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호
조선 제 17대 왕. 효종 (1619년~1659년 / 재위:1649년~1659년)
소현세자의 죽음으로 인하여 그의 동생 봉림대군이 왕위에 오릅니다. 바로 효종입니다. 그는 단호하게 술을 끊으며 성실하게 지냅니다.
이날 임금(효종)의 말씀이 신하들이 술을 끊지 못하는 폐단에 미치자 이르기를, “내가 잠저(임금이 왕위에 오르기 전에 사는 집)에 있을 때, 술을 즐겨 취하지 않은 날이 없었는데, 세자위에 오른 뒤에는 끊고 마시지 않았다. 금년 봄에 대비께서 염소 고기와 술 한 잔을 주시기에 내가 마시지 않을 수 없었으나, 그 맛이 몹시 나빠 쓴 약과 다름이 없더라.”
- 연려실기술 제 30권 효종조 고사본말
효종은 봉림대군 시절에 삼전도에서 아버지 인조가 삼배구고두하는 장면을 봤으며 8년 동안 청나라에 인질로 잡혀 있었습니다.
청나라에서 소현세자는 관료와 교류하고 그들의 문화를 받아들였지만, 반대로 봉림대군은 청나라에 대한 복수를 키웁니다. 그 영향으로 왕이 되자 강력한 북벌 정책을 추진합니다.
북벌정책은 어지럽던 민생을 안정시켰습니다. 청나라에게 받은 상처를 간접적으로 치료하고, 왕권에 대한 분노를 청나라에게 돌리는 효과가 있었습니다. 효종은 민생을 위한 정책도 잘 펼쳤습니다.
● 북벌 선봉부대인 어영청을 강화합니다.
● 남한산성을 강화하는 수어청군을 재정비합니다.
● 임금을 호휘하는 금군을 기병화하고 그 수를 1000명으로 늘립니다.
● 네덜란드 표류인 하멜을 통해 새로운 조총을 생산합니다.
● 대동법을 충정도 지역까지 확대했습니다.
● 농서를 하나로 모아 집대성 한 <농사집성>을 편찬합니다.
효종은 주로 사림을 등용합니다. 이는 학식과 덕이 높으나 지방에서 조용히 학문을 닦는 선비입니다. 대표적인 인물로 송시열, 김집, 종준길, 허목, 윤후 등이 있습니다. 이들은 서인으로 활동합니다.
1659년 효종은 북벌 문제로 인해 송시열과 독대합니다. 이것을 ‘기해독대’라고 하는데, 주위에 내시나 사관을 전부 물러가게 한 뒤 둘이서만 만남이라 기록에 남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훗날 송시열이 밝힌 내용 중에는 이런 말이 있습니다.
예로부터 제왕들은 먼저 자신을 닦고 가정을 다스린 뒤에야 법도와 기강을 세웠는데 이것이 일의 순서입니다.
- 효종실록 효종 10년 3월
북벌에 대해 약간 부정적인 반응을 보입니다. 당시 지나친 군비 증가로 백성의 생활이 힘든 것도 있었습니다.
사실 효종의 북벌에 대해 의문을 제시하는 부분이 있습니다.
진짜 청나라를 치는 게 아니라 민생을 안정시키고 사대부에게 정통성을 얻고자 하는 형식적인 태도라는 것이지요.
효종은 피난처인 강화도에 성을 쌓고요. 47일 동안 항쟁했던 남한산성에 군량미를 축적합니다. 압록강에서 한양까지 이르는 중요한 길목마다 방어하기 위한 성을 건축합니다.
이게 과연 청나라를 치기 위해 북으로 올라가기 위한 북벌인지 의심이 일어납니다. 북진이 아닌 방어작인 전술이거든요.
더구나 청나라가 러시아와 전쟁하는 과정에서 조선에 조총부대를 요청합니다. 효종은 이를 받아들여서 두 차례나 ‘나선정벌’에 나섭니다.
효종은 기해독대 두 달 뒤에 죽습니다. 머리에 작은 종기가 돋더니 빠르게 자라기 시작합니다. 얼굴에 독이 퍼지고 눈을 뜨기 힘들 지경이 됩니다.
왕의 의사인 신가귀가 침으로 치료를 했는데, 병은 나았지만 피가 멈추지 않았습니다. 결국 효종은 과다 출혈로 41세에 죽습니다.
치료를 잘못 한 신가귀는 사형에 처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