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들을 죽이고 애민 정책을 펼친 왕

이금

by 은빛바다


조선 제 21대 왕. 영조. (1694년~1776년 / 재위:1724년~1776년)



영조가 40세가 지나서 얻은 귀한 아들이 사도세자입니다.


영조는 사도세자를 궁궐 ‘저승전’으로 보냅니다.


여기에서 영조의 정치적인 면을 볼 수 있는데, 저승전은 바로 선왕인 경종을 모셨던 곳입니다.


경종의 독살 혐의를 벗기 위해서 일부러 사도세자를 그곳에서 키우도록 한 것이지요.


문제는 저승전에서 근무하는 신하나 내시는 경종을 따라 영조와 반대 세력인 소론의 편이라는 것입니다. 아마 사도세자는 어린 시절부터 소론의 영향을 받았을 가능성이 많습니다.


사도세자는 성장하면서 책 읽기보다 무예에 더 관심을 둡니다, 이에 영조의 눈에 거슬리고 여러 가지 트집을 잡아 야단을 칩니다.


사도세자가 15세에 대리청정을 시작하면서 정치적인 견해가 얽히며 그 관계는 더 심해집니다. 결국 사도세자는 스트레스가 지나쳐 정신병이 일어납니다.


폭력적으로 변합니다. 옷을 입히면 찢어버립니다. 궁궐로 비구니를 불러들입니다. 아버지인 영조를 죽이겠다는 소리를 지르고 다닙니다. 왕을 죽이는 건 역적 행위죠. 능지처참을 당하고 3족이 몰살됩니다.


사도세자는 조선을 이끌어가는 왕위를 계승해야 합니다. 하지만 그 광기가 절정으로 치닫자 신하들은 왕으로 적당하지 않다는 상소를 올립니다.


더구나 왕권을 잡으면 영조의 세력인 노론이 숙청을 당할 가능성이 많았습니다.


만일 왕이 되어서 광기를 일으키면 그 사태는 더 커집니다. 이 지경까지 되니 영조는 고민에 빠집니다.


만일 당시에 왕위를 잇는 세자가 2명이라면 사도세자가 죽지 않았을 겁니다. 영조는 손자인 정조에게 기대를 걸고 과감하게 사도세자에게 자결을 명합니다.


“내가 죽으면 나라가 망하지만, 네가 죽으면 300년 종사는 보존된다.”

- 영화 <사도>에서 영조의 대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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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조 시대를 배경으로 만든 영화

* <사도>(2014년). 조선 왕조 비극사. 아버지 영조와 아들 사도의 갈등이 극한으로 이릅니다.


하지만 사도세자가 거절하자, 영조는 뒤주를 갖고 와서 사도세자를 가둬 버립니다. 8일 동안 물 한모금 주지 않고 자기 아들을 말려 죽입니다. 이게 조선 500년 동안 궁중 최고의 비극사 ‘임오화변’입니다.


이후 영조는 ‘사도(思悼)’라는 시호를 내립니다. 思: 생각 사. 悼: 슬퍼할 도. 아들을 죽인 것을 생각할수록 슬퍼한다는 의미입니다.


영조의 재위기간은 51년으로 조선왕조의 10분에 1을 차지합니다. 그 기간 동안 백성을 돌보며 조선 후기의 전성기를 엽니다.


탕평색을 실시합니다. 자신은 노론의 힘으로 왕이 되었지만 소론도 등용하는 정책을 펼쳐 조정에 안정을 취합니다.


1750년 균역법을 실시합니다. 농민의 군포 부담을 2필에서 1필로 줄입니다. 세금이 절반으로 줄어든 것이지요. 모자란 부분에 대해서는 결작이라는 제도를 만들었습니다. 토지 있는 지주들이 토지 1결당 2두씩 추가 징수해서 채운 것입니다.


양역의 절반을 감하라고 명하였다……. “그러나 민심은 진정을 시켜야지 선동을 해서는 안 된다. …… 이제 1필로 감하는 정사로 온전히 돌아가야 할 것이니, 1필을 감한 대처를 경등은 잘 강구하라.”

- 영조실록 71권, 영조 26년 7월 9일


신문고를 다시 설치했습니다.


국초의 고레에 의거하여 창덕군의 진선문과 시어소의 견명문 남쪽에 신문고를 다시 설치하도록 명하고…… - 영조실록 117권. 명조 47년 11월 23일


● 백성을 수백명 모으고 왕이 직접 의견을 묻는 ‘임문’을 29회나 열었습니다.


노비종모법을 시행하여 노비 자녀가 모계 신분을 따르도록 만들었습니다. 이를 통하여 노비의 숫자를 줄였습니다.


노비 공감법. 노비의 공납품을 반으로 줄인 제도입니다.


● 사형수는 함부로 죽일 수 없도록 3심제를 실시합니다.


청계천 준설공사. 한양이 넓어지면서 지방에서 많은 백성이 모여들었습니다. 그들은 청계천 주변에 천막을 치고 산에서 나무를 베어다가 생활했습니다. 그러자 비가 많이 내리면 산에서 흙이 밀려와서 청계천을 쓸고 내려가 백성의 피해가 극심했습니다. 이를 안타깝게 여긴 영조는 대대적인 청계천 공사를 진행합니다.


하늘이 임금을 세우는 것은 자봉(스스로 위함)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양민(백성을 돌봄)하기 위해서이다.

- 영조실록 99권. 영조 38년 4월 25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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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조의 실제 어진. 현재 본모습으로 남아 있는 어진은 '태조'와 '영조'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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