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산
조선 제 22대 왕. 정조. (1752년~1800년 / 재위:1776년~1800년)
사도세자가 죽은 임오화변을 겪은 정조의 나이가 11세입니다. 아버지가 대역죄인으로 죽었으니 정조는 죄인의 아들입니다.
어린 정조는 신변의 위협을 느끼면서 성장했습니다. 그 배후에는 사도세자를 죽음으로 몰고 간 노론이 있었습니다.
적도와 역당들이 흉모를 빚어내고 얽어내어 위태롭게 만들려는 계략과 협박하려는 꾀가 날로 더욱 급박하게 이루어지니, 나는 낮에도 마음을 졸이고 밤에는 방 안에 맴돌며 잠을 이루지 못하였다.
- <영조실록> 영조 51년 5월 3일
간신히 왕위에 오르자 이번에는 암살을 감지합니다. 그래서 정조는 갑옷을 입은 채 잠을 자기도 합니다.
대내에 도둑이 들었다. 임금이 어느 날이나 파로하고 나면 밤중이 되도록 글을 보는 것이 상례였는데, 이날 밤에도 존현각에 나아가 촛불을 켜고서 책을 펼쳐 놓았고, 곁에 내시한 사람이 있다가 명을 받고 호위하는 군사들이 직숙하는 것을 보러 가서 좌우가 텅 비어 아무도 없었는데…… 어좌 한가운데 있는 방 쯤에 와서 기와조각을 던지고 모래를 던지어 정그랑거리는 소리를 어떻게 형용할 수가 없었다. …… 친히 환관과 하인들을 불러 횟불을 들고 중류 위를 수색하도록 했다. 기와 쪽과 자갈, 모래와 흙이 이리저리 흩어져 있고 마치 사람이 차다가 밟다가 한 것처럼 되어 있었으니 도둑질하러 한 것이 의심할 여지가 없었다.
- <정조실록> 정조 1년 7월 28일
♦ 정조 시대를 배경으로 만든 영화
* <영원한 제국>(1995년). 규장각의 살인사건. 이를 파헤치는 규장각 대교, 그리고 정조의 계략.
그럼에도 정조는 사회적인 통합을 강조하며 조선 문화의 부흥을 이룹니다. 할아버지 영조를 이어 조선 후기의 르네상스를 이룹니다.
● 규장각을 설치합니다. 당파나 신분에 구분없이 인재를 등용하여 자신의 개혁 정치를 뒷받침하는 세력을 기릅니다.
● 1785년 국왕 호위의 전담부대인 장용영을 창설합니다.
● 1791년 신해통공을 실시합니다. 한양 종로의 시전(일종에 대기업)은 상권을 독점하고 있었습니다. 시전의 반대세력인 난전(법의 허락을 받지 않은 일종에 중소기업)을 상품을 팔 수 있는 권한이 없었습니다. 시전은 정치세력과 결탁하여 노론에 자금을 대고 있었습니다. 정조는 지금까지 시전에게만 상권을 주었던 ‘금난전권’을 폐지합니다. 육전(비단, 어물, 종이, 모시, 명주, 면포)만 제외하고 누구나 상품을 팔 수 있도록 조치합니다.
좌의정 체제공이 아뢰기를, “도성에 사는 백성의 고통으로 말한다면 도거리 장사가 가장 심합니다. 우리나라의 난전을 금하는 법은 오로지 육전이 위로 나라의 일에 순응하고 그들로 하여금 이익을 독차지하게 하자는 것입니다. 형조와 한성부에 분부하여 육전 이외에 난전이라 하여 잡아오는 자들에게는 벌을 베풀지 말도록 할 뿐만 아니라 반좌법을 적용하게 하시면, 장사하는 사람들은 서로 매매하는 이익이 있을 것이고 백성들도 곤궁한 걱정이 없을 것입니다. 그 원망은 신이 스스로 감당하겠습니다.”
● 노비를 면천해 줍니다. 정조 시기에는 안 되었지만 후대왕인 순조는 66,000명의 공노비를 해방합니다.
● 정조는 ‘죄인의 아들’이라는 굴레를 벗기 위해 아버지 사도세자의 복원, 추승사업을 시작합니다. 사도세자의 무덤을 수원 화산으로 옮긴 뒤 영우원에서 현릉원으로 격상합니다.
● 수원 화성을 축조합니다. 화산 지역의 백성들을 화성으로 이주한 뒤에 그곳을 과학. 기술, 농업의 중심지로 만들 계획을 세웁니다.
● 화성으로 행차하는 도중에 백성이 억울한 사연이 있으면 꽹과리를 울리게 했습니다. 이를 ‘격쟁’이라고 합니다. 그러면 정조는 행차를 멈추고 백성이 쓴 편지(상언)를 받도록 해서 처리해 주었습니다. 수원 화성으로 50여 회 행사하는 동안 상언을 받은 횟수가 1300건이나 됩니다.
정조는 1804년에 순조에게 왕위를 물려주고 어머니 혜경궁 홍씨와 함께 사도세자의 무덤이 있는 화성으로 내려갈 계획을 세우고 있었습니다.
화성을 발전시키면 다른 도시도 그것을 본받아 같이 발전이 될 것이다. 결국 화성을 중심으로 조선은 이상 국가가 될 것이다. 이것이 정조의 꿈이었습니다.
하지만 정조의 죽음과 함께 이상 국가는 무너지고 말았습니다.
♦ 정조 시대를 배경으로 만든 영화
* <역린>(2014년). 정조의 암살, 그와 얽힌 사람들의 하루.
정조의 죽음에는 아직 의문이 많이 남아 있습니다. 평소 정조는 종기로 많은 고생을 했습니다.
전교하기를, 머리에 난 부스럼과 얼굴에 생긴 종기가 어제부터 더 심해졌다. 씻거나 약을 붙이는 것도 해롭기만 하고 약물도 효험이 없어서 기가 더 막히고 쌓여서 화가 더 위로 치밀어 오른다.
- <정조실록> 정조 17년 7월 4일
나는 온몸에 뜨거운 시운이 상승하여 등이 뜸을 뜨는 듯 뜨겁고 눈은 횃불같이 시뻘겋고, 숨은 가쁘게 쉴 뿐이다. 시력은 현기증이 심하여 역시 책상에서 힘을 쏟을 수 없다. 더욱 사람으로 하여금 고통을 참지 못하게 한다.
<홍취영에게 보낸 정조의 편지> 1799년 7월 7일
1800년 5월에 정조는 '오회연교'를 발표합니다. 이는 노론의 정치와 반대되고 사도세자의 죽음을 억울하다고 규정한 것입니다.
또한 남인 강경파를 등용할 거라고 암시합니다. 노론에게는 협박과 다름없었습니다.
이후 한달 정도 지난 뒤 6월 28일 정조는 갑작스럽게 죽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