적마다 찾아옵니다.
-5-
무성한 모양을 한 새하얀 마음
메마른 벌판이 무성한 수풀이 되기까지.
내가 머무는 여기가 정원이 되기 전, 그리고 수풀이 되기도 전의 이야기야. 사막보다 메마르고, 바다보다 깊으며, 날카로운 바람처럼 외로웠었던 이곳을 나는 ’하얀 벌판‘이라고 불렀었어. 그래, 사실 여기에는 아무것도 없었어. 이따금 엄청 큰 ‘무더기’가 곳곳에 부풀어 올랐다가 느리게 사라지곤 했었는데 나는 그것을 ‘만개’라고 불렀어. 이름도 종도 모를 풀들이 어지럽게 잔뜩 뭉쳐져 만개한 모양이었거든. 나는 아픔을 잊고플 때마다 그 만개한 꽃들의 향, 숨이 막힐 만큼 짙고 유독한 향을 맡으러 잔뜩 개화한 무더기의 몽상을 꾸곤 했는데, 아마 그 탓에 나타났던 것 같아. 그것 빼고는 손톱을 세워 바닥을 벅벅 긁으면 이는 하얀 먼지들만 날아다닐 뿐이었지. 빛 하나 없이 새하얀, 아주 이상한 곳이었어. 거기선 숨을 쉬는 것조차 외로웠단다. 이상하지. 숨을 쉬는데 왜 외로운 걸까. 그래서 내가 만개의 꿈을 꾸었던 걸까. 그런 이상한 마음이 한 존재를 얼마나 쉽게 시들게 하는지, 넌 알까 모르겠어.
행여나 날카로운 바람에 생채기가 날까. 나는 하얀 천을 뒤집어쓰고 검붉은 빛의 리본 끈으로 천을 쓴 나를 감았어. 하얗고 하얀 것만 있는 그 세상에서 그 리본은 어디서 구했는지 아직도 모르겠네. 하여튼. 눈을 뜨고 있어도 어차피 볼 게 없었기 때문에 눈을 감은 채로 계속 걸었어. 그러고 보니 거기선 걷는다는 사실조차 너무도 외로웠었네.
어떤 말로 표현해야 할지 모르겠지만, 우선 ‘심장’이라 얘기해 볼게. 도망치고 싶은 마음은 새하얀 마음이야. 하얀 벌판은 그 마음, 심장을 가지고 있었던 것 같아.
어느 날, 정말 어느 날에 오랜 시간 숨죽이던 하얀 벌판이 움직이기 시작한 거야. 엄지발가락을 톡 두드리는 아주 자그마한 느낌이 들었을 때 나는 죽은 것이 부활한 순간을 목격한 것 마냥 놀랐단다. 마치 화석에서 새 살이 움트는 것만 같았지. 아무것도 기대하지 않았고, 모든 것을 외면하며 하얗게 멎었던 마음이 만개가 아닌 다른 몽상을 피워올리기 시작했어.
“이렇게 외로울거라면, 시린 바람에 떨다가 하얀 죽음을 맞이하지는 말자.”
불릴 이름 없는 들풀과 나무가 자라고, 벌판 한가운데에는 물이 심장 모양으로 동그랗게 고이고, 절벽이 새의 꿈을 꾸며 솟아나고, 곳곳에 나뭇가지가 벌판 위에서 고개를 내밀 즈음. 사근사근 몰려든 수증기가 하얀 먼지들을 밀어내며 까만 밤을 드러내었어. 그믐달이 왈츠를 추고 있던 까만 빛의 밤을.
아직 하얀 천 아래서 눈을 감던 나는 처음 느껴보는 다정한 바람에 잠에서 깨어나 무작정 걷기 시작했어. 홀린 듯이 타박타박 걸어나가는데 발바닥에 닿는 땅들이 간지럽고 폭신해서 눈물이 고였어. 곧 숨이 차오르는 것이 오르막길을 걷기 시작한 것 같았지. 오르막길이 끝난 것 같자 나는 천을 처음으로 벗어냈고, 솟아오른 절벽 위에서 야트막한 생기를 드리우기 시작한 벌판을 만날 수 있었어.
나는 무어라 말해야 했던 걸까.
하염없이 눈물만 흘렸던 기억이 나. 그 눈물은 이곳 정원에서 영근 첫 물구슬이었어.
아름답기보단 무성했지. 여전히 아픈 내음이 가득한 곳이기도 했어. 아픈 마음 위에 아픔이 그대로 자라났으니까. 그 무성하고 하얀 녹음은 아린 눈물이고, 그 눈물을 다독여주고픈 서툰 마음이고, 서툴지만 더 늦기 전에 내게 다가오려 했던 다급한 마음이야. 나도, 막 태어난 이 녹음도 완연하지 못했어. 이제 막 자라나 초라한 모습인 것들이 다정함을 꿈꾸고 있었나 봐. 그러지 않고서야 나는 천을 벗어내지 않았을 테고, 이 녹음도 이토록 부드러워질 수 없었을 테니까.
아프지만 더 늦기 전에 급하게 자라난 마음들. 여길 가득 채운 하얀 녹음에는 그런 바람이 깃들어 있어. 막 자라난 마른 풀들이 잘게 떨며 사부작사부작 거리는 소리가 곳곳에서 들려와. 벌판 위에 한 겹의 풀들이 자라고, 그 위에 또 두 번째 겹이 자라면, 다시 한 몸을 이루며 새로운 한 겹이 되는 느린 마음이 여리지만 단단하고픈 몸짓으로 쌓여갔지. 내가 서 있는 이 정원은 그렇게 태어났어. 지금도 그렇게 숨 쉬고 있을 거야.
나를 부를 목소리도, 누군가를 부를 목소리도 없이 미미한 박동소리만 백색 소음처럼 가득했던 이곳에 살아있음을 알리는 소리가 곳곳에 피어오르고 있어. 숨죽이고 귀기울여야만 겨우 들을 수 있는 속살거림이지만, 나는 그런 비밀스러움을 애정했으니까.
나는 처음으로 이곳을 사랑했어. 나의 우울을, 나의 부끄러움을, 나의 슬픔을 사랑하게 된 거야. 아무리 생각해도, 여전히 이상한 마음이지.
처음엔 부푼 풍선처럼 숨을 헐떡이던 하얀 심장이 차츰 안온하게 세상을 두드리고, 이곳을 배회하는 빛과 습기가 무수한 호흡이 되어 내게 다가올 때. 외로웠던 그믐의 달빛은 물과 공기를 투영하며 고요히 빛나기 시작했어. 그렇게 드리운 빛 아래서 나는 조금 더 찬찬히 나의 정원을 목도하기 시작했지. 그리고 지금이 되었어. 이곳의 이야기를 조금씩 서툴게나마 네게 들려줄 수 있게 된 지금.
나는 가끔 여기가 무의미하고 공허하기만 한 환상이 아닐까 의심하곤 해. 정말 환상이라면 나는 누구일까 두려움에 사로잡히기도 하고. 그래서 그렇게나 배회해왔나 봐. 이 하얀 녹음이 내게 무엇을 일러주는지 너무나도 듣고 싶어서, 나와 함께 꾸어가는 이 몽상이 무엇인지 알고 싶어서. 그 모든 것들을 놓치지 않고 간직해 내고 싶어서. 내게 서툴게 다가온 그 다정함이 날 이토록 간절하게 만든 거야. 이 간절함은 살아있으려는 존재의 떨림이고.
그래서 나는 오늘도 우울의 박하향 속에서 한 뼘의 시간을 더 살아내려 해. 외로운 만큼 더 반짝이는 이곳 정원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