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권 강화를 시도했으나
아쉽게도 일찍 죽은 왕

이황

by 은빛바다


조선 제 8대 왕. 예종 (1450년~1469년 / 재위:1468년~1469년)



예종은 18세의 어린 나이에 왕에 오릅니다. 재위기간도 1년 2개월로 짧습니다.


왕위에 오를 당시에는 어머니 정희왕후의 수렴청정을 받습니다.


더불어 세조의 유언에 따라 원로 신하인 한명회 신숙주 등의 의결에 국정을 따릅니다. 세조가 일으킨 계유정난의 그늘에서 벗어나지 못한 인상을 줍니다.


예종은 11살에 계유정난의 1등 공신 한명회의 딸 한씨를 세자빈으로 맞이합니다.


한씨는 이듬해에 아들을 낳으면서 산후병으로 요절합니다. 아들(인성군) 역시 3살에 죽고 말지요. 야사에는 이것을 단종의 어머니인 현덕왕후의 저주라고 합니다.




1469년 예종은 할아버지 세종의 무덤을 경기도 여주 영릉으로 옮깁니다.


세종은 아버지(태종) 곁에 묻어 달라는 유언에 따라 헌릉 옆에 장사되었습니다. 그런데 풍수지리가 최양선은 그 자리가 ‘절사손장자’ 즉 후손이 끊기고 장자를 잃게 된다고 예언했습니다.


아무도 그 말을 믿지 않았지만 문종 단종 의경세자까지 일찍 죽자 예종은 할아버지 세종의 무덤을 서둘러 천릉한 것이지요.


조선시대에는 나라에 큰일을 극복하거나 업적을 세운 왕의 묘호를 ‘조’로 사용했습니다.


임진왜란을 극복한 ‘선조’, 병자호란을 극복한 ‘인조’ 등이 있지요.


효자였던 예종은 아버지의 묘효가 원래 ‘신종’으로 올라왔지만 조선 왕조의 기반을 만들었다는 의미로 아버지의 묘호도 ‘세조’로 바꿉니다.


당시 ‘조’는 1대 왕 ‘태조’만 있었기에 이 점에는 예종의 강력한 의지를 엿볼 수 있습니다.


● 어머니의 수렴청정에서 벗어난 예종은 서서히 왕권을 강화합니다.


분경을 금지합니다. 분경은 고위 관료집에 드나들면서 사조직을 만드는 것인데 여기에는 부정한 청탁이 많이 이루어졌습니다. 바로 계유정난의 공신들이 자기 세력을 넓히는 것을 견제하는 역할을 했습니다.


● 1469년 직전수조법을 제정합니다. 이는 둔전(변경이나 군수요지에 설치 군량에 충당한 토지)을 백성들이 경작하도록 허락하는 것입니다. 당시 백성은 관료의 토지를 경작하면서 국가와 관료에게 2중으로 세금을 냈습니다. 직전수조법은 여기에서 관료에게 가는 세금을 줄어드는 효과가 있었습니다. 그만큼 백성의 부담은 줄고 관료의 힘이 줄어 왕권이 강화되었습니다.


● 옛 정치의 잘한 점과 못한 점을 비평한 역사책 <역대세기>를 직접 서술합니다.


● 건국 초부터 예종까지 발생한 국내의 정변과 외침 사건을 기록한 <국조무정보감>을 편찬합니다.


예종 시기에는 두 가지 옥사가 일어납니다.


‘남이의 옥’은 이시애의 난을 평정한 공적으로 병조판서가 된 남이가 역모한 사건입니다. 이로 인하여 30여 명의 무인 가솔들이 처형되거나 유배되고 노비로 전락합니다.


이때 역모 사실을 폭로하고 죄인을 심문한 유자광 한명회 신숙주는 익대공신으로 이름을 올립니다.


‘민수사옥’은 사관 민수가 세조실록에 쓸 사초를 제출했는데 거기에는 신숙주 한명회를 비판하는 글을 쓰여 있었습니다. 민수는 계유정난의 공신들에게 그것을 들킬까 봐 사초를 빼낸 사건입니다.


실록에 쓸 사초는 제출하면 수정이 불가능했습니다. 조선왕조실록도 완성되면 절대로 후대왕이 볼 수 없었습니다. 혹시 선대왕의 기록을 고칠 수 있기 때문이지요. 그만큼 조선시대 실록은 확실한 역사성을 갖고 있습니다.


민수는 그것을 감수하고도 사초를 고치려고 했으니 당시 계유정난 공신의 위세가 얼마나 대단했는지 짐작할 수 있습니다.


1469년 11월 예종은 족질(봉와직염, 발에 일어나는 염증)로 갑작스럽게 죽습니다. 그 전까지 건강에 대해 아무 이상 징후가 없었습니다.


야사에 의하면 예종이 서서히 왕권을 강화하자 입지가 좁아진 한명회가 독살했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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