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치원생이 소풍 갈 때 착용하는 물병 같다. 환구는 순찰시계의 끈을 늘여 어깨에 건다.
승강기를 타고 가장 꼭대기층으로 올라간다. 문이 열리자 강당 로비의 어둠이 반긴다. 한밤중에 강당을 걷는 환구의 발소리가 선명하다.
길 건너편에서 모텔 네온사인이 깜빡거린다. 얼마 전에 저기에서 치정 살인이 일어났다. 한밤중에 경찰차와 119 구급대가 몰려오는 바람에 잠을 잘 수가 없었다고 그날 당직자가 알려주었다.
먼저 방송실로 올라가 문이 잠겨 있는지 확인한다. 가끔 출장이라고 속이고 짱 박혀서 자다가 퇴근 시간을 놓친 직원이 있다.
무대 뒤편 창고의 문을 연다. 사용하지 않는 의자가 천장까지 겹겹으로 쌓여 있다.
환구는 암막 커튼 사이에서 열쇠를 찾아 순찰시계에 넣고 돌린다. 시간을 확인한다. 9시 15분. 지하 2층까지 순찰을 돌면 30분 정도 걸린다.
계단으로 내려가면서 각층마다 아직도 근무하는 직원이 남아 있는지 확인한다. 사무실과 복도의 전등을 끈다. 인천본부 건물은 위층부터 어둠을 덮으며 하루를 마감한다.
한강은행 네트워크를 맡은 전산실은 아직 근무 중이다. 출입문 아래로 불빛이 새어 나온다.
그곳은 창문도 없고, 대형 컴퓨터가 잘 돌아가도록 아무리 무더운 날에도 20도를 유지한다. 한여름에 잠시 들려 땀을 식히기에 최적이다. 전산실 직원은 순찰을 돌 때 빼고는 얼굴을 볼 일이 없다.
식사도 식당으로 올라오지 않고 중국집이나 분식집에 주문해서 먹는 편이다. 하청이기는 하지만 기술직이라 청경처럼 함부로 대하지 않는다.
환구가 노크를 한다. 전산실 직원이 문을 열고 가볍게 목인사를 한다.
“몇시에 퇴근하세요? 세콤을 설치해야 해서요.”
안쪽 직원과 뭐라고 대화를 나눈 그가 대답한다.
“11시 정도 될 것 같아요.”
지하 주차장까지 순찰을 마친 환구가 당직실로 돌아온다.
김 과장은 이불을 덮고 누워 삼성 라이온즈와 한화 이글스의 야구 경기를 시청하는 중이다.
삼성의 투수 유니폼에는 임창용이라고 새겨져 있다. 야구를 즐기지 않는 환구도 매스컴을 통해 들어본 이름이다. 와인드 업 하고 던진 공이 이름을 모르는 타자에 의해 2루타를 맞는다. 야구공이 펜스 가까이 날아간다. 김 과장은 야구에 관심이 많은 것 같다. 혼자 중얼거린다.
"잘 쳤네. 저 자식 연봉이면 방금 안타가 300만 원 정도는 될 거야."
환구의 월급을 훌쩍 넘는 금액이다.
남자끼리 근무를 서면 잠들기 전에 간단한 술자리가 벌어지기도 하는데, 인사과장은 FM이다. 둘이 저녁으로 갈비탕을 먹을 때도 반주는 없었다.
“다 퇴근하고요. 전산실 직원만 남았습니다. 11시에 나간답니다.”
“알았어. 그런데 말이야…….”
김 과장이 TV로 향했던 눈을 환구 쪽으로 돌리며 말을 잇는다. 이유는 모르겠는데 표정이 한결 부드럽다.
“우준이랑 같이 일하잖아. 불편한 거 없어?”
또 우준의 칭찬인가. 환구는 머리에 뜨거운 피가 몰리는 것처럼 짜증이 난다.
“없습니다. 김 청경이 워낙 잘 하잖아요. 축구팀도 그렇고.”
“걔가 엉뚱한 면이 많아. 은근히 고집도 세고. 하여간 둘이 잘 지내고 있지?”
“네…….”
김 과장이 다시 TV로 고개를 돌린다. 도무지 혼자 히죽거리는 영문을 모르겠다.
전산실 직원이 시간에 맞춰 후문으로 퇴근한다. 다음 날 아침 6시에 다른 전산실 직원이 교대로 출근한다. 그보다 미화원이 더 일찍 나온다. 새벽에 문 열어달라고 창문을 두드리는 바람에 당직자가 허겁지겁 잠에서 깬다.
이제 건물에는 당직자 외에 아무도 없다.
환구는 뒷문 셔터를 내린다. 당직실 문을 잠그고 보안기에 세콤 카드를 꼽는다. 삑삑거리는 신호음이 울리더니 빨간불이 들어온다. 외부인이 유리창을 깨고 들어오기라도 하면 곧장 비상벨이 울리고 세콤 순찰차가 달려올 것이다. 당직자도 새벽이 될 때까지 고립이다.
당직실을 소등한 환구가 이불 안으로 들어간다. 미리 깔아 둔 덕분에 따듯하다. 하루 동안 시달린 몸이 풀어진다. 내일 미화원이 출근할 때 일어나려면 일찍 잠이 들어야 한다.
드디어 김 과장이 리모컨으로 TV를 끄며 끄으으응~~~~ 낮은 신음과 함께 이불을 끌어올린다.
얼마나 지났을까, 잠깐 잠이 든 것 같은데 환구는 당직실 창문을 다급하게 두드리는 소리에 깬다.
“도와주세요. 제발 도와주세요.”
여성의 목소리가 귀에 익은 것 같기도 하다. 어떤 상황인지 알지만 창문을 열고 무슨 일인지 확인하기가 두렵다. 눈을 뜬 김 과장도 어두운 천장을 두리번거리기만 할 뿐이다.
“불 켜 봐.”
전등 스위치를 올린다. 갑자기 밝아지는 당직실에 적응을 못 해서 양손으로 눈가를 덮는다. 간신히 벽시계를 확인한다. 자정이 넘었다.
창문 커튼을 젖히니 당직실 조명을 받은 여성이 창백하다. 사각턱이 인상적이라 누군지 금방 떠오른다. 중앙지점에서 근무하는 송수미 대리, 대출 업무를 맡고 있다. 로비에서 아침인사만 나눌 뿐 그냥 지나치는 사이다.
이런 시간에 이 여자가 왜 여기에서? 혹시 귀신이라도 씐 건가?
“저기 싸워요. 좀 말려주세요.”
아닌가 아니라 송 대리의 뒤편으로 남자 둘이 엉켜있다. 멱살을 잡고 흔들더니 바닥에 눕히고 그 위로 주먹으로 때리고 발로 차고 마치 격투기를 보는 것 같다.
“얼른 나가 봐. 저러다가 죽겠다. 난 경찰에 신고할게.”
세콤을 해제하고 뒷문 셔터가 올라가는 동안에도 욕하고 악쓰고 비명이 이어진다. 당직실 직통 전화가 울린다. 세콤에서 왜 한밤중에 보안을 해제했는지 이유를 물을 것이다.
슬리퍼를 신은 채 뛰어나간 환구가 공격자를 말린다. 바닥에 흩어진 핏자국에 어깨가 부르르 떨린다. 숨도 가빠진다. 약하게 보이면 안 될 것 같아 일부러 큰소리를 친다.
“아저씨, 그만하세요! 도대체 왜 이러세요? 여기에서 싸우면 어떡합니까?”
“너는 뭐야. 어디서 나온 새끼야!”
흥분한 공격자는 환구에게도 주먹을 휘두를 기세다.
뒤로 물러선 환구가 당직실 창문을 바라본다. 그의 시선이 환구를 따라 송 대리에게 고정된다. 송 대리와 눈이 마주치자 갑자기 기세가 수그러든다. 양볼을 들썩거린다. 금방이라도 눈물을 쏟을 것처럼 하소연이 짙은 얼굴로 변한다.
어라? 이 놈이 정신병자인가?
쓰러진 자는 어디가 어떻게 터졌는지 입술 주변이 피범벅이다. 그제야 환구는 진한 술냄새를 맡는다.
세콤 순찰차가 온다. 김 과장이 지원을 요청한 것이다. 곧 경찰차도 도착한다. 자동차 전조등이 모여 당직실 앞을 환하게 비춘다. 전부 파출소로 연행이다.
폭행 사건은 마무리가 되었지만, 김 과장이 당직실로 들어서려는 환구에게 휴대폰을 내민다. 따라가 보라고 지시하면서 지갑에서 10만 원을 꺼내준다.
하긴 이 정도 사건이면 나중에 서울 본부에서 알게 될 것이다. 당직자는 야간에 벌어진 모든 일을 확실하게 파악하고 있어야 한다.
드라마에서 많이 봤지만 파출소는 처음이다. 환구는 지은 죄가 없지만 이 곳에 들어온 순간부터 다소곳해진다.
새벽 1시가 지나가고 있다. 잠을 푹 자야 내일 근무를 설 수 있는데, 아무래도 우준에게 부탁해서 주차장 근무를 빼고 기사 대기실에서 자야 할 것 같다.
경찰의 지혈 방법이라도 따로 있는지 맞은 자의 얼굴이 말끔하다. 이마와 뺨에 붉게 찢긴 자국만 있을 뿐이다. 코피가 터져서 조금 전 얼굴이 엉망진창으로 보인 것 같다. 이빨이 흔들리는 것 같다. 입안으로 약지를 넣어 확인하고 있다.
흙이 엉겨 붙어서 그렇지 유명 메이커로 잘 차려입은 복장이다. 머리카락을 정돈하고 눈 코 입이 명확하게 구분되니 잘 생겨 보이기까지 한다.
“왜 때렸어요?”
순경이 취소를 시작한다. 나란히 앉은 둘 다 대답이 없다. 그들 뒤에 송 대리가 이마를 짚으며 서 있다. 유난히 사각턱이 두드러져 보인다.
“고소할 거예요?”
팔짱을 낀 순경이 맞은 자를 쳐다봤다가 때린 놈에게로 눈길을 옮긴다. 고소하면 경찰서로 입건이다. 문제가 심각해진다. 드디어 침묵이 깨지면서 맞은 자가 한숨을 크게 내쉰다.
“고소 안 해요. 저희는 셋 다 친구예요.”
“친구? 아니 친구끼리 그렇게 싸워요? 순찰차가 출동할 정도로?”
놀라기는 환구도 마찬가지다. 아까 죽일 것처럼 때렸다. 송 대리를 돌아보지만 이마를 짚은 자세는 그대로다. 처벌은 원치 않는다는 발언에 때린 놈은 숙연해지고 맞은 자는 기운이 살아난다.
“미안하다…….”
때린 놈이 무겁게 입을 뗀다.
“시끄러워, 넌 정말 나쁜 놈이야.”
맞은 자가 울먹거린다. 때린 놈이 고개를 돌리더니 소매로 눈물을 닦는다. 진짜 꼴값 떨고 있다.
“너, 수미가 한강은행 정규직이라서 전 여친 차버리고 쫓아다니는 거잖아. 나는 정말 수미 사랑해.”
어쩌면 얼굴을 가린 송 대리는 속으로 웃고 있는지도 모른다. 자기 때문에 남자끼리 싸우는 멜로 드라마의 주인공이 되었으니까.
해프닝은 훈방 조치로 끝난다. 파출소를 나서면서 친구들은 사과하지만 환구는 건성으로 받는다. 여전히 맨발에 슬리퍼를 신고 있다.
송 대리는 미안한 건지 창피한 건지 모르겠지만 애써 환구를 피한다. 당직자를 이렇게까지 고생시켰으면서 변명조차 없다. 내일 인천의 모든 지점에 소문이 퍼질 것이다.
환구는 휴대폰으로 김 과장에게 사건 내용을 보고한다. 택시를 잡아 인천본부로 향한다. 정말 지랄맞은 하루다.