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방원
조선 제 3대 왕. 태종 (1367년~1422년 / 재위:1400년~1418년)
태조의 아들 중에서 유일하게 고려시대에 과거 급제를 했습니다. (1382년 16세에 진사시 합격. 이듬해 1383년 문과에 급제)
조선왕조실록에는 아버지 태조가 이방원을 명나라 사신으로 보내면서 한 말이 기록되었습니다.
“명나라 황제가 만일 뭔가 물으면 네가 아니면 대답할 이가 없다.”
“너희 체질이 파리하고 허약해서 만리의 먼 길을 탈 없이 갔다가 올 수 있겠는가?”
이것으로 이방원은 상당히 영특하고 체격이 호리호리할 것이라 짐작할 수 있습니다.
조선 건국 후 이방원은 일등공신이었지만 정몽주를 선죽교에서 살해한 사건으로 태조와 갈등이 시작됩니다.
태조는 왕위를 막내 아들인 이방석에게 주려고 했습니다.
이 배경에는 정도전의 영향력이 있었습니다. 정도전은 조선이 왕권이 아니라 재상에 의해 움직이는 나라가 되기를 바랐습니다. 왕권이 축소되기를 원했던 것이지요.
더 나아가 정도전은 요동 정벌을 구실로 왕자들이 보유한 사병을 해체하려고 합니다. 사병 명부를 회수하고 무기를 압수하려고 하지요. 이방원은 이에 반발하고 결국 왕자의 난을 일으킵니다.
제 1차 왕자의 난(1398년)에서 이방원은 정도전을 제거합니다. 막내 동생인 이방석을 죽입니다. 그리고 둘째 형인 이방과를 잠시 왕으로 올립니다.
제 2차 왕자의 난(1400년)은 4번째 아들인 이방간이 왕위를 얻고자 군사를 일으킨 사건입니다. 이방원의 군대와 개성에서 시가전을 벌이지만 패배합니다.
이 사건을 계기로 정종 이방과는 왕위를 이방원에게 물려준다고 선언하고 폐위됩니다.
결국 태조는 이방원과 등을 돌리고 함흥으로 내려갑니다. 이것이 ‘함흥차사’의 배경이 되었지요.
태종은 조선의 기반을 잡기 위해서 많은 노력을 합니다. 세종에게 안정적으로 정권을 넘기고, 세종은 이런 바탕으로 조선 문화의 꽃을 피웁니다.
● 수도를 한양으로 재천도합니다.
● 신문고를 설치합니다. 궁궐 앞에 큰북을 설치하고 억울한 일을 당한 백성이 쳐서 왕에게 직접 호소하도록 했습니다. 현재 국민청원과 비슷한 것이지요.
● 호패법을 실시합니다. 16세 이상의 남자는 반드시 차고 다니도록 했습니다. 긴 나무에 이름, 나이, 관직을 적어 자신의 신분을 증명할 수 있도록 했습니다. 일종의 주민등록증이었지요.
● 청계천을 조성합니다(1406년). 북악산, 인왕산, 남산, 낙산으로 둘러싸인 한양은 비가 내리면 자주 홍수가 났습니다. 태종 이방원은 인공하천을 만들어 물길을 한강으로 유도했던 것이지요.
● 창덕궁을 건설합니다. 경복궁은 정도전이 구상했고, 또 왕자의 난으로 많은 피를 흘린 곳이라 태종 이방원은 싫어했습니다.
● 명나라 사절단을 대접하고 신하들과 회식을 할 수 있는 장소로 경회루를 짓습니다.
● 6조 직계제를 실시합니다. 예전에는 의정부라는 기관에서 영의정 좌의정 우의정이 중간 관리에게 받은 보고를 정리해서 왕에게 올리는 형식이었습니다. 하지만 태종 이방원은 6조(이조, 호조, 예조, 병조, 형조, 공조) 관리와 모여서 회의하는 방식으로 진행합니다.
● 사병혁파를 실시합니다. 태종 이방원은 왕이 되자 혹시 지방 호족이나 귀족이 반란을 일으킬지도 모르는 불안이 생깁니다. 그래서 정도전이 한 것처럼 개인이 군대를 가질 수 없도록 조치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